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초인의 시대 (8)
방호복을 입은 남자를 따라간 김태식은 이윽고 거대한 방에 도착할 수 있었다.
철창으로 막힌 공간이 모여 있는, 마치 감옥을 연상시키는 방 안을 본 김태식이 침을 꿀꺽 삼켰다.
삐끗했다가는 저 감옥 중 하나에 소냐와 함께 갇히는 수가 있었다.
“‘네가 1번부터 10번까지 맡아.’”
“‘알겠다.’”
“‘……?’”
미리 알아 놓은 생활 러시아어. 알겠다, 잘 모르겠다, 화장실에 가겠다. 이 셋 중 알겠다를 사용한 김태식은 남자를 따라 눈치껏 아무 감옥으로 이동했다.
‘역시 사람이 있나.’
감옥이라는 것에서 알아챘지만 이곳은 사람을 가둬 두는 시설이었다.
소냐가 들어 있는 쓰레기통을 벽에 세워 둔 김태식은 그대로 열쇠를 사용해 감옥 안으로 들어갔다.
‘어우.’
감옥 안엔 성인 남성이 얇은 옷을 입고 바닥에 누워 있었는데, 딱 봐도 상태가 좋지 않았다.
눈의 초점이 맞지 않는다고 해야 되나. 이런 곳이 아니라 길거리에서 만났다면 조심히 피해 갔을 몰골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뭘 하라는 거지. 김태식은 슬쩍 고개를 돌려 방호복을 입은 남자를 살펴봤다.
녀석은 실험체로 추정되는 사람의 몸을 이곳저곳 검사하고 있었다. 몸 상태를 확인하는 모양이다.
음. 그냥 시늉만 내면 되겠지. 어차피 여기에 취직하려는 것도 아니니 하는 척만 하고 기회를 봐서 빠져나가기나 하자.
김태식은 실험복을 입은 남자에게 마음속으로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조심히 다가갔다.
그 순간.
화륵.
실험복을 입은 남자의 몸 근처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깜짝이야.’
F급이라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약한 위력이었지만, 그건 명백히 각성 능력이었다.
그걸 보자 김태식은 이놈들이 왜 방호복을 입었는지 알 수 있었다.
제정신이 아닌 각성자를 상대하려면 최소한의 보호 장치가 필요하긴 했다.
“‘이봐.’”
이것저것 검사하는 척을 하며 시간을 보내자 방호복을 입은 남자가 다가왔다.
“‘알겠다.’”
“‘뭘 알겠다는 거야. 1번부터 10번까지 맡으라니까 왜 13번 감옥을 네가 하고 있어’.”
“‘알겠다.’”
“‘이 새끼 뭐야. 싸우자는 거냐? 똑바로 대답 안 해?’”
목소리를 높이는 남자를 보며 김태식이 입맛을 다셨다.
음. 얘는 안 되겠네.
딱 보니 가만히 놔뒀다가는 네 위로, 내 밑으로 전부 데려오라고 난리를 피울 관상인데, 그랬다가는 조용히 탈출하려는 계획이 틀어지고 만다.
조치가 필요했다.
우선 손짓을 해 녀석을 감옥 안으로 불렀다. 일은 안 하고 오라 가라 하는 게 마음에 안 든 건지 녀석이 시끄럽게 조잘댔다.
조금 거슬리긴 했지만, 어차피 곧 조용해질 테니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자.
털썩. 팔뚝에 목이 졸려 기절한 녀석을 미리 챙겨 놓은 각종 도구를 사용해 구속시킨 김태식은 쓰레기통을 열어 소냐를 확인했다.
눈이 마주치자 소냐가 말했다.
“‘나가도 돼?’”
번역기를 돌려 본 김태식은 조금만 기다리라고 대답한 후 빈 감옥을 찾아 놈을 집어넣었다.
촤악. 근처에 있는 물을 가져와 뿌리자, 놈이 화들짝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너 뭐야!’”
“지금부터는 묻는 말에만 대답해 주시기 바랍니다.”
러시아어는 몰랐지만 우리에게는 든든한 번역기가 있었다.
“첫 번째 질문. 여기는 정확히 어디에 있는 곳인가요.”
“‘여기가 어디냐고? 설마 침입자인, 읍!’”
김태식이 시끄럽게 떠드는 놈의 입을 막고 적련을 소환했다. 대화를 하기 전에 예절이 뭔지 알려 줄 필요가 있어 보였다.
“큰 소리를 내는 순간 바로 가는 거야. 이해했어?”
놈이 거칠게 고개를 끄덕였다. 얘네가 무슨 비밀결사도 아니고. 한낱 범죄자가 비밀을 절대 말하지 않을 신념과 의지 따위가 있을 리 없었다.
“다시 물을게. 여기는 정확히 어디에 있는 곳이야?”
“‘그건―.’”
녀석이 이곳이 어디인지 필사적으로 설명했다. 근처에 뭐가 있고 수도와는 얼마나 떨어져 있고 등등.
