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초인의 시대 (3)
“잠깐 탈진한 거라고요?”
“몸에 큰 이상은 없다고 하네요.”
특수 대책반 요원, 이세영의 말에 김태식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큰 이상은 없다고 하니 다행이었다.
김태식은 의자를 끌고 와 병원 침대 옆에 앉았다. 침대 위에선 이름 모를 금발의 소녀가 곤히 자고 있었다.
천사 같은 외모의 금발의 소녀를 빤히 쳐다보던 김태식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소녀의 환자복 밑에 자리 잡은 멍과 상처가 심히 거슬렸다.
‘대체 누가 이런 짓을.’
김태식이 심호흡을 해 감정을 가라앉혔다. 지금 분노를 터트려 봤자 의미가 없었다.
‘러시아인, 이겠지?’
슬라브계 백인이 주로 사는 대표적인 국가가 러시아였다.
러시아. 게이트가 열린 후로 급속도로 망해 버린 나라였다.
전쟁을 일으켜 피폐해진 나라에 게이트를 끼얹으니 버틸 수가 없던 것이다.
국가의 형태가 유지되고 있긴 하지만, 내부는 곪다 못해 썩은 곳. 러시아를 보는 외부의 시선을 한 줄로 요약하면 그랬다.
그런 나라였기에 이런 꼴을 당한 걸까. 아니면 이 아이가 특별히 불행했던 걸까. 김태식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다가, 피가 나기 직전에 멈췄다. 이 애가 정신을 차렸을 때 입에서 피가 줄줄 흐르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게 정서적으로 좋아 보이진 않았다.
아까 한국어로 말을 걸었을 때 대화가 안 됐었지. 김태식이 스마트폰을 조작해 러시아어 회화를 검색했다. 소녀가 일어나기 전까지 간단한 인사말이라도 알아 둘 생각이었다.
짧은 시간 동안 많은 걸 외울 순 없었으니 김태식은 간단한 말 세 가지를 중점으로 공부했다.
괜찮니? 이름이 뭐니? 여긴 안전해.
위의 세 단어를 김태식이 입안에서 30번쯤 굴렸을 때, 옆에서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하아. 하아. 하아.”
소녀가 눈을 뜬 것이다.
“뭐 해, 이 녀석아. 너 환자야. 누워 있어.”
힘겹게 몸을 일으키려는 소녀를 진정시키며 김태식이 머리를 굴렸다.
“그러니까, 어. ‘괜찮아……?’ 이게 맞나.”
소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발음한 게 맞았나 보다.
“‘이름이 뭐니?’”
“……?”
“나는, 김태식. 김태식이야.”
김태식이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이름을 반복하자, 소녀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소냐 페도로프.”
“소냐구나. 예쁜 이름이네.”
습관적으로 칭찬을 했지만, 소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 말을 못 알아듣지, 참. 금붕어도 아니고 그걸 까먹고 있냐.
김태식이 이마에 주먹을 가져다 댔다. 과열된 뇌를 식힐 필요성이 느껴졌다.
그때. 드르륵. 문이 열리며 누군가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일어났네?”
특수 대책반 반장, 이현진은 안심한 표정을 지으며 소냐에게 다가갔다.
“꼬마야, 이름이 뭐니?”
“…….”
“소냐 페도로프래요. 우리나라 말 못 해요.”
“그래요? 하긴, 딱 봐도 외국인같이 생기긴 했네요.”
이현진이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대화가 통하지 않는 이상 접근 방법을 바꿔야 됐다.
“나는 이현진이라고 해. 이―현―진.”
“…….”
이현진의 말에 소냐가 몸을 움츠렸다. 여태까진 없던 반응이었다.
김태식은 소냐를 유심히 관찰했다. 아까보다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는 정도가 느려졌다. 최대한 조심히 숨을 쉬는 중인 것이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소냐가 이현진을 불편해하는 건 확실했다. 김태식은 일단 이현진을 소냐에게서 멀찍이 떼어 놨다.
“왜 그러시나요?”
“애가 겁을 먹어서요.”
“겁?”
“반장님이 흉악한 얼굴을 들이대니까 애가 겁을 먹었잖아요. 자. ‘안녕, 소냐야. 나는 대한민국 특수 대책반 요원 이세영이라고 해. 여기는 안전하니까 안심하렴.’”
매끄러운 러시아어가 이세영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김태식이 살짝 놀라자, 이세영이 웃으며 말했다.
“러시아어 전공이라서요. 각성하면서 전공이고 뭐고 다 의미 없어졌지만요.”
“다행이네요, 그래도. 한 명쯤은 대화가 통하는 사람이 있어서.”
안심한 김태식이 소냐를 바라봤다. 그리고 살짝 미간을 좁혔다.
아까보다는 나아졌지만, 소냐는 아직도 긴장 중이었다.
이유가 뭐지. 그냥 지금 환경이 불안해서? 그렇다면 해결해 줄 방법이 없었다. 안심하라는 말을 반복하는 것 말고는.
‘…근데 이게 무슨 냄새지.’
김태식이 고개를 돌렸다. 매캐한 냄새가 코끝을 스쳐 지나갔다.
