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초인의 시대 (10)
똑. 똑. 똑.
물 떨어지는 소리에 김태식은 천천히 눈을 떴다.
‘여기는.’
머리가 어지러웠다. 기억이 꼬이고 현실감각이 먼 곳으로 떠나 버렸다.
무슨 일이 있었더라. 김태식은 정신을 차리기 위해 끙끙대다가, 자신이 어디에 묶여 있는지 확인하고 화들짝 놀랐다.
‘치과 침대?’
그 순간 기억이 촤르륵 떠올랐다.
소냐. 연구소. 소냐의 오빠.
그리고 얼굴에 흉터가 잔뜩 나 있던 남자까지.
꿈속을 거닐다가 현실로 순식간에 내던져진 김태식이 주변을 살펴봤다.
‘링거?’
비가 오는 것도 아닌데 왜 물 떨어지는 소리가 나나 했더니, 링거가 팔과 연결이 돼 있었다.
김태식은 고개를 살짝 들어 자신의 몸을 내려다봤다.
위험한 정신병자를 묶어 두기라도 하듯 단단히 구속된 몸. 외부의 도움이 없다면 빠져나가기 힘들어 보이는 상황이었지만, 김태식은 침착하게 마나를 끌어 올렸다.
일반인이라면 모를까. A급 각성자에게 이 정도 구속은 아무런 효과를 발휘하지 못―.
‘…….’
마나를 끌어 올리다 말고 김태식이 멈칫했다.
마나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조금 더 정확히는 마나가 난폭하게 날뛰었다.
김태식은 옆에 있는 링거로 시선을 옮겼다. 처음엔 포도당 같은 건가 하고 신경을 껐는데, 마나가 난폭하게 날뛰는 상황을 겪으니 저 녀석이 의심이 갔다.
적련을 소환하는 걸 대놓고 보여 줬음에도 일반인 대하듯 대충 묶어 놔서 이상하다 싶더라니. 이런 수작을 부려 놨구나.
으윽. 구속구를 풀기 위해 김태식이 몸부림을 쳤지만, 마나를 사용하지 못하는 각성자가 낼 수 있는 힘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렇게 단단히 묶여 있으면 마나를 사용하지 않고는 탈출이 불가능했다.
역시 이곳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마나가 필요한가.
육체의 능력만으론 구속구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걸 깨달은 김태식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김태식은 지난 몇 달간 많은 훈련을 했다. 대부분이 백한영이 시켜서 한 거긴 했지만, 바꾸어 말하자면 커리큘럼을 착실히 따랐다고 할 수도 있었다.
백한영은 김태식에게 꽤 많은 것을 요구했고, 거기엔 마나에 대한 부분도 있었다.
‘각성자들은 너무 각성 능력에만 신경을 쓰는 느낌이야. 육체나 마나도 능력 중 하나인데 너무 등한시하는 거지.’
‘일반적으로 각성자들은 훈련을 할 때 기술과 체력을 기르는데요?’
‘없으면 죽을 것처럼 붙잡고 늘어지는 각성자가 적다는 얘기야. 각성 능력은 사라지면 죽을 것처럼 집착하면서 다른 건 있으니 그냥 쓴다는 느낌이잖아.’
백한영의 말을 요약하면 간단했다.
각성 능력을 갈고닦는 걸 뭐라 하진 않겠다. 그건 주어진 재능을 갈고닦는 것과 똑같은 것이니 잘못되지 않았다.
다만 다른 것도 좀 신경 써라.
요컨대 가지고 있는 패가 여러 개인데 하나만 사용하는 건 미련한 짓이라는 거다.
‘후우.’
모든 걸 똑같이 공들여서 발전시키면 좋겠지만, 그러기엔 사람에게 주어진 시간은 유한했다.
때문에 김태식은 주로 세 가지를 중점으로 훈련을 진행했다.
검법, 각성 능력, 마나 제어. 이렇게 셋을.
