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초인의 시대 (2)
김태식은 양복남들을 훑어봤다.
건장한 체격, 피부에 도배된 문신, 거기에 눈에 담겨 있는 살기까지.
평범한 사람들은 아니었다. 양지에서 햇볕을 쬐며 살아가는 인간은 저런 눈빛을 가질 수 없었다.
“넌 뭐지?”
대장으로 보이는 남자의 말에 김태식이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인데. 살다 살다 대낮에 사람을 납치하는 꼴을 보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네.”
“부외자는 빠져라.”
“납치 사건에 부외자가 어딨어. 범죄 현장을 들켰으면 도망가기라도 해라. 이게 범죄자의 사고방식인가? 하도 뻔뻔하니까 내가 잘못한 것 같은 착각마저 드네.”
김태식은 한 발 뒤로 물러나며 소녀의 시선을 가려 주었다. 비명이 잦아들었다. 소녀를 안심시킨 김태식은 납치범들을 똑바로 보며 스마트폰을 조작했다.
미아가 발생했을 때도 그랬지만, 납치범은 명백히 경찰의 영역이었다.
범죄 현장을 목격했으면 신고가 우선이었다.
“저놈 어떻게 할까요.”
“처리해.”
“알겠습니다.”
처리한다. 그 말을 듣고도 김태식은 살짝 느슨한 생각을 했다.
한낮의 도로에서 처리한다고 해 봤자 주먹다짐 정도가 끝일 거라고 지레짐작 한 것이다.
하지만 김태식의 예상과는 다르게 놈들의 손에 아지랑이가 맺혔다.
능력 발현의 전조. 각성자의 증거였다.
콰아앙!
김태식이 소녀를 품에 앉고 뒤로 크게 뛰었다.
버스 정류장이 박살이 나며 파편이 튀었다. 모래사장에 착지한 김태식이 당황하고 있을 때, 납치범들이 하나둘씩 모래사장으로 내려왔다.
놈들의 대장이 사납게 지껄였다.
“각성자였나.”
“각성자인 줄도 모르고 그런 짓을 한 거야?”
김태식이 일반인이었다면 방금의 공격으로 크게 다쳤을 것이다. 어쩌면 죽었을지도 몰랐다.
민간인을 아무렇지 않게 습격하는 놈들이라니. 녀석들의 위험 수치가 한 단계 높아졌다.
녀석들은 강하지 않았다. 잘 쳐 봐야 E급. 심지어 강화계 각성자라 대처하기 까다롭지도 않았다.
다만 전원이 각성자였다. 이건 예상 밖인데. 김태식은 낭패감에 혀를 찼다.
‘요새 각성자 범죄로 얘기가 많더니.’
각성자를 행운아로 부르는 세상이 열렸지만, 모든 각성자가 로또에 당첨되진 않았다.
각성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F급, E급은 사실 큰돈을 벌지 못했다. 목숨이 위험하다는 것까지 따지면 직장인보다 적게 벌지도 몰랐다.
각성자는 따지고 보면 힘이 조금 센 인간일 뿐이었다. 생산계, 마법계 같은 특수한 각성자면 사정이 다르지만, 평범한 각성자의 입장은 그렇지 않았다.
무슨 말이냐면, 몬스터를 잡지 않는다면 대부분의 각성자는 각성 능력으로 돈을 벌 방법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때문에 몬스터를 잡지 않고 일반적인 직장을 다니는 각성자를 의외로 많이 볼 수 있었다. E, F급은 목숨을 걸고 몬스터를 잡아 봤자 크게 돈이 안 되니 회사에 다니는 걸 택할 수밖에.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양지의 얘기고, 음지에선 사정이 달라졌다.
사람을 위협하는 데에는 폭력보다 확실한 게 없었다. 현대사회에서 힘이 센 인간은 갈 곳이 드물었지만, 음지에선 힘이 센 인간만큼 환영받는 종자도 드물었다.
그래서 E, F급의 각성자들은 유혹에 빠지곤 한다. 양지에선 별것 아닌 취급을 받는 각성 능력이 음지로 가면 격한 환영을 받으니까.
범죄 조직에 속하는 순간 버는 돈의 자릿수가 달라진다. 인생이 바뀌는 거다.
이걸 막기 위해 데이터베이스 의무 등록부터 시작해서 각성자 범죄 형량을 무겁게 만들었지만, 저등급 각성자가 범죄 조직에 가입하는 숫자는 꾸준히 늘어만 갔다.
당연했다. 범죄가 언제 주민등록과 법이 없어서 일어났는가. 그런 게 있어도 일어나는 게 바로 범죄였다.
애초에 막는다는 발상이 오만했던 거다. 인간의 욕망을 막을 수 있는 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각성자라고 해 봤자 혼자다. 꾸물대지 말고 처리해.”