담배 냄새. 어디에서 난다고 말할 것 없이 이현진과 이세영 양쪽 다 나는 중이었다.
이세영은 흡연자는 아니고 단순히 옷에 냄새가 밴 것 같았지만, 그래도 매캐한 냄새가 맴도는 건 똑같았다.
소냐가 조심히 숨을 쉬었던 게 냄새를 맡기 싫어서였나. 뒤늦은 깨달음에 김태식은 이세영에게 다가가 조심히 소냐에게서 떨어트렸다.
영문을 알 수 없어 이세영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김태식은 손가락으로 코를 가리켰다. 담배 냄새가 난다는 뜻이었다.
눈치가 빠른 이세영은 셔츠에 묻은 냄새를 확인하곤 이현진에게 달려들었다.
“반장님이 시도 때도 없이 담배를 피우니까 옷에 냄새가 뱄잖아요!”
“그러니까 왜 따라와, 혼자 피운다니까.”
둘의 대화를 들으며 김태식이 고개를 뒤로 젖혔다. 몸은 멀쩡했지만, 이상하게 정신이 피곤했다.
‘오늘은 훈련 못 가겠다.’
한영이 형한테 오늘은 쉰다고 메시지를 보내자. 부모님 기일이라고 말한 터라 형도 오늘 훈련을 시킬 생각은 없었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꾸욱. 상념을 이어 가던 김태식을 누군가 잡아당겼다. 고개를 뒤로 젖힌 채로 밑을 바라보자, 상처 입은 천사가 옷소매를 붙잡고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힘없이, 가볍게 자신의 옷소매를 붙잡은 소냐의 마음을 헤아려 보던 김태식은 속으로 작게 한숨을 쉬고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후우. 잠깐만요.”
이세영이 병실을 박차고 나갔다. 잠시 후. 새 옷으로 갈아입은 이세영이 병실로 돌아왔다.
확실히 담배 냄새가 문제였는지 새 옷으로 갈아입은 이세영을 소냐가 무서워하진 않았다.
“저는 해결됐으니 이제 다른 문제만 해결하면 되겠네요.”
이세영이 이현진을 빤히 쳐다봤다. 담배 냄새 풍기지 말고 병실에서 나가라는 의미였다.
이현진이 김태식을 바라봤다.
저도요? 저는 담배 안 피우는데요?
혼자는 쓸쓸해.
눈빛으로 대화를 마친 이현진과 김태식은 병실을 나가 병원에 있는 실내 공원으로 이동했다.
이현진이 벤치에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네요.”
“그러게요. 아. 말씀 편하게 하세요, 저보다 한참 형인데.”
“민간인한테 반말했다가 민원 폭탄을 하도 맞아서, 최근 자중 중이에요.”
“그래요?”
본인이 싫다면 어쩔 수 없지. 김태식도 더는 강요하지 않았다.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이현진은 담배를 꺼내 습관적으로 입에 물었다가, 다시 집어넣었다.
본인이 알아서 멈췄지만 일단 말해 주는 게 맞는 것 같아 김태식이 입을 열었다.
“병원은 금연이에요.”
“그것도 그렇지, 참. 깜빡했네요.”
이현진은 담배 대신 니코틴 껌을 꺼내 질겅질겅 씹으며 피로에 전 목소리를 뱉었다.
“소냐를 납치하려고 한 놈들, 저희가 쫓던 범죄 조직입니다.”
“…갑자기 그건 왜 말해 주세요?”
“궁금해하실 것 같아서요. 도움을 요청하고 싶기도 하고요.”
“절 아세요?”
김태식은 아직 상대에게 정체를 밝히지 않았다. 이름 정도야 급한 와중에 말했지만, 그 이상은 하나도 말하지 않았음에도 상대는 무언가 아는 눈치였다.
“김태식 씨라면 최근 유망한 각성자라서요. 저희 쪽에서도 주목 중입니다.”
“정말요?”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를 도와주세요.”
이현진은 소냐와 얽힌 범죄 조직에 대한 세부 사항을 김태식에게 설명했다.
“국제적으로 노는 놈들입니다. 놈들의 주력 상품은…….”
“각성 강화제죠?”
“어떻게 아셨죠?”
“아까 놈들이 쓰는 걸 봤습니다.”
김태식은 납치범의 대장이 망설임 없이 각성 강화제를 쓰던 장면을 떠올렸다. 그 비싼 각성 강화제를 전투 한 번에 막 써 버리는 놈들이면 아예 판매책일 수도 있겠다고 짐작한 것이다.
납치. 아까의 일들을 상기하자 궁금한 게 생겼다. 김태식이 먼 곳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놈들이 소냐는 왜 납치하려고 한 걸까요.”
“그것까지는 저희도 아직 잘……. 아마 이세영 요원이 소냐에게 조심히 알아낼 겁니다.”
“…괜찮을까요.”
김태식은 소냐가 걱정됐다. 담배 냄새만 맡아도 몸을 움츠리는 어린애에게 자세한 사정을 캐물어도 될까.
아니. 이게 맞았다. 뭐든지 알아야 지켜 주는 것도 가능했다.
