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초인의 시대 (7)
집에서 숙식에 필요한 물건을 챙겨 특수 대책반 본부로 돌아온 김태식은 침대에 눕기 전 소냐의 방에 방문했다.
오빠의 일로 심란해할 소냐의 상태를 확인하고 잠에 들 생각이었던 것이다.
‘어라.’
그렇게 김태식은 소냐의 방 안에 들어가자마자 일그러진 공간을 발견해 안으로 뛰어들었고, 처음 보는 장소에 도착했다.
소냐가 겁을 먹은 표정으로 김태식을 바라봤다. 잘못을 들킨 어린애 특유의 표정에 김태식은 머리를 긁적이곤 주변을 살펴봤다.
하얀색 계통의 바닥과 벽으로 이루어진 건물 내부. 예전에 한번 견학했던 첨단 기술을 연구하던 곳이 이러한 분위기였던 걸로 기억했다.
정황상 일렁이던 공간을 통해 다른 곳으로 이동한 것 같은데, 여기가 대체 어디일까.
‘소냐의 각성 능력이겠지?’
소냐가 각성자라는 건 이미 들었다. 자세한 설명을 해 주지 않아 무슨 능력을 각성했는지는 몰랐지만, 탈출에 도움이 됐을 정도로 유용한 능력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공간계 능력이라니. 범죄 조직 놈들이 기를 쓰고 납치하려고 한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소냐의 능력으로 도착한 곳이라면 놈들의 연구소일 가능성이 높나.
그렇다면 별로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혹시 능력을 또 사용할 수 있니?”
“…….”
“말이 안 통하지, 참.”
김태식은 스마트폰을 꺼내 번역기를 작동했다.
원래 있던 곳으로 지금 당장 돌아갈 수 있니?
소냐가 고개를 저었다. 안 되는 모양이었다.
그럴 것 같았다. 저 능력을 마음대로 쓸 수 있었다면 진작 말하고 도움을 구했을 것이다.
김태식은 일단 당장 알아야 될 것들을 소냐에게 물어봤다.
여기가 연구소가 맞니? 끄덕.
어디로 탈출해야 되는지 알고 있니? 절레절레
여기 구조는 알고 있니? 절레절레.
연구소가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는 아니? 절레절레.
…오빠의 위치는 아니?
마지막 질문에 소냐는 잠시 망설이고는 고개를 저었다.
결국 아무것도 아는 게 없는 건가.
안 그래도 막막했던 상황이 한층 더 답답해졌다.
사실 연구소의 정확한 위치를 모르는 건 문제가 안 됐다. 김태식은 A급 각성자. 방해만 없다면 민가를 찾아내는 건 쉬운 일이었다.
탈출 자체가 어려워 보여서 그렇지.
자력으로 탈출할 수 있다면 최고겠지만, 국제적인 공조가 필요하던 강력한 범죄 조직에서 혼자 탈출하는 게 가능할까?
불가능은 아니겠지만, 상당히 어려워 보였다. 전투에 도움이 안 되는, 냉정히 말해 방해만 되는 어린애까지 끼고 있다면 더욱 그랬다.
‘거기다.’
김태식은 소냐가 여기까지 온 이유를 되짚어 봤다.
아직 마음대로 능력을 사용하지 못하는 소냐가 연구소와 특수 대책반 본부를 왜 연결했을까.
각성 능력에 대한 조사가 아직 완벽히 이뤄진 건 아니었지만, 사용자의 의지가 가장 중요하다는 건 각종 연구를 통해 밝혀진 지 오래였다.
소냐가 이곳에 오길 바랐으니 각성 능력이 발동된 것이고, 그 이유야 뻔했다.
‘소냐의 오빠는 어떻게 하지.’
고개를 내려 밑을 내려다봤다. 입을 다물고 있는 소냐와 눈이 마주친 김태식은 결정을 내렸다.
무엇보다 탈출을 우선으로 하자. 아직 어디로 가야 탈출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소냐의 오빠를 구할지 말지 정하는 건 시기상조였다.
만약 기회가 생긴다면 소냐의 오빠를 구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 당장은 소냐를 지키는 게 먼저였다.
‘우선 연구소 내부 구조를 파악해야 될 텐데. 좋은 방법 없나.’
김태식이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그때였다.
뚜벅뚜벅.
발소리가 들렸다.
김태식이 빠르게 방 안을 훑었다. 숨을 곳을 찾아야만 했다.
‘무슨 방이 이렇게 깨끗하냐.’
각종 잡동사니만 있고 성인 남성은커녕 어린애 하나 숨을 공간조차 없는 방 안 풍경에 김태식은 속으로 한탄하고는 출입문 근처 벽에 딱 붙어 섰다.
“‘왜 나한테만 지랄이야, 짜증 나게.’”
