63화 초인의 시대 (11)
오빠의 각성 능력이 왜 저 남자에게 나왔을까.
비슷하기만 하고 다른 능력인 건 아닐까?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을 지워 버리려는 듯 소냐가 필사적으로 다른 이유를 떠올렸다.
아니야.
아닐 거야.
“‘절대적인 힘. 말로 하면 간단하지만, 그래서 그게 뭐냐고 물어보면 의문이 생겨. 적어도 나는 그랬지.’”
니콜라이가 와인 잔을 빙글 돌렸다. 붉은 와인이 잔 안에서 부드럽게 움직였다. 흐음. 와인의 향을 한껏 들이켠 니콜라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선 힘이 뭔지 생각해 봤지. 힘의 본질이 뭘까. 고민 끝에 나는 힘이란 쟁취하는 거라고 결론 내렸다네.’”
모든 건 제로섬 게임이다. 우열을 가린 끝에 살아남는 쪽이 정의다.
재능, 노력, 운. 모든 요소가 그랬다. 자기보다 못한 재능을 잡아먹고, 자기보다 부족한 노력을 부수며, 자기보다 나쁜 운을 짓밟는다.
그게 힘의 본질이며, 절대적인 강자라는 건 모든 걸 빼앗은 존재였다.
니콜라이는 아직도 그날을 기억했다.
계속해서 늘어나는 각성자에 속이 뒤틀리는 경험을 하던 니콜라이는 어느 날 자신이 달라졌다는 걸 깨달았다.
하루아침에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가 돼 버린 것이다.
“‘능력을 각성하고 알아 버렸지, 세상이 신을 원하고 있다고.’”
각성자가 등장하고 니콜라이는 지난 수십 년의 인생이 무의미했다고 절규했었다.
아니었다. 무의미하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였다.
이건 운명이었다.
거대한 흐름이 신의 탄생을 원했고, 니콜라이의 인생을 안배한 것이다.
그렇게밖에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니콜라이가 각성한 능력은 그의 상황에 아주 딱 맞았다.
“‘타인의 능력을 빼앗는 능력이라. 내게 딱 어울리지 않나?’”
소냐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사형선고가 내려진 기분이었다.
역시 저건 오빠의 각성 능력이 맞았다.
소냐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오빠는 어떻게 됐어요?’”
“‘하하.’”
니콜라이가 짧게 웃었다. 직접 말하는 건 세련되지 못해서 자제했는데, 저렇게 물어보면 대답해 줄 수밖에 없었다.
“‘상대의 능력을 빼앗는 능력 같은 게 아무런 대가나 리스크가 없다고 하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겠나?’”
“‘오빠는 어떻게 됐어요.’”
“‘똑같은 말을 하게 하는군. 오빠가 진짜 멀쩡할 거라 믿는 건 아닌 것 같고. 현실도피인가?’”
“‘오빠는 어떻게 됐냐고요!’”
와인 잔을 내려놓은 니콜라이가 불꽃의 짐승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조금만 더 일찍 오지 그랬나. 그랬으면 마지막 인사 정도는 시켜 줬을 텐데.’”
“‘아. 아아.’”
아아아악! 소냐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소냐의 감정에 반응해 주변에 검은 구멍이 잔뜩 생겨났다.
콰아아앙! 검은 구멍에서 튀어나온 거대한 바위가 방 한가운데 떨어지며 바닥이 움푹 패었다. 쏴아아! 바닷물이 거세게 쏟아지며 바닥을 적셨다.
극도로 희귀한 공간계 능력을 확인한 니콜라이가 기쁜 목소리로 감탄했다.
“‘아주 훌륭하군.’”
니콜라이가 손가락을 튕겼다.
따악. 공중에 전기로 된 공이 생겨났다.
중요한 능력을 가졌기에 조심히 다뤄야겠지만, 일단 기절을 시켜 놓는 게 좋아 보였다.
너무 어리면 마나 혼란제를 못 쓰는 게 아쉽단 말이지. 아니었으면 깔끔했을 텐데.
허공에 열렸던 구멍이 서서히 줄어들고, 소냐가 겁먹은 눈으로 니콜라이와 전기로 된 공을 쳐다봤다.
“‘금방 네 오빠 곁으로 보내 주마. 한 3일 정도 후에 말이야.’”
니콜라이가 손가락을 까딱이자 전기 밧줄이 소냐에게 날아갔다.
소냐가 눈을 감았다. 곧 찾아올 고통에 대비한 것이다.
그리고.
“애한테 이게 무슨 짓이야.”
익숙한 목소리에 눈을 떴다.
화륵.
적련이 거세게 불타올랐다.
소냐를 노리고 날아오던 전기 구체가 깔끔하게 베여 사라졌다.
김태식은 적련을 들고 상대를 노려봤다.
니콜라이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마나 혼란제를 한계까지 투입했을 텐데. 벌써 멀쩡히 움직이는 건가? 신기하군.’”