각성 능력은 백한영도 잘 모르겠으니 알아서 하라고 했지만, 검법과 마나 제어 능력에 대해선 세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각성 능력은 너무 이질적이야.’
‘어떤 점이요?’
‘그것 하나 있다고 너무 많은 걸 할 수 있잖아. 세상에 각성 능력 하나 있다고 매화를 피워 내는 게 말이 되냐고.’
능력을 각성하는 순간 각성자들은 자기의 능력이 뭔지, 뭘 할 수 있는지 알게 된다.
마나를 제어하는 방법, 설계하는 방법 같은 걸 몰라도 의지만 있다면 대부분의 절차를 무시하고 능력을 발동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각성자들은 마나를 제어하는 법에 약했다. 각성 능력이 알아서 다 해 주다 보니 그런 부분이 덜 성장할 수밖에 없었다.
딴에는 훈련을 한다곤 하지만, 백한영의 눈에는 영 아니었다.
‘목표를 뚜렷하게 잡아.’
‘어떤 식으로요?’
‘예를 들면, 각성 능력의 도움 없이 순수하게 마나 제어만으로 각성 능력을 재현해 내겠다든가. 여러 가지 많잖아.’
김태식은 난폭한 마나의 고삐를 잡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마나가 난폭해 봤자지. 난폭한 마나를 제어하는 것보다 마나로 적련의 형태를 빚는 게 백배는 더 어려웠다. 이 정도에서 막혔다가는 그동안 개고생한 게 다 헛짓이 됐다.
화륵. 적련이 구속구를 불태웠다. 치과 침대에서 풀려난 김태식은 링거 바늘을 뽑아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 상태는 생각보다 나쁘지 않아.’
몸이 조금 무겁긴 했지만, 딱 그 정도가 끝이었다. 마나도 링거를 뽑아낸 순간을 기점으로 빠르게 안정되고 있었다. 시간은 조금 걸리겠지만 아마 30분 안쪽으로 멀쩡해질 것이었다.
‘30분.’
기절하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서 30분을 더 보내도 될까.
얼굴에 흉터가 가득했던 남자의 목적이 뭔지 알 수 없었지만 그가 소냐를 데리고 간 건 확실했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김태식이 굳은 몸을 풀고 방 밖으로 이동했다.
그때.
끼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김태식은 나가려던 몸을 재빨리 돌려 침대에 누웠다.
“‘음음음. 흠흠흠.’”
콧노래를 부르며 누군가 김태식이 있는 침대에 다가왔다. 덜컹. 카트에서 무언가를 꺼낸 남자가 링거 거치대에 손을 뻗었다. 약을 갈아 줄 시간인 모양이었다.
“‘응?’”
남자가 반쯤 쓴 링거 팩을 꺼내 들다 말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링거 팩과 연결된, 침입자의 팔에 꽂혀 있어야 할 링거 바늘이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어라. 순간 상황을 파악 못 한 남자가 멍하니 김태식에게 고개를 돌렸다.
김태식과 남자의 눈이 마주쳤다.
3초간의 정적이 흐르고. 남자가 권총을 뽑아 들며 뒤로 물러났다. 서걱. 김태식이 소환한 적련이 깔끔하게 권총을 두 동강 내 버렸다.
꽥. 남자를 발로 차 눕힌 김태식은 녀석의 배를 꾹 누르며 물었다.
“소냐 어딨어.”
“‘으으으.’”
“소냐 어딨냐고!”
김태식이 윽박지르자 남자는 숨이 막히는지 캑캑대며 양손을 머리 위로 올렸다.
“‘뭐라고 하는 거야, 시발.’”
“…….”
러시아어를 듣자마자 김태식은 배를 누르고 있던 발을 슬쩍 치우고 주머니를 뒤졌다.
다행히 녀석들이 스마트폰을 가지고 가지는 않았다.
* * *
범죄 조직 라크라티아의 보스, 니콜라이 코스틴의 인생엔 굴곡이 참 많았다.
우선 그의 아버지는 범죄 조직의 보스였다. 여기서부터 니콜라이 코스틴의 인생은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어졌다.
