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이걸 깜빡했네, 미안하게 (3)
“수고했다.”
백한영의 말에 거지 남매들이 푹 숙이고 있던 얼굴을 들었다.
꼬질꼬질한 옷에 검댕이 묻은 얼굴 그리고 산발이 된 머리까지.
누가 봐도 집 주소가 서울역인 거지들이었다.
“교관님…….”
얼굴에 묻은 검댕을 문질러 닦으며 최동협이 힘없이 입을 열었다.
던전 게이트를 클리어 하고 나니 지난 며칠 동안 묻고 싶었던 말이 자연히 튀어나오는 것이다.
“대체 거긴 뭐 하는 곳이었어요……?”
최동협에겐 상당한 실전 경험이 있었다. B급에 도달하기까지 클리어 한 게이트의 숫자만 세도 수십 개가 넘었다.
그런 최동협에게도 지난 며칠간은 당황의 연속이었다.
던전 게이트의 규모가 상상을 뛰어넘지 않나, 강력한 몬스터가 계속 나타나질 않나.
심지어 던전 수호자는 아예 땅속에 숨어 있기까지 했다. 모든 몬스터를 쓰러트렸음에도 게이트가 닫히지 않아 당황했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했다.
가르침을 받는 입장에서 할 말은 아니었지만, 원망의 마음이 살짝씩 새어 나와 참 곤란했던 일주일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건 알아서 뭐 하게.”
“던전 등급이라도 알려 주세요. 대체 무슨 등급이었어요?”
“적혀 있기로는 A등급.”
“이게 A등급이라고요?”
믿기지 않는다는 목소리로 최동협이 중얼거렸다.
이 정도면 많이 성장했다고 믿었는데, 고작 A등급의 던전 게이트에서 개고생을 한 거다. 충격을 받을 만도 했다.
그런 최동협을 보며 백한영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발품 좀 팔아서 훈련하기 딱 좋은 빡센 던전 게이트를 찾아낸 거긴 한데, 이건 말 안 하는 게 낫겠다.’
무신련 특별 과정을 받기 전에도 최동협, 신유나, 김태식은 어지간한 A급 던전 게이트를 순식간에 공략할 수 있었다.
그만큼 셋의 실력은 빠르게 늘어났다.
사실상 전원이 A급 각성자인 길드원들을 제대로 훈련시키기 위해선 어지간한 던전 게이트로는 부족했다. A급과 S급 사이. 그 언저리의 난이도를 가진 던전이 필요했다.
그래서 백한영은 길드원들을 위해 손수 발품을 팔았다.
생존 훈련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넓고 생태계가 다양하며 몬스터는 강력한 던전 게이트를 찾기 위해서.
다시 말하지만 나사 빠진 소리를 한 최동협은 관계없었다. 순수하게 훈련을 위해서다.
‘많이 성장했네.’
고작 며칠 사이에 길드원들의 실력이 많이 올라왔다.
흔히들 연습은 죽은 경험, 실전은 살아 있는 경험이라고 한다. 그 말대로였다. 비록 백한영의 보호 아래에서 던전 게이트를 클리어 한 게 전부였지만, 그것만으로 길드원들에겐 눈에 띄는 변화가 생겼다.
‘한 다섯 번쯤 더 하면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겠다.’
길드원들이 들으면 기겁할 생각을 하며 백한영이 검집을 툭툭 건드렸다
당분간은 이쪽에 전념하자.
딱, 은하가 시간에 여유가 생길 때까지만.
* * *
사방이 강철로 막혀 있는 방 안. 밖과 연결된 곳이라곤 두꺼운 철문이 전부인 차가운 수련실 안에서 천진혁은 눈을 감고 사색에 잠겼다.
검이 무엇일까. 그건 천진혁의 오래된 물음이었다. 12년 전 아버지가 목을 매달고 죽었을 땐 이미 그의 머릿속은 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검을, 검법을 정신 수양을 위한 도구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죄다 위선자다.
검은 무기였다. 근본이 남을 해하는 무기다.
손에 들린 철 덩어리의 분류조차 제대로 못하는 자들은 적어도 천진혁의 기준에선 3류 이하였다.
천진혁도 검법을 익혔다. 이름은 무상검법(無上劍法). 아버지인 천태진이 평생을 바쳐 창안한 무공이었다.
무공. 그래, 게이트가 열리기 전, 세상에 신비가 존재하지 않던 그 시절에도 천태진은 자신이 만든 검법의 카테고리를 무공으로 분류했었다.