“뭐라는 거야. 한국말로 해, 이 새끼야.”
김태식은 욕을 내뱉으며 소냐를 살펴봤다.
의자에 묶여 있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지만, 그것 외에는 멀쩡해 보였다.
늦지 않았나 보네. 서걱. 검을 휘둘러 소냐의 손발을 풀어 준 김태식은 이내 니콜라이를 향해 적련을 겨눴다.
“너는 오늘 사지 멀쩡하게 못 돌아갈 줄 알아라.”
“‘이거야 원. 영 품위 없는 놈을 만났군.’”
쾅! 바닥을 박차고 앞으로 튀어 나간 김태식이 적련을 휘둘렀다. 적련에서 시작된 불꽃이 거센 흐름을 만들어 내며 니콜라이를 덮쳤다.
화르르륵! 불꽃의 파도에 휩쓸린 니콜라이가 벽과 함께 끝없이 뒤로 밀려났다.
벽과 함께 니콜라이를 날려 버린 김태식은 소냐의 위치를 확인하고 재차 앞으로 달려 나갔다.
‘여기서 멀어져야 돼.’
소냐의 안전을 위해서도 멀리서 전투를 치를 필요가 있었다.
“‘불꽃의 검을 소환하는 능력인가. 희귀한 능력이군.’”
불꽃의 파도 안에서 니콜라이가 멀쩡히 걸어 나오며 말했다.
니콜라이의 몸 주변엔 바람의 막이 씌워져 있었다. 김태식이 미간을 찌푸렸다.
‘뭐야. 전기 공 같은 걸 소환하는 능력 아니었어?’
그럼 저건 뭐지. 마법 도구인가?
아니면 순수하게 원소를 다루는 게 능력일 수도 있었다. 매우 드물지만 그런 종류의 능력을 각성한 사람이 있긴 했다.
“‘제법 강해 보이는데. A급 각성자인가?’”
“아까부터 뭐라 지껄이는 거야.”
“‘공간계에 마검 소환 능력이라. 간만에 포식 좀 하겠군.’”
우웅―! 니콜라이의 몸 주변에 붉은 기류가 맴돌았다.
강화계 각성자에게서 자주 나타나는 능력 발현의 전조였다.
‘강화계?’
원소를 다루다 말고 강화계라니. 종잡을 수 없는 상대의 각성 능력에 김태식은 혼란에 빠졌다.
다중 능력자? 그런 사례가 여태까지 있던가?
바스락. 니콜라이가 부서진 벽의 잔해를 밟으며 자세를 잡았다. 콰앙! 바닥을 부수며 앞으로 달려 나간 니콜라이의 주먹이 거칠게 움직였다.
각성 능력. 철쇄권(鐵碎拳).
1식. 금강.
쩌저적! 공간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니콜라이의 주먹이 김태식의 머리를 노리고 쏘아졌다.
콰아아앙! 육체와 철이 만났다고는 믿을 수 없는 거친 소리가 연구소 내부에 울려 퍼졌다.
김태식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방금 그건 누가 봐도 무공이었다.
무공이라는 게 각성 능력이 없어도 배울 수 있다는 건 김태식도 잘 알았다. 하지만 그러기 힘들다는 것도 잘 알았다.
무공계 각성자는 자신의 무공을 타인에게 전수하지 못한다. 그들도 스스로의 무공이 어떤 건지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약 무공을 제대로 전수하고 싶다면 무공이 무엇인지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어야 되는데, 까놓고 말해 각성 능력이라는 편리한 힘에 길들여진 각성자들이 그런 걸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김태식이 보기에 무공을 전수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백한영 한 명이 끝이었다. 아. 검신 천진혁도 가능할 것 같았지만, 그 사람은 검을 쓰지 않나. 저 인간이 방금 쓴 건 권법이고.
즉 저건 각성 능력이라는 소리였는데, 원소 제어, 강화계 각성 능력, 거기다 무공계 각성 능력까지. 이런 많은 능력을 한 사람이 쓰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저게 뭐야, 대체. 사람이긴 해?”
“신의 능력이긴 하지.”
익숙한 언어가 니콜라이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살짝 당황한 김태식에게 니콜라이가 말했다.
“필요에 의해 다양한 나라의 언어를 익히고 있지. 한국어도 그중 하나라네.”
쩌저적. 니콜라이의 손에 냉기를 뿌리는 창이 소환됐다.
어? 묘한 기시감에 김태식이 눈을 가늘게 떴다. 저 창, 어딘가에서 본 적이―.
아. 생각났다. 실종된 러시아 소속 S급 각성자의 각성 능력이 딱 저랬다. 냉기를 뿌리는 아름다운 디자인의 창. 병기를 소환하는 능력자에 대한 자료를 전부 찾아봤기에 잘 알았다.
뭐지. 저 사람이 러시아 소속의 S급 각성자라고? 아니. 그 사람은 김태식이 알기로 여자였다. 저 녀석은 남자였고. 아예 다른 사람이었다.