니콜라이의 아버지는 패배자였다. 관용적이거나 비유적인 의미가 아니라, 진짜 문자 그대로 니콜라이의 아버지는 패배했다.
항쟁이 벌어졌다. 가장 뛰어난 조직이 어디인지 가리는 전쟁이 벌어졌고, 니콜라이의 아버지는 그 전쟁에서 패배했다.
패자는 말이 없다. 떠들기 전에 목이 잘려 말을 못 하게 된다.
전쟁에서 패배한 그날, 코스틴가의 저택은 적대 조직의 조직원으로 가득 찼다.
“제발, 제발 목숨만은 살려 주세요. 시키는 건 뭐든지 하겠습니다.”
니콜라이의 아버지는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이마에 피가 나도록 머리를 땅에 박았다.
적대 조직의 조직원들과 녀석들의 보스가, 가족들이 옆에 있다는 건 신경 쓰지 않고 목숨을 구걸하던 아버지를 니콜라이는 생생하게 기억했다.
그렇게 니콜라이의 아버지는 가족들의 목숨을 구걸하기 위해 구두를 핥았고, 5분 만에 머리에 바람구멍이 나 버렸다.
“애들은 살려 둬라.”
학살이 시작됐다. 10살 미만의 어린애를 제외한 모든 코스틴가의 인간이 숙청됐다.
무슨 말이냐면, 니콜라이를 제외한 모든 코스틴가의 인간이 죽었다는 뜻이다.
“복수를 하고 싶으면 찾아와라.”
그 말을 마지막으로 적대 조직의 보스는 피로 물든 저택을 나섰다.
그리고 이것이 니콜라이의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었다.
가족이 무참히 살해된 게 모든 일의 시작이었냐고 묻는다면 아니었다. 시작점은 그것보다 조금 앞에 있었다.
아버지가 무참히 살해된 걸 목격한 것도 아니었다. 사실 니콜라이는 거기에 별 느낌을 받지 않았다.
니콜라이를 충격에 빠지게 만들고 삶의 방향성을 결정하게 한 결정적인 사건은 그의 아버지가 머리에 바람구멍이 뚫리기 직전에 일어났다.
적대 조직의 보스가 손수 권총으로 아버지를 쏴 죽이기 5분 전. 가족을 살려 달라며 구두를 핥는 아버지의 모습을 본 니콜라이는 큰 충격을 받고 말았다.
높은 산 같았던 아버지가 타인에게 무릎을 꿇는 모습 때문은 아니었다.
니콜라이가 받은 감정은 그것보다 더 순수했다.
그저 아버지가 무릎을 꿇고 목숨을 구걸하는 그 모습이, 굉장히 추했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저런 꼴을 당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어린 니콜라이가 판단했을 때 아버지가 추해진 이유는 힘이 부족해서였다.
아버지에게 힘만 충분했어도 저택이 피에 잠긴 그날 바닥에 무릎을 꿇은 쪽은 반대가 됐을 것이다.
힘이 필요했다. 압도적인 힘만이 사람을 고결하게 만들 수 있었다.
그래서 니콜라이는 성인이 되는 날 아버지를 죽인 조직에 투신했다. 별 이유는 없었다. 거기가 러시아 최대의 범죄 조직이었으니 들어갔다.
개처럼 명령을 수행했다. 기라면 기고 구르라면 굴렀다.
보스의 혓바닥처럼 움직였다. 기회를 노렸다. 사람을 모으고 부하를 만들었다.
끝내는, 정점에 올랐다.
러시아를 음지에서 지배하는 왕이 됐을 때, 니콜라이는 세상을 다 가진 줄 알았다.
이걸로 더는 추하게 무릎을 꿇을 일이 사라졌다. 아버지처럼 될 일이 없어진 거다.
안정적으로 돌아가는 조직을 확인한 니콜라이는 아버지가 죽을 때까지 가지고 간다고 말하고 다녔던 와인을 개봉했다.