다시 생각해도 미치광이라는 단어가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천태진이 바라본 이상향은 뚜렷했다. 너무 뚜렷한 탓에 사회에서 배척받을 정도로 선명한 꿈을 품고 있었다.
밤하늘의 달을 베고 싶다.
그게 천태진이 품은 유일한 소망이었고. 천진혁이 무상검법을 버리지 않은 이유였다.
후우. 천진혁이 낮게 호흡을 뱉었다.
무상검법은 무결점을 목표로 하는 무공. 아직 여정의 도중이었지만, 이 길의 끝엔 천의무봉의 완전한 검법이 기다리고 있었다.
세상이 바뀌었다. 게이트가 열리고 각성자라는 웃기지도 않은 직업이 생겨난 뒤로 세상엔 무공이라는 이름의 능력이 대거 등장했다.
매화검법, 태극혜검, 제왕검법, 사일검법 등등. 유명하고 강력한 무공이 잔뜩 나타났지만, 천진혁은 묵묵히 무상검법을 연마했다.
아버지를 존경해서는 아니었다. 그리워해서도 아니었다. 천진혁은 아버지가 자살한 그날 경찰에 신고한 후 아무렇지 않게 검을 휘두른 인간이었다.
천진혁은 아버지를 좋아하지 않았다. 싫어했다? 그 정도로 강한 감정을 품은 기억은 없었다.
그런데 왜 천태진이 만든 무상검법을 끝까지 붙들고 있느냐.
아버지에겐 관심이 없었지만, 그가 품고 있던 이상향에는 관심이 있었다
아버지가 어찌 되든 상관없었지만, 그가 만든 무상검법의 향방에는 주의를 기울였다.
천진혁이 무상검법을 심상 깊은 곳에 새기게 된 데에는 그러한 이유가 숨겨져 있던 것이다.
내면으로 정신을 가라앉힌 천진혁이 고개를 들었다.
거대한 벽이 보였다. 제주도에 생성됐던 SS급 던전 게이트의 수호자 방. 그곳에 나 있는 기다란 흉터를 확인한 천진혁은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천진혁은 천태진의 아들이었다. 그게 명백한 사실이라는 걸 아버지와 같은 꿈을 품은 날 깨달았다.
게이트가 열리고 8년 동안 천진혁은 밤하늘의 별을 베기 위해서 검을 연마했다. 기어코 화경의 극이라는 드높은 경지에 오르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직 밤하늘의 별을 베기엔 한없이 모자랐다.
거기서 흉터의 등장이다. 화경의 극에 도달한 천진혁은 알았다.
저 참격을 남긴 사람은, 어쩌면 밤하늘의 별조차 벨 수 있을지 모른다는 걸.
천진혁의 몸이 움직였다. 던전 벽에 남은 흔적을 모방해 검이 대기를 찢으며 날카롭게 움직였다.
‘이게 아니야.’
어린애 장난 같은 검로에 천진혁의 마음이 흐트러졌다. 꿈에 그리던 이상향을 발견했지만, 손에 넣을 수 없는 신기루인 걸 알아 버린 것이다.
‘어떻게 한 거냐, 백한영.’
이 세상에 저 정도로 완벽한 검로를 그릴 수 있는 존재는 한 명밖에 없었다.
천진혁이 입술을 핥았다. 당장이라도 백한영에게 달려가 비무를 신청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안 되지.’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조금 더 검의 신과 가까워졌을 때, 그 순간이 타이밍이었다.
‘모방할 수 없다면 답은 하나군.’
천진혁의 내면에 사람 하나가 튀어나왔다.
천진혁의 의념이 만들어 낸, 가상의 백한영이었다.
심상에 뿌리내린 완전의 검을 뽑아 든 천진혁이 심상병기(心像兵器), 무상검(無上劍)을 들고 백한영에게 달려들었다.
백한영이 검을 뽑았다.
“거참 사람 귀찮게 하네.”
백한영은 거창한 무언가를 벌어지지 않았다. 의념과 심상을 재료 삼아 심상병기를 만들지도, 심상을 현실로 꺼내 와 법칙을 재정립하지도 않았다.
그저 검을, 좌에서 우로 그었다.
“허어어억.”
현실로 부상한 천진혁이 목을 부여잡았다. 폐가 산소를 요구했지만, 숨을 쉬는 법을 잊어버린 탓에 그럴 수가 없었다.
“하아. 하아. 하아.”
간신히 숨 쉬는 법을 기억해 낸 천진혁은 심상으로 재현했던 백한영의 검법을 천천히 되새겼다.
진실된 의미로 모든 걸 베어 버릴 수 있는, 절대의 참격을 떠올린 천직혁이 손을 부르르 떨었다.