다양한, 심지어 다른 사람의 것으로 추정되는 능력까지 사용하며, 인공적으로 각성자를 만들려고 한다?
한 가지 가설이 떠올랐다.
“능력 흡수.”
“머리가 잘 돌아가는구나.”
쩌저저적! 러시아 S급 각성자, 올가 블라딘의 각성 능력이었던 윈터 액시즈(Winter Axis)에 냉기가 집중됐다.
우웅―! 거기에 다양한 각성 능력이 집약된다.
각성 능력. 풍쇄혼일(風鎖混一). 바람이 냉기의 창을 감쌌다.
각성 능력. 백발백중(百發百中). 모든 행위에 명중력 보정이 붙었다.
각성 능력. 자이언트 슬레이어(Giant Slayer). 거인을 죽이는 힘이 깃들었다.
각성 능력, 각성 능력, 각성 능력…….
기기기긱.
공간이 일그러졌다. 창 한 자루에 너무 많은 힘이 모인 탓이었다.
“A급 각성자가 이것 한 번에 죽진 않을 거라 믿는다. 네 각성 능력은 맛있어 보이거든.”
각성 능력. 라인하르트류 마창술.
1식. 스톰 브링어.
쩌저저적—!
얼음의 폭풍이 연구소 내부를 휩쓸었다.
김태식이 다급히 마나를 끌어 올렸다. 화르륵! 화염의 검강(劍罡)이 겨울의 기운을 몰아내긴 했지만, 니콜라이의 능력이 다수 집중된 공격을 막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콰아아아앙!
적련과 윈터 액시즈가 만나며 거대한 폭음이 터져 나왔다. 충격을 못 버티고 김태식의 몸이 벽을 부수며 끝없이 날아갔다. 쾅. 쾅. 쾅. 연속된 충격에 정신이 아득해지기 직전, 김태식의 몸이 땅에 닿았다.
눈에 파묻힌 김태식이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콜록. 피를 한 움큼 토해 내자 정신이 좀 들었다.
‘괴물이다.’
김태식은 S급에 가까운 A급 각성자였다.
그리고 경험이 많았다. S급 이상의 각성자들을 자주 접했다는 뜻이다.
그 끝이 어느 정도인지 감도 안 잡히는 백한영을 제외하고서라도 이초아부터 권왕 윤한까지. 다양한 S급 각성자를 접한 김태식은 S급 각성자가 어느 정도로 강한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덕분에 김태식은 저 괴물 같은 놈이 어느 정도로 강한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S급이라는 규격으로 저 녀석을 담는 건 불가능했다. 그만큼 놈은 강했다.
S급과 SS급. 그 사이 어딘가가 아닐까.
그렇다고 녀석이 검신 천진혁과 동등할 거라 생각되진 않았다. 녀석의 약점은 의외로 뚜렷했다.
‘어설퍼.’
아직 S급도 아닌 김태식이 SS급으로 추정되는 니콜라이의 일격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아이러니하게도 녀석이 아직 많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지난 반년간 백한영에게 수련을 받아 온 덕에 바로 알 수 있었다. 니콜라이의 창술엔 그 무엇도 담겨 있지 않았다.
심지어 그 정도가 다른 각성자들보다 심했다. 일반적인 각성자도 하는 최소한의 고찰조차 니콜라이가 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정해진 경로로만 움직이는 창을 피하는 건 쉬웠다. 여파만으로도 이 꼴이 돼서 문제지. 녀석의 움직임을 다 예상할 수 있어도 힘의 차이가 이 정도로 나면 결국 이기는 건 불가능했다.
“다행히 살아 있었군.”
구멍이 뻥 뚫린 연구소 벽 안에서 니콜라이가 나왔다. 녀석의 손에는 여전히 냉기의 창이 들려 있었다.
빼앗은 능력은 하루에 한 번만 쓸 수 있다든가 하는 제약도 없는 거냐고. 김태식이 속으로 한탄했다. 세상에 저런 미친 각성 능력이 있을 줄이야. 진짜 상상도 못 했다.
“슬슬 끝내도록 하지. 재워 놓긴 했지만, 공간계 능력이 또 도망가면 피곤해지니 말이야.”
“소냐에게 무슨 짓을 했어.”
“무얼. 잠깐 정신을 잃게 만든 것뿐이다. 아직 죽이지 않았으니 안심해라. 내 소중한 능력 보관함을 사용하기도 전에 죽일 리 없지 않나?”
하는 말이 너무나 불손했다. 마치 능력을 빼앗으면 빼앗긴 사람이 죽기라도 한다는 듯.
역시 이대로 내가 지면 소냐도 무사하지 못하는 건가.
김태식이 적련을 쥔 손에 강하게 힘을 주었다.
충격에 온몸이 엉망진창이고 적과의 차이는 어마어마했지만.
해야만 했다.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선 더더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