그렇게 승리의 단맛을 한껏 즐긴 니콜라이는 술에 취해 잠에 들었고.
다음 날 아침. 전 세계에 게이트가 열렸다는 소식을 접하게 됐다.
게이트가 열리기 전 힘의 기준은 권력이었다. 더 많은 부하를 부리는 쪽이 곧 강한 자였다.
하지만 각성자가 생긴 뒤로 힘의 정의가 바뀌었다.
좀 더 정확히는 회귀했다. 원시적으로, 근원적인 의미로 돌아간 것이다.
혼자서 도시를 박살 내는 괴물을 죽이는 개인이 등장했다.
혼자서 군대를 사냥하는 괴물을 처리하는 개인이 등장했다.
혼자서 수많은 사람을 학살하는 괴물을 쓰러트리는 개인이 등장했다.
폭력의 시대가, 초인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수많은 각성자가 생기고, 양지에서 낙오된 그들이 음지로 흘러 들어오며 니콜라이의 상황은 더욱 격변했다.
총알을 튕겨 내는 인간이, 칼 한 자루로 수십 명의 인간을 참살하는 인간이 나타났다.
니콜라이는 두려움에 빠졌다.
저들을 부하로 들여도 문제였다. 마음만 먹으면 홀로 그 자리에 있는 인간을 모조리 죽일 수 있는 놈이 누군가의 명령을 들으려고 할까? 듣는다 해도 그게 영원히 지속될까?
충성심은 허상이었다. 그런 걸로 사람이 사람을 끝까지 따를 거라 믿는 건 멍청한 짓이었다.
각성자가, 초인이 마음을 바꾸는 순간 아버지와 똑같은 꼴이 된다.
그걸 피하고 싶어서 권력을 갈구한 건데, 달라진 것이 없었다.
니콜라이는 절규했다. 수십 년의 인생이 무의미했다고 낙인찍힌 기분이었다.
힘이 필요했다. 그 누가 와도 추해지지 않을 힘이. 이 세계의 정점이 될 수 있는, 절대적인 힘이 필요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악마와 계약 해서라도.
“‘그리고 그게 내가 능력을 각성한 이유지.’”
니콜라이는 와인 잔을 닦으며 말했다.
의자에 묶인 채 옛날얘기를 듣고 있던 소냐가 입을 다물고 니콜라이를 노려봤다.
“‘입을 막아 놓은 기억은 없는데. 이야기를 들었으면 감상을 남겨 주는 게 예의라네.’”
“‘오빠는?’”
“‘오빠라. 그 녀석도 입만 열면 동생을 찾아 댔었지’”
니콜라이의 말에 소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네 오빠가 어떻게 됐는지 궁금한가 보군.’”
“‘…….’”
“‘알려 주지 못할 것도 없지만, 말로 설명해 주는 건 세련되지 못해서 말이야.’”
와인 잔을 내려놓은 니콜라이가 소냐와 눈을 마주쳤다.
소냐의 겁먹은 눈동자를 유심히 관찰하던 니콜라이는 이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화르륵.
불꽃으로 이루어진 개가 카펫 위에 나타났다.
각성 능력이었다. 소냐의 몸이 굳었다. 그가 각성자라는 건 방금 말해서 알고 있었지만, 무언가 이상했다.
니콜라이가 와인병을 들었다.
쪼르륵. 와인이 와인 잔에 떨어지는 소리를 배경으로 소냐가 작게 중얼거렸다.
“‘오빠?’”
소냐가 불꽃으로 이루어진 개를 멍하니 바라봤다.
‘진정해, 소냐야. 짠. 여기 소냐가 좋아하는 멍멍이.’
연구소에서 탈출하던 날의 기억이 소냐의 머리를 어지럽혔다.
니콜라이가 말했다.
“‘알아보나 보군.’”
설명할 일을 덜어서 다행이라는 듯 피식 웃은 니콜라이가 와인을 한 잔 들이켰다.
역시 승리한 날에 먹는 와인이 최고로 맛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