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초인의 시대 (4)
“여기가 백한영 씨 길드 사무실이에요?”
“임시로 쓰고 있습니다. 곧 옮길 거예요.”
사무실을 둘러보는 이초아에게 백한영은 새로 짓고 있는 빌딩을 떠올리며 말했다.
앞으로 외부 촬영을 또 할 거면 리모델링이라도 하자는 김태식의 부탁에 아예 건물을 새로 지어 버린 게 몇 달 전이었으니, 슬슬 완공될 타이밍이었다.
“이초아 씨는 어디 길드 소속이세요?”
“저는 프리랜서예요. 좋은 길드를 만나기 전까진 혼자서 활동하려고요.”
“프리랜서 좋죠.”
“좋은 길드를 만나기 전까지만이에요. 저 길드 들어갈 생각 있어요.”
자꾸만 길드에 들어갈 의향이 있다고 어필하는 이초아와 함께 백한영은 건물 지하의 훈련실로 향했다.
훈련실에 들어가자마자 이초아가 손가락을 들며 말했다.
“백한영 씨?”
“네. 말씀하세요.”
“저 사람들은 뭘 하고 있나요.”
이초아가 가리킨 곳에는 신유나와 최동협이 있었다.
신유나와 최동협은 가만히 제자리에 서서 이상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는데, 보기만 해선 뭘 하고 있는 건지 감이 잘 안 잡혔다.
“신경 쓰지 마세요. 훈련 중입니다.”
훈련? 저게?
백한영의 말에 의아하다는 듯 신유나와 최동협을 지켜보던 이초아는 문득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가만히 서 있는 줄 알았던 신유나와 최동협이 아주 조금씩이지만 움직이고 있던 것이다.
이초아가 속으로 신기해하고 있을 때 백한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길드원들의 훈련이 아주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백한영의 지도하에 급격하게 성장한 신유나와 최동협은 강기(罡氣)의 경지를 코앞에 뒀음에도 불균형한 부분이 있었다. 주로 초식의 이해 부분이 그랬다.
초식을 완벽히 익히는 건 굉장히 중요했다.
초식은 무공의 기본이자 뼈대였다. 무공이 만들어진 이유. 추구하는 목표. 의와 념. 그리고 심상까지. 전부 초식에서 시작됐고, 초식에서 끝이 났다.
때문에 높은 경지에 올라가기 위해선 일단 익히고 있는 무공의 초식을 완벽히 체득할 필요가 있었다. 기반이 단단해야 건물이 무너지지 않는 것처럼, 기본을 쌓아 놔야 나중에 탈이 나지 않았다.
초식을 완벽히 체득하는 방법은 여럿 있었지만, 역시 가장 좋은 건 만(灣)의 수련법이었다.
초식을 느리게 펼친다. 한 초식을 펼치는 데 걸리는 시간을 극한으로 늘린다. 근육의 움직임을 하나하나 느끼고, 검과 주먹의 궤도가 얼마나 제멋대로였는지 체감한다.
인지를 할 수 있다면 그다음은 간단했다. 올바르게 고치면 끝이었다.
요컨대 만의 수련법은, 초식의 군더더기를 없애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대로만 해. 아까보다 훨씬 보기 좋다.”
“네…….”
종일 느리게 초식을 펼치느라 기운이 빠진 최동협이 작게 대답했다. 각성자의 체력으로도 만의 수련법은 벅찼다.
초식을 빠르게 펼치는 것보다 느리게 펼치는 게 체력 소모가 훨씬 컸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
재차 주먹을 거북이처럼 휘두르는 최동협을 뒤로한 채 백한영이 이초아에게 말했다.
“이초아 씨는 마법사셨죠.”
“네.”
“마법사라……. 흠.”
백한영은 마법사에 대해 잘 몰랐다. 마법사는 중원으로 치면 술법사 같은 거였지만, 애초에 백한영은 술법사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세계의 법칙을 파헤치는 놈들이라는 것만 알았지, 그들이 어떤 원리로 능력을 발휘하는지, 추구하는 게 무엇인지 정확히는 몰랐다.
어떻게 해야 술법사를 잘 죽일 수 있는지는 알았지만, 이걸 이초아가 알고 싶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초아를 가르치기 전 백한영은 많은 고민을 했다. 마법사에게 유의미한 조언을 해 주기 위해선 뭘 해야 될까.
경지에 대한 조언? 술법사, 마법사가 가져야 되는 마음가짐? 전부 의미 없었다. 아무리 만류귀종이라지만 검사인 백한영이 마법사인 이초아에게 해 줄 수 있는 조언엔 한계가 있었다.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되고. 이럴 거면 그냥 교습을 해 주지 말 걸 그랬나, 라는 생각을 했을 때쯤. 백한영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간 것이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이것 하나는 제대로 가르쳐 줄 자신이 있었다.
“대련을 하죠.”
“대련이요?”
“제가 마법은 잘 몰라도 싸우는 법은 세상에서 제일 잘 알거든요.”