드르륵. 문이 열리며 웬 남자 하나가 러시아어를 뱉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추가로 들어오는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한 김태식은 바로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읍읍!”
갑작스러운 기습에 남자가 발버둥을 쳤지만, A급 각성자의 완력을 이길 수는 없었다.
뇌로 가는 공기가 차단돼 기절한 남자를 바닥에 눕힌 김태식은 가볍게 숨을 고른 후 녀석을 천천히 살폈다.
방호복이라고 해야 되나. 전신이 차단되는 옷을 입고 있는 남자를 보자 무언가 방법이 떠오를 것 같았다.
김태식은 남자의 방호복을 벗긴 후 잡동사니에 있는 각종 도구를 가져왔다.
잠시 후.
굳게 닫힌 문이 열리며 방호복을 입은 누군가가 방 안에서 튀어나왔다.
방호복을 입은 김태식이 주변을 살펴봤다. 아니나 다를까 CCTV가 있었다.
CCTV를 매 순간 신경 써서 보는 사람은 없겠지만, 웬 동양인이 어린애를 데리고 돌아다니면 자연스럽게 시선이 갈 수밖에 없었다.
역시 방호복을 입은 건 좋은 선택이었다. 방호복으로 전신을 가리면 침입자인지 내부인인지 구별하기 어려웠으니까.
러시아어도 못하고 행동거지도 어딘가 이상한 놈이 돌아다니면 쉽게 걸릴 것 같겠지만, 이게 그렇지 않았다.
소냐의 능력을 통해 연구소로 이동했기에 지금 이곳에 김태식이 있는 걸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놈들의 입장에선 지금 연구소는 평소와 같은 일상이라는 거다.
그리고 사람은 원래 일상에 잠식되기 쉬웠다. 긴급사태가 발생했다고 연구소 전체에 소식이 전해졌다면 모를까. 그게 아니라면 상대가 조금 이상해도 컨디션이 별로인가? 하고 생각하며 그냥 넘길 가능성이 높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성인이 모교에 교복을 입고 돌아가 급식을 먹어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었다.
김태식은 손에 잡힌 바퀴가 달린 쓰레기통을 슬쩍 봤다. 새것이라 안이 깨끗하긴 했지만, 이런 곳에 소냐를 넣은 게 살짝 미안했다.
잠깐만 참아, 소냐야. 금방 꺼내 줄게.
쓰레기통을 밀며 김태식이 이동했다.
목표는 어떻게든 연구소 밖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 * *
“‘소냐야, 언니 왔어.’”
생활용품을 구매하기 위해 나갔던 이세영은 돌아오자마자 소냐의 방에 들렀고, 아무도 없는 방에 화들짝 놀라 이현진을 찾아갔다.
“반장님!”
“왜. 무슨 일이야.”
사무실에서 커피를 마시며 쉬고 있던 이현진에게 이세영이 팔을 휘적이며 말했다.
“그, 소냐가.”
“진정부터 해. 소냐가 왜.”
“소냐가 방에 없어요!”
이현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방에 없다니. 그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화장실 간 건 아니야?”
“거기부터 확인했어요. 갈 만한 곳은 다 뒤져 봤는데 인기척도 안 느껴져요.”
“아무 데도 없다고?”
고층에 있는 사무실이니 창문을 통해 어디로 나갔을 리는 없고.
애초에 소냐가 그 고생을 하고 이곳을 몰래 나갈 리가.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반장님, 혹시 자리 비웠어요?”
“긴급사태에 내가 그럴 리가 있나. 너 올 때까지 화장실도 안 갔어.”
“그러면 어디로 갔다는 거예요. 사무실 안 거치면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는데.”
확실히 의문이었다. 소냐가 머무르고 있던 손님용 방은 사무실을 거치지 않으면 외부로 나갈 수 없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일반인도 아니고 A급 각성자인 이현진이 떡하니 사무실을 지키고 있었음에도 사라졌다? 보통의 방법으로는 불가능했다.
“김태식 씨부터 불러 봐.”
“김태식 씨요?”
“어. 아까 수면실로 들어갔어. 짐작 가는 게 있나 물어봐야지.”
“…수면실에 아무도 없었는데요?”
“뭐라고?”
이현진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소냐에 이어 김태식까지 흔적도 없이 사라지다니. 이게 밀실 트릭도 아니고. 대체 무슨 일인지.
“…….”
김태식이 5층에서 창문을 통해 소냐와 함께 탈출할 이유는 없었으니 이건 어떤 일에 휘말렸다고 보는 게 맞았다.
이현진은 머리를 굴렸다. 갑자기 사라진 두 사람. 분명 연관성이 있었다.
카페인 덕분에 뇌가 팽팽 돌아갔다. 정답이 나왔다.