대장의 말에 납치범들이 망설임 없이 김태식에게 달려들었다.
비록 저등급 각성자라지만 납치범들은 음지의 세계에서 끊임없이 전투를 겪어 왔다. 어지간한 전투에선 승리할 자신이 있었다.
사람과 몬스터를 상대하는 건 다른 문제였으니까.
단지 놈들이 간과한 게 하나 있다면.
화륵.
김태식의 등급이 E, F급이 실전 경험을 조금 했다고 비빌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는 거다.
적련을 뽑아 든 김태식이 가볍게 검을 휘둘렀다.
요즘 새롭게 익힌 것들을 싹 다 빼고 담백하게. 진심으로 검을 휘둘렀다간 상대가 전부 증발해 버릴 정도의 차이가 김태식과 납치범들 사이에 존재했다.
불꽃이 납치범들을 덮치고 거세게 타올랐다. 힘을 뺐다고 해서 단순히 위협을 한 건 아니었다.
아마 대다수가 당분간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다쳤을 것이다.
혼자였다면 모를까. 뒤에 지켜야 될 대상이 있는 상태에서 방심할 생각은 없었다.
펑!
불꽃이 거세게 갈라졌다. 납치범들의 대장이 바람을 일으켜 주위의 불꽃을 걷어 냈다.
그래도 대장이라고 한 수 있긴 했나 보네. 한참 부족하지만.
“…….”
김태식을 노려보던 납치범들의 대장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은 하얀 약통이었다.
범죄 조직, 하얀 약통이라는 단어가 섞이자 김태식의 뇌리에 각성 강화제라는 키워드가 떠올랐다.
아니나 다를까, 놈이 약통을 열어 안의 내용물을 입에 털어 넣자.
기기기기긱. 놈의 각성 능력이 대폭 강화됐다.
공기의 흐름이 달라졌다.
거센 바람을 일으키며 놈이 김태식에게 달려들었다.
C, B급 정도인가. 약 하나 먹었다고 많이 쳐줘 봐야 D급이던 각성자가 저 정도로 강해지는 게 어이가 없었다.
그만큼 부작용도 심하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효과가 너무 좋았다.
뭐. 어이없는 건 어이없는 거고, 위협이 되진 않았다.
김태식에게 접근한 놈들의 대장이 바람을 일으키며 주먹을 휘둘렀다.
옆으로 한 발짝 물러나 피하며 김태식은 상념에 잠겼다.
검사의 간격에 들어온 이놈을 어떻게 요리해야 될까.
본인이 지금 사지에 들어온 걸 알기는 할까?
모르겠지. 자기도 형한테 사정없이 맞기 전에는 몰랐다. 이건 깨우치기 전까진 말로 알려 줘도 알 수 없는 종류의 영역이었다
“으아아아!”
포효를 내지르며 놈이 사정없이 주먹을 휘둘렀다.
김태식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각성 능력만 믿고 무작정 빠르고 강하게 주먹을 휘두르는 꼴을 보니 몇 달 전의, 백한영을 만나기 전의 자신이 떠올랐다.
나도 저러던 시기가 있었는데. 당시 형이 뭐라고 했었더라.
그냥 기초부터 엉망이라고 했었지, 아마.
그 기분을 나도 느끼게 될 줄이야. 감회가 새로웠다.
“뭐가 그렇게 웃긴 거냐!”
납치범들의 대장이 분노를 터트렸다. 비웃었다고 느낀 것이다. 꺄아아악! 더불어 소녀가 비명을 내질렀다. 김태식이 아무것도 안 하고 피하기만 하니 수세에 몰린 것처럼 보인 거다.
이런. 다른 사람도 있는데, 너무 나만 생각했네.
얼른 끝내자.
후웅. 주먹을 피하며 김태식이 검을 들었다. 이대로 검을 휘두르면 놈의 몸이 반토막이 날 테니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이런 쓰레기를 죽인다고 죄책감이 느껴지진 않겠지만, 뒤에 보는 눈이 있으니까.
최대한 깔끔하게 제압하는 게 좋았다.
터엉! 검의 옆면과 놈의 머리가 만나며 텅 빈 깡통을 두들기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털썩. 납치범이 전부 모래사장에 뻗은 걸 확인한 김태식이 이내 스마트폰을 들었다.
이번에야말로 진짜로 경찰에 신고할 작정이었다.
애애앵―!
“빨리도 온다.”
김태식이 신고를 하다 말고 스마트폰을 집어넣었다.
아무리 히어로는 늦게 등장하는 법이라지만, 빌런이 전부 쓰러진 뒤에 도착하면 어쩌자는 거야.
사이렌이 달린 승합차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내렸다. 그중 피로에 전 얼굴을 한 남자가 모래사장을 훑어보고 황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야, 이거.”