힘들겠지만, 지금은 소냐가 힘내서 사정을 알려 주는 게 우선이었다.
“괜찮을 겁니다. 이세영 요원이 그 분야에선 프로라. 음.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올라오라네요. 얘기가 끝났나 봅니다.”
그 말에 김태식은 이현진을 따라 병실로 올라갔다. 병실에 들어가자 이세영이 소냐의 손을 꼭 잡고 있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잠깐만 기다려. 저 사람들이랑 짧게 얘기하고 돌아올게.’”
“‘응.’”
이세영은 소냐를 안심시킨 후 김태식과 이현진에게 다가갔다.
둘을 밖으로 끌고 나간 이세영은 인적이 드문 병원 구석 벤치에 앉아 멍하니 땅을 바라봤다.
한참을 그러고 있던 이세영이 짧게 심호흡을 했다. 마음이 정리된 듯했다.
고개를 든 이세영이 입을 열려다, 김태식을 발견하고 멈칫했다.
“반장님? 김태식 씨는 외부인인데요.”
“도와주기로 했어.”
“정말요?”
그런 말을 한 적은 없었지만, 김태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도와주고 싶다고 생각한 건 맞았으니까.
“그러면 오픈할게요. 각성 실험이에요, 반장님.”
“각성 실험?”
“네. 규모도 상당해 보였어요. 저희만으로 해결할 사이즈가 아닌 것 같은데, 어쩌죠?”
각성 실험?
그게 뭔지 김태식을 알지 못했다. 그는 양지의 사람이었으며, 정부 기관에 몸을 담지도 않았으니까.
다만, 소냐가 어떤 상태인지는 굉장히 잘 알았다.
각성 실험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굉장히 불온한 무언가라는 건 눈치챌 수 있었다.
“하필.”
이현진은 눈을 감고 싶은 기분이었다. 각성 실험이라니. 저게 왜 여기서 튀어나오는가.
국가 기밀을 쉽게 접할 수 있는 위치인 이현진은 각성 실험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며 얼마만큼의 성과가 있었는지까지 전부 알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김태식은 범죄 조직이 각성 실험을 하고 있다는 예상을 조금도 하지 못했다.
당연했다. 한낱 범죄 조직이 각성 실험을 했을 것이라고 예상하는 건 그들이 핵미사일을 제조 중이라고 예상하는 것과 똑같았다. 그만큼 각성 실험은 현재 모든 나라가 은밀히 달려들고 있는 가장 뜨거운 감자였다.
“각성 실험이 뭐죠?”
“…인위적인 환경을 조성해서 각성을 유도하는 실험입니다.”
“구체적으로는요?”
“어차피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정보긴 하지만, 기밀이니 어디 가서 말하면 안 됩니다. 스트레스와 위기 상황에서 눈에 띄게 각성 확률이 올라간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거기까지만 듣고도 김태식은 심장을 토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소냐가 무슨 짓을 당했는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이 났다.
이현진이 니코틴 껌을 하나 더 꺼내 씹으며 말했다.
“말만 들어선 쉬워 보이지만 인위적인 환경을 조성하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아마 실험을 하긴 했어도 성공하진 못했을 겁―.”
“성공했어요.”
이세영이 이현진의 말을 단호히 끊었다. 설마 싶어 이현진이 표정을 굳혔다.
“혹시 소냐가…….”
“도망칠 수 있었던 이유가 각성을 해서라고 해요. 본인이 직접 말했어요.”
“미치겠군.”
놈들의 위험 수치가 단번에 몇 단계는 치솟았다. 그만큼 각성 실험에 성공했다는 건 의미하는 바가 컸다.
“진짜 우리끼리 처리할 사이즈가 아닌데?”
“어쩔까요. 사실 저희는 국내에 있는 지부만 쓸어버리고 쫑 내려고 했었잖아요.”
“국제적으로 노는 놈들이라는 걸 안 다음부터 그랬지.”
“그런데 지금 알아낸 것만 봐서는… 이건 가만히 놔두면 안 될 것 같은데요?”
팔짱을 끼고 한숨을 푹푹 쉬는 두 사람에게 김태식이 조심히 물었다.
“제가 도와주는 것만으론 부족한가요?”
“김태식 씨를 무시하는 건 절대 아니지만, 많이 부족합니다. 경우에 따라선 S급이 지원을 와도 부족할 수도 있어요.”
“S급이 와도요.”
결국 핵심은 하나였다. 적의 강력함에 비해 아군의 힘이 너무 약하다는 것.
S급이 와도 무리라.
그럼 SS급이, SSS급이 온다면 어떨까.
단순히 힘이 부족한 거라면 해결책은 의외로 간단했다.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을 느끼며 김태식이 힘차게 말했다.
“제가 방법을 알 것 같아요. 안전상 여기에 소냐를 계속 놔두는 것도 좀 그러니, 서울로 이동하죠. 자세한 건 그 뒤에 말씀드릴게요.
* * *
그렇게 김태식은 이현진과 이세영과 함께 서울로 올라가자마자 무신련 사무실로 향했고.
“내가 왜 그래야 되는데, 태식아.”
예상과는 다른 백한영의 반응에,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