백한영보다 집요하게 마법사를 괴롭힐 수 있는 인간은 이 세상에 없었다.
백한영만 상대할 수 있어도 마법사와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발악하는 모든 칼잡이에게 대처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물론 전장에서 마법사를 잡아 죽이려 드는 게 칼잡이뿐만 있는 건 아니긴 했다. 인간형만 따져도 권사네 창술사네 각양각색이었으니까.
그런 놈들은 어쩌면 좋냐고?
자고로 검이야말로 만병지왕이라는 게 백한영의 지론이었다. 즉 칼잡이만 상대할 수 있다면 모든 무인을 상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병장기를 다루는 무인들이 듣는다면 발작할, 그리고 실제로도 발작하던 지론이었지만, 뭐 어쩌겠는가.
꼬우면 나보다 강하든가.
짖는 개는 약한 법이었다.
백한영과 이초아가 거리를 벌리고 마주 봤다.
이초아가 살짝 망설이며 마나를 끌어 올렸다.
허수아비를 상대로 마법을 연습해 본 적은 많았지만, 사람을 상대로 연습을 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어느 수준까지 마법을 써도 되는 거지. 3위계? 이 정도는 괜찮나?
화륵. 불꽃의 화살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갔다. 서걱. 연습용 철검으로 불꽃의 화살을 베어 버린 후 백한영이 말했다.
“이게 전력은 아니잖아요. 제대로 해보세요.”
“사람을 상대로 전력으로 마법을 쓰는 건 조금…….”
“음. 이거 방식을 바꿔야겠네요. 자. 갑니다. 집중하세요.”
“네?”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에 이초아가 고개를 갸웃거린 순간, 백한영의 몸이 앞으로 쏘아졌다.
당황한 이초아가 다급히 마법을 발동했다. 주변에 불꽃이 깔렸다. 마치 성벽처럼. 적과 일대일로 싸울 때 마법사가 지켜야 되는 제1 원칙. 진지 구축이었다.
“견제보다 방어를 먼저 한 건 괜찮은 선택이었지만, 그렇다고 아예 방어만 하면 검사가 거리를 좁히기 너무 쉬워져요.”
어느새 지근거리에 도착한 백한영이 검을 적당히 휘둘렀다.
기기긱! 불의 성벽에 철검이 닿으며 격한 마찰음이 일어났다. 동시에. 우웅―! 불의 성벽에 기하학적인 문양이 떠올랐다. 이초아가 미리 심어 놓은 마법진이 발동된 것이다.
‘아하. 이런 식으로.’
방어 체계를 갖춘 후 그곳에 요격 시스템을 깔아 놓는 카운터 스타일. 중원에서도 꽤 많이 본 방식이었다.
장점은 술사가 굉장히 안전하다는 것. 단점은 기동성과 응용력이 떨어진다는 것.
단점이 명확함에도 사용하는 술사가 많았던 만큼 생각보다 공략하기 까다로웠다. 방어 체계 통째로 카운터 시스템을 베어 버리는 게 가장 깔끔했지만, 그러면 연습이 안 됐다. 다른 방식으로 공략해야 됐다.
백한영은 추억에 잠기며 보법을 밟았다. 모든 걸 베어 버릴 수 있게 된 후로는 사용하지 않았던 공략법을 오랜만에 꺼낼 시간이었다.
불의 성벽 주위를 뱅뱅 돌며 백한영이 검을 휘둘렀다. 화르륵! 그때마다 성벽에 깔아 놓은 마법진이 발동됐지만, 카운터가 목적인 이상 결국 백한영을 따라잡는 건 불가능했다.
구름을 타고 다니는 바람을, 제운종(梯雲縱)을 족쇄를 달고 붙잡으려는 것처럼 오만한 짓도 없었다.
불의 성벽에 금이 생겼다. 쉬지 않고 두들겨 맞았으니 당연했다.
쩌저적. 불의 성벽에 생긴 균열이 임계점을 넘는 소리가 들렸다. 백한영이 강기(罡氣)를 씌운 검을 들고, 가볍게 일점으로 찔렀다.
“…….”
“괜찮네요. 일단 짜임새가 튼튼한 게 마음에 들어요.”
“다시 해요.”
승부욕에 불이 붙은 이초아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실력 차이가 나서 졌다기보다는 대처법을 몰라서 졌다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백한영이 의도한 바기도 했다. 실력 차이가 나서 졌다고 느끼면 대처법을 알려 주겠다는 의도가 틀어지니까.
그렇게 백한영이 이초아에게 칼잡이 상대법을 다양하게 알려 주고, 더는 못 하겠다고 드러누운 신유나와 최동협을 강제로 일으켜 세웠을 때.
“형, 저 왔어요!”
김태식이 훈련실에 들이닥쳤다.