차로 몇 시간은 이동해야 민가가 나온다는 걸 보면 아예 외지에 연구소를 지은 듯했는데, 썩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다음 질문.
“여기서 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되냐?”
“‘출구라면 내가 알아. 데려다줄게.’”
“설명이나 해.”
안 그래도 녀석의 말을 그대로 믿을 수 없어 두 명 정도 더 잡아다 교차 검증을 할 예정인데, 안내를 받을 리가 있나.
“‘내부 구조가 복잡해서 신입이 오면 길을 헤매곤 해. 말로 설명해서는 못 알아들을걸.’”
“그건 내가 알아서 한다니까? 그나저나 그 정도로 복잡하면 연구소 내부 지도 같은 걸 마련해 뒀을 것 같은데. 맞아?”
“‘있긴 한데.’”
그럼 그것부터 말해야지. 왜 말을 빙빙 돌려.
“어딨어.”
“‘휴게실에 몇 개 있어.’”
“휴게실은 어디 있는데.”
“‘여기서 나가서 왼쪽으로 가면 가장 먼저 보이는 방이 휴게실이야.’”
만약 저 정보가 정확하다면 교차 검증을 안 해도 될지도 몰랐다. 지도가 가짜일 리는 없었으니까.
“정보 고맙다. 푹 쉬어라.”
“‘잠깐! 잠깐만!’”
녀석이 다급히 소리쳤다. 목숨의 위협이라도 받은 것처럼.
그냥 기절시키려고만 했는데, 녀석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안 느껴진 모양이었다. 이대로 입막음을 위해 죽이기라도 할 줄 안 건가. 아니었지만 굳이 설명해 주진 않았다. 알아서 정보를 더 토해 낸다는데 말릴 이유가 없었다.
“‘지금 내부 분위기가 살벌해서 평소보다 검문을 강하게 할 거야. 아마 너 혼자 가면 잡힐걸? 내가 괜히 안내해 주겠다고 한 게 아니야.’”
“왜 살벌한데.”
“‘탈출을 시도한 녀석이 있었어. 제대로 미친 놈이라 연구소 곳곳에 불을 질렀는데, 수습하느라 며칠 동안 개고생한 걸 생각하면. 어휴.’”
탈출? 소냐의 오빠를 말하는 건가?
김태식이 잠깐 멈칫했다. 여기서 소냐의 오빠에 대한 얘기가 나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소냐의 오빠가 어떻게 됐는지 묻자. 어떻게 할지는 그 후에 정해도 늦지 않잖아.
김태식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탈출을 시도한 사람이 어떻게 됐는지 묻기 위해서.
그리고, 그것보다 살짝 빠르게 남자가 말을 꺼냈다.
“‘덕분에 우리만 죽어 나갔다고. 보스가 데려갔으니 그 녀석도 오래 살지는 못하겠지만, 다시는 이런 일이 안 일어났으면 좋겠다니까.’”
“…….”
소냐의 오빠가 안전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직접 말로 들으니 무게감이 달랐다.
“그 탈출자는 지금 어디 있지?”
“‘그건 왜 묻지?’”
“묻는 말에나 대답해. 어디 있어.”
김태식의 말에 남자는 잠시 고민하고는 말했다.
“‘보스가 이런 일이 발생하면 주로 사용하는 방이 있어. 거기에 있을 거야.’”
“상태는?”
“‘그거야 우리도 모르지. 근데 시간상 슬슬 시체를 치울 때가 되긴 했어. 3~4일 정도 지나면 보스가 사람을 불러서 방 청소를 시키거든.’”
김태식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3~4일. 소냐가 연구소에서 탈출한 게 이틀 전이었으니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
지금도 아슬아슬한데 한 달 후에 왔으면 머리카락 하나 못 찾을 뻔했다.
‘탈출할 방법은 알았어. 이대로 휴게실로 가 지도를 찾아내기만 하면 끝이야.’
지도를 얻는다면 그다음은 쉬웠다. 입구로 간 다음 자연스럽게 이곳을 빠져나가면 됐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문제가 발생한다. 소냐의 오빠의 죽음을 모른 척해야 된다는 문제가.
안정적으로 이곳을 벗어날 것인가, 아니면 소냐의 오빠를 구할 것인가.
선택지를 고를 마지막 기회였다. 여기서 탈출을 고르면 더는 기회가 없었다.
“‘오빠가 살아 있어?’”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김태식이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소냐가 밖으로 나와 있었다.
소냐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입을 다물고 필사적으로 울음을 참고 있는 게 한눈에 보였다.
그걸 보자 망설임이 사라졌다.
그래. 구하자. 여기까지 와서 그냥 두고 가는 것도 웃기잖아.
김태식이 고개를 돌려 녀석을 바라보며 물었다
“너네 보스가 자주 이용한다는 방은 어디야.”
“‘그것도 지도에 적혀 있어, 특별 사용실이라고.’”
“그래?”
김태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그래서 날 어떻게 할 거―.’”