목표물이 손을 쓰기도 전에 전부 쓰레기처럼 땅을 굴러다녔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피로에 전 얼굴의 남자, 이현진의 말에 특수 대책반 요원들이 모래사장에 쓰러진 납치범들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반장님, 얘네 그놈들 맞는데요?”
“나도 봐서 알아. 음. 그쪽이 한 겁니까?”
“네.”
김태식이 이현진에게 다가가 빠르게 사정을 설명했다. 어쩌다 금발의 소녀를 만났는지, 왜 싸우게 됐는지.
“납치범이라고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놈들이 저기 저 애를―.”
몸을 돌려 금발의 소녀를 가리키려던 김태식의 말이 순간 끊겼다.
한여름 땡볕 아래에서 겨울철 옷을 입고 어린애가 극한의 스트레스를 받으면 어떤 꼴이 될까.
김태식이 다급히 뒤로 달려갔다.
금발의 소녀가 땅에 쓰러져 있었다.
* * *
소냐 페도로프의 유년기는 행복한 추억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다정한 부모님과 오빠의 사랑을 듬뿍 받은 소냐는 구김살 없는 밝은 성격으로 자랐다.
친구를 챙기고, 사람을 좋아하고, 그늘 없이 자란 아이라는 단어는 소냐를 위해 존재하는 게 분명하다. 그런 얘기를 듣던 시기가 있었다.
그 모든 건 소냐의 10살 생일을 기점으로 무너져 내렸다.
부모님이 죽었다. 정확히는 살해당했다.
부모님을 살해한 남자들은 소냐와 그녀의 오빠를 이상한 시설로 끌고 갔다. 그때 자신을 끌고 갔던 남자의 냄새를 소냐는 아직도 기억했다.
담배, 화약, 피 냄새가 섞인 지독한 냄새를.
시설에 간 소냐는 오빠와 떨어졌다. 나이대가 비슷한 아이들끼리의 합숙 생활이 시작됐다.
시설에선 정말 다양한 일이 있었다.
그들의 말을 빌리자면, 극한의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을 조성해 각성을 유도 중이라고 했다.
당시 소냐는 그게 정확히 무슨 뜻인지 몰랐다. 너무 어리기도 했고, 연구원의 말을 하나하나 분석할 정도로 여유가 있지도 않았다.
소냐가 연구원들이 했던 말의 뜻을 이해한 건 시설에 입주하고 1년 후. 정신이 망가지기 직전, 연구실에서 탈출하기 3일 전쯤이었다.
“성공했습니다. 심지어 능력의 종류도―.”
“수고했다.”
그때 연구원의 말에 대답하고 무심히 자신을 내려다보던 남자를 소냐는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얼굴에 흉터가 가득한 남자는 외관만으로도 위압감을 줬지만, 결정적으로 소냐를 겁먹게 한 건 따로 있었다.
소냐를 사람으로 보지 않는, 무기질적인 눈빛은 그녀를 무력감에 빠지게 만들었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남자가 나를 죽일 것이라는 걸.
기한이 얼마나 남았을까. 교과서에서 봤던 사형수의 기분을 실감하며 소냐는 시간을 보냈다. 늪에 빠진 것 같은 심정으로, 아무 희망도 발견하지 못하고 멍하니.
그렇게 3일이 지났고, 누군가 소냐를 찾아왔다.
“탈출하자, 소냐야.”
그녀의 오빠였다.
온 연구실에 각성 능력을 사용한 후 오빠가 꺼냈던 마지막 말이 소냐의 머릿속에 계속 맴돌았다.
“먼저 도망쳐. 금방 따라갈게.”
소냐가 눈을 떴다. 몸이 무겁고 머리가 멍했다.
시설을 탈출하고 능력을 써서 도망을 친 것까진 기억이 났지만, 그 이후가 흐릿했다.
소냐가 파편화된 기억을 이어 붙이며 몸을 일으켰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얼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해 오빠를 구해야―.
“뭐 해, 이 녀석아. 너 환자야. 누워 있어.”
소냐는 순간 몸이 굳었다. 남자의 목소리. 악몽 같은 기억이 자극됐다.
녹슨 기계처럼 삐걱대며 고개를 돌린 소냐가 눈을 깜빡였다. 파편화됐던 기억이 돌아왔다. 아까 봤던 남자가 안절부절못하며 옆에 서 있었다.
“그러니까, 어. ‘괜찮아……?’ 이게 맞나.”
소냐가 눈을 깜빡이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부분이 낯선 언어라 못 알아들었지만, 괜찮냐는 러시아어만은 확실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소냐의 행동에 김태식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급하게 인터넷을 뒤져서 러시아어 실전 강의를 훑어본 보람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