부모님의 기일이라 쉰다던 김태식이 왜 왔지? 하는 의문을 백한영이 드러내기도 전에, 무언가가 그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시선을 내려 김태식의 옷을 꼭 잡고 있는 금발의 소녀를 확인한 백한영은 속으로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아. 그래. 언젠가 한번 이럴 것 같았어.
* * *
사무실로 올라온 백한영은 김태식, 소냐 페도로프, 이현진, 이세영과 마주 앉았다.
“용건이 뭡니까.”
“여기 오자고 한 건 저예요, 형.”
“그러면 말을 바꿀게. 용건이 뭐니, 태식아.”
어딘가 차갑게 느껴지는 백한영의 말투에 김태식은 살짝 움찔했다가, 기분 탓이라 여기고 넘겼다.
김태식이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형, 도움이 필요해요.”
“무슨 도움.”
“그러니까―.”
김태식이 말끝을 흐렸다. 곁눈질을 하는 게 소냐의 눈치를 보는 듯했다.
“‘소냐야, 우리 잠깐 다른 곳에 가 있을까?’”
“‘…응.’”
눈치 빠른 이세영이 재빨리 소냐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떠나기 싫은지 소냐가 김태식의 옷소매를 끝까지 붙들고 늘어졌지만, 결국 놓아주고 이세영과 같이 자리를 벗어났다.
소냐가 멀리 떨어진 걸 확인한 김태식이 조심히 입을 열었다.
“이유는 모르지만 저 아이를 납치하려는 조직이 있어요. 그런데 이놈들이 인체 실험도 하고, 아무튼 보통이 아니에요.”
“그래?”
“소냐를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서도, 또 다른 피해자를 막기 위해서도 박멸할 필요가 있는데, 듣기로는 놈들이 보통 위험한 게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그렇겠지. 다른 건 몰라도 인체 실험까지 가 버린 놈들은 대부분 어마어마한 힘을 숨기고 있거든.”
“그래서 형을 찾아왔어요. 도와주세요, 형.”
그 말에 백한영은 고개를 살짝 틀어 대화 상대를 바꿨다.
“이현진 씨?”
“오랜만이네요.”
“저번에 테러범 잡았을 때 봤었나요. 오랜만이긴 하네요. 아무튼 태식이가 말한 범죄 조직을 여러분끼리 박멸할 건가요?”
“전 세계에 공조를 부탁할 예정입니다.”
“그래요? 그러면 사람도 많을 테고, 반드시 제가 도와드릴 필요는 없겠네요?”
“솔직히 그렇습니다.”
이현진이 백한영의 정보를 떠올리며 빠르게 대답했다.
A급에서 S급 사이로 추정되는 실력자. 있으면 든든하긴 하겠지만, 반드시 도와줘야 되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었다.
냉정하게 말해서 백한영 정도의 실력자는 전 세계 단위로 가면 꽤 많이 볼 수 있었다.
“잠깐만요!”
김태식이 다급히 두 명의 사이에 끼어들며 대화를 중단시켰다.
이현진의 어깨에 손을 올린 김태식이 눈짓을 하며 말했다.
“잠깐 형이랑 둘이서 얘기할게요. 자리 좀 비켜 주세요.”
“알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이현진이 저 멀리 사라지자, 김태식이 재빠르게 용건을 꺼냈다.
“형, 왜 그래요.”
“뭐가.”
“그, 마치 안 도와줄 것처럼 말해서요.”
김태식이 아는 백한영은 기본적으로 선했다.
남의 위험을 나 몰라라 하지 않았다. 그건 김태식과 백한영이 처음 만난 그날, 다중 게이트를 해결한 것으로 증명이 됐다.
공익을 위해서 일하기도 했다. SS급 던전 게이트를 공략한 것도 그렇고, 서울 브레이크도 그랬다. 당일 상공에서 거대한 폭음이 들린 이유가 백한영이 남몰래 사건을 해결했기 때문이라는 걸 김태식은 알았다.
그런 백한영이었기에 소냐의 사정을 알면 흔쾌히 도와줄 거라 생각했것만, 예상과는 반응이 달랐다.
김태식이 백한영과 눈을 마주쳤다.
백한영이 이마를 긁적이며 말했다.
“태식아, 확실히 내가 지금 마음먹으면 범죄 조직? 그런 건 당장에 괴멸할 수 있어.”
“그렇다면!”
“그런데.”
백한영이 타이르는 말투로 말했다.
“내가 왜 그래야 되는데, 태식아.”
“그건.”
“소냐가 불쌍해서? 그게 옳아서? 더 많은 피해자를 발생시키지 않기 위해서?”
김태식이 입을 다물었다. 설마 저 세 개의 이유만으로 충분하지 않을 줄은 몰랐다.
아니, 조금 더 정확히는.
백한영이 저 셋의 이유를 알았음에도, 소냐를 구해 주지 않을 줄은 몰랐다.
“태식아.”
김태식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밑으로 숙이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난 도와줄 생각이 없어.”
김태식이 입술을 강하게 깨물었다.
숨이 막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