백한영이 ‘진짜’라고 평한 재능의 소유자인 천진혁은 처음으로 타인에게 벽을 느꼈다.
상상했다. 만약 천 년의 시간이 주어졌을 때 백한영이 도달한 경지에 닿을 수 있을지를. 그 편린이라도 엿볼 수 있을지를.
‘진짜’의 재능을 가지고 있었기에 천진혁은 자신과 백한영 사이에 어떠한 간극이 있는지 알았다.
그건 천 년을 고작으로 만들어 버리는 차이였으며, 사람의 마음을 으스러트려 버리는 격차였다.
‘내 꿈은 이루어질 수 없는 거냐.’
처음으로 신이 원망스러웠다. 차라리 몰랐다면 괜찮았을 것을.
지식의 저주였다. 이미 알아 버린 이상 잊고 사는 건 불가능했다.
저 터무니없는 괴물을 따라 달려가는 것 외에 천진혁에게 남은 선택지는 없었다.
‘불가능해.’
천진혁의 마음이 새까맣게 물들었다.
무인의 정신이 약해졌을 때 찾아오는 마귀, 심마(心魔)였다.
천진혁의 심마가 속삭였다.
이대로 그냥 검을 놓아 버려. 언제까지 말도 안 되는 꿈을 좇을래.
고통을 즐겨? 왜 고행을 자처해.
더 편한 길이 있잖아.
너네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그건 안 되지.”
심마의 속삭임을 무시하며 천진혁이 정신을 내면으로 가라앉혔다.
가상의 백한영을 만든 천진혁이 재차 검을 들었다.
심마는 그대로고, 마르지 않을 것 같았던 재능의 샘도 바닥을 보였다.
한계가 손에 잡히기 시작한 천진혁에게 검의 신을 따라갈 원동력 같은 건 남아 있지 않았어야 됐지만.
놀랍게도 아직 그에겐 남아 있는 게 있었다.
천진혁은 천태진의 아들이었다. 그게 명백한 사실이라는 걸 아버지와 같은 꿈을 품은 날 깨달았다.
때문에 천진혁은 천태진을 한없이 닮아 있었다.
광인(狂人)이라는, 닮아서 좋을 것 없는 부분까지 전부다.
‘천 번 정도 반복하다 보면 감이 잡히겠지.’
천진혁이 가상의 백한영을 향해 달려갔다. 동시에.
백한영의 검이, 천진혁을 현실로 내쫓았다.
* * *
백한영이 길드원들을 사정없이 굴리고, 누군가가 신의 발자취를 따라 고행길을 나선 그 시각.
붉은 머리 여자 한 명이 스마트폰을 들고 메시지를 작성했다.
[이초아: 안녕하세요, 백한영 씨. 이초아입니다. 저번에 말했던 대로 가르침을…….]
아니야. 너무 딱딱해. 조금 더 부드럽게.
[이초아: 이초아예요, 연락하래서 연락했어요.]
“이것도 아니야.”
이초아가 침대에 드러누웠다. 마음에 드는 문구가 떠오르지 않았다.
백한영의 전화번호를 얻은 지 일주일이 넘었건만, 아직 한 번도 연락을 하지 못한 이초아였다
문자를 보내 본 적이 적다 보니 어떻게 보내야 예의 바르게 보일지 알 수가 없었다.
물론 이초아도 사무적으로 문자를 보내는 법은 알았지만, 중요한 건 친근하게, 더불어 예의 바르게 보이는 것이었다.
왜 그래야 되냐고?
이유는 묻지 마라, 불꽃으로 태워 버리는 수가 있었으니까.
“아. 나도 몰라.”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이초아가 스마트폰을 들고 메시지를 우다다 입력했다.
[이초아: 백한영 씨, 전에 말했던 교습 언제쯤 받으러 가면 되나요?]
거기까지 작성한 이초아는 잠깐 고민하고는 짧게 덧붙였다.
[겸사겸사 게이트라도 같이 공략하실래―.]
우웅.
갑작스러운 진동 소리에 이초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누구야. 누가 방해를 해.
살짝 화가 난 상태로 이초아가 메시지를 열었다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예상 밖의 사람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이현진: 야, 도움이 필요해.]
특수 대책반 반장, 이현진의 메시지에 이초아는.
[이초아: 백한영 씨, 전에 말했던 교습 언제쯤 받으러 가면 되나요? 그리고 시간이 남는다면 겸사겸사 게이트라도 같이 공략하실래요?]
일단 백한영에게 메시지를 전송했다.
그녀의 입장에선 이게 더 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