꽥. 시끄러운 남자를 조용히 시킨 김태식은 소냐를 다시 숨긴 후 감옥을 빠져나갔다.
지금부터는 속도가 생명이었다.
* * *
백한영은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의 전문가였다. 중원에서 제발 가르침을 달라고 찾아오는 사람이 워낙 많기도 했고, 한때 누군가를 가르치지 않으면 안 되는 위치에 있기도 했었다.
아무튼 백한영이 누군가를 열심히 가르쳐 본 결과 깨달은 게 하나 있다면, 사람의 적응력이 너무 빠르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이냐. 아무리 죽도록 굴려도 그게 반복되면 타성에 젖어 대충 하게 된다는 뜻이었다.
처음에 그 현상을 겪었을 때 백한영은 자신에게 가르침을 받는 녀석들이 죄다 미친놈들인 줄 알았다. 그렇지 않은가. 숨이 넘어가기 직전까지 굴렸음에도 나온 결과물이 거기에 적응해서 요령을 피우는 거라니. 누가 그런 걸 예상한단 말인가.
때문에 사람을 가르치기 위해선 방법을 잘 생각할 필요가 있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다양하게 괴롭힐 필요가 있었다.
지금처럼.
던전 게이트 내부. 백한영은 탄산음료를 쪽 빨며 저 멀리 모래사장에 있는 길드원들을 살펴봤다.
“파티를 벌이네, 아주. 파티를 벌여.”
말했듯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다. 처음엔 아무리 힘겨운 일이었을지라도 익숙해지면 아무렇지 않게 수행하곤 했다.
저들을 봐라. 일주일 전만 해도 알아서 생존하라고 던전에 집어넣으니 죽겠다고 난리를 쳤는데, 지금은 순식간에 베이스캠프를 만들고 아예 바비큐를 굽고 있지 않은가?
김태식이 빠져서 두 명밖에 안 됐는데도 저랬으니 세 명이었으면 아예 캠프파이어까지 했을지도 몰랐다.
저걸 바라고 훈련을 시작한 게 아니었다. 백한영의 목표는 요즘 모바일 게임의 트렌드를 반영한 자동 사냥 시스템이었다.
집에서 놀기만 해도 알아서 지구를 지켜 주는 자동 방어 길드원을 육성하는 게 목적이었는데, 저렇게 한가하게 놀도록 놔둘 수는 없었다.
탄산음료가 들어 있던 빈 캔을 바닥에 버린 백한영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목을 양옆으로 움직여 가볍게 근육을 푼 백한영은 그대로 땅을 박차고 하늘을 날았다.
콰아아앙!
길드원들이 만들어 놓은 베이스캠프를 박살 내며 등장한 백한영이 웃으며 말했다.
“적습입니다. 모두 대비해 주세요.”
“…예?”
백한영의 말에 신유나가 멍하니 대답했다. 지금 상황이 도저히 믿기지 않는 듯했다.
믿기지 않아도 어쩔 수 없었다. 타성에서 벗어나려면 충격이 필요했다.
생존 훈련 그 두 번째.
절대적인 강자의 습격.
수준은 적당히, 천진혁? 걔 정도로 하면 되겠지.
“어. 교관님?”
“넌 적이랑 얘기도 하냐?”
뻥. 최동협이 백한영의 발차기를 맞고 저 멀리 날아갔다.
풍덩. 바다에 빠진 최동협을 입을 벌리고 쳐다보던 신유나가 이내 각성 능력, 천상광휘를 발동하며 백한영에게 달려들었다.
“나를 이기라는 건 말도 안 되고. 딱 한 대만 맞혀. 그러면 훈련 종료야. 이해했어?”
“못 맞히면요!”
“30분 동안 두들겨 맞아야지. 뭘 묻고 있어.”
그렇게 최동협과 신유나를 정신없이 요리한 백한영은 개운해하는 표정을 지으며 던전 게이트에서 나갔다.
한동안 가만히 놔두면 언제 습격이 올까 전전긍긍하며 경계를 하다가 진이 빠질 것이다. 백한영이 노리는 건 진이 빠지다 못해 마음의 끈이 살짝 느슨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때 습격하는 게 진짜 효과가 좋았다.
‘이제 새벽 3시까지 밀린 소설이나 보면서 시간이나 때울…….’
우웅.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전화가 온 것이다.
스마트폰을 꺼낸 백한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현진. 예전에 명함을 받았을 때 저장해 놓았던 이름 세 글자가 스마트폰 화면에 떠올라 있었다.
이 사람은 왜 전화를 한 거지.
“여보세요?”
[백한영 씨?]
“네. 백한영입니다. 무슨 일인가요.”
그 말에 이현진이 작게 한숨을 쉬고는 피로에 찌든 목소리로 말했다.
[거두절미하고 말하겠습니다. 김태식 씨가 위험합니다.]
“네?”
상상도 못 한 대답에 백한영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무슨 애가 하루도 안 돼서 위험에 빠졌네.
대체 뭘 하고 다닌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