“소냐가 무슨 각성 능력을 얻었는지 못 들었지?”
“탈출할 때 각성 능력을 썼다는 것 빼고는 못 들었어요.”
“어떤 능력을 각성했길래 러시아의 연구소에서 한국까지 바로 탈출할 수 있었던 걸까. 생각해 보면 이상하지 않아?”
“…그러게요.”
공간계 능력. 그것 말고는 여태까지의 일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희귀한, 그것도 러시아와 한국 정도의 거리를 단번에 연결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위력의 공간계 각성자였을 줄이야. 특별한 능력을 갖췄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확실히 놈들이 기를 쓸 만하긴 한데.’
이현진은 품에서 연초를 꺼내 입에 물었다. 소냐 때문에 참고 있던 흡연 욕구가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칙. 담배에 불을 붙이며 이현진은 생각했다.
확실히 공간계 각성자라면 한 조직이 모든 역량을 투자해 확보할 정도의 가치가 있긴 했지만, 뭔가가 걸렸다.
놈들이 소냐를 납치하려는 이유가 그것 외에 더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지워지질 않았다.
“반장님, 어떡하죠?”
“뭘 어떻게 해. 당장 발신기 위치나 찾아봐.”
“알겠어요.”
특수 대책반에는 어떤 이유에서건 사람을 확보했다면 위치 추적기를 붙여 둔다는 원칙이 있었다.
당사자 몰래 붙였기에 당연히 불법이었지만, 특수 대책반은 특정한 부분에서 초법적인 권한이 있었기에 상관이 없었다.
그러한 권한이 주어진 이유야 지금 보여 주고 있으니 넘어가도록 하고. 이현진은 이세영에게 다가가 모니터를 바라봤다.
“어디야?”
“잠깐만요. 음. 으으으음.”
한참 장치를 조작하던 이세영은 특정 좌표를 찍은 후에 말했다.
“여기예요.”
“진짜 공간계 능력이 맞았구나. 몇 분 만에 대한민국 한복판에서 러시아 외곽으로 이동했네.”
“어쩔까요.”
“어쩌긴 뭘 어째. 우리가 뭘 할 수 있다고.”
소냐와 김태식이 적진에 떨어졌다고 해서 무작정 구출하러 움직일 수는 없었다.
그런 게 가능했다면 애초에 오빠를 구하고 싶다는 소냐의 부탁을 거절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렇겠죠…….”
이세영이 살짝 우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직업상 누군가를 잃거나 구하지 못하는 경험을 자주 하는 편이었지만, 아무리 경험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아.”
이현진이 작게 한탄을 내뱉었다. 아홉수라 그런가. 올해 유독 사건이 많은 느낌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올해는 쉬라는 점쟁이 말을 들을 걸 그랬나.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한 이현진이 이내 입을 열었다..
“저기가 확실한 거야?”
“네.”
“당장 소집 가능한 사람들에게 전부 연락 돌려. 위치가 특정됐으니 가기만 하면 되겠네.”
구출 작전 실행까지 한 달이나 걸렸던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놈들의 본거지를 찾는 데 시간이 필요했던 게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때문에 놈들의 본거지를 알아낸 순간 한 달이라는 시간을 대폭 단축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돼요?”
그거랑 별개로 아직도 부족했다. 시간이 단축됐다고 해도 충분한 인원을 모집하고 제대로 된 작전을 수립하기 위해선 적어도 일주일 이상은 필요했다.
하지만.
“언제 우리가 최고의 환경에서만 싸웠냐. 지원도 월급도 별로 없는 쓰레기 같은 직장인데.”
이현진은 그 모든 걸 고려하고 최고의 선택을 고르는 분류의 인간은 아니었다. 애초에 그런 인간은 이런 직장에서 일하지 못했다.
“알겠습니다!”
이세영이 밝은 목소리로 말한 후 이곳저곳에 연락을 돌렸다. 이세영도 쓰레기 같은 직장에 붙들려 있는 건 똑같았다. 이현진과 인간의 결이 비슷하다는 소리다.
후우. 담배 연기를 내뱉은 후 이현진은 스마트폰을 꺼냈다.
알고 지내는 고등급 각성자들에게 전부 연락을 돌려 볼 시간이었다.
* * *
“‘일할 시간인데 농땡이를 피우고 있네? 쓰레기통은 왜 들고 다니는 거고. 뭐 하는 놈이야, 이거. 아무튼 따라와, 바빠 죽겠으니까.’”
모퉁이를 돌자마자 방호복을 입은 남자를 만난 김태식은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뭐라고 하는 건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따라오라는 건 제스처와 말투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여기서는 일단 말을 따르고 기회를 봐서 기절시키든, 탈출을 하든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