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이걸 깜빡했네, 미안하게 (1)
누군가는 보물찾기를, 누군가는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광대 노릇을 하며 일주일이라는 시간을 보냈고.
그렇게 서울에 일어난 대규모 던전 브레이크가 규모에 비해 빠르게 잊히고, 모두가 하나의 큰 사건이 마무리됐다고 생각했을 때.
이제서야 부랴부랴 마무리를 지으려는 사람들도 어디엔가 있었다.
미국 펜타곤 최심부.
그곳에서 인류 대책국의 국장, 마틴 요세프가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얼른 틀어.”
“하아. 알겠습니다.”
요세프의 명령에 부하가 거대 모니터를 통해 하나의 영상을 띄웠다.
화질이 좋지 않아 사람의 형태만 간신히 분간할 수 있는 영상을.
허공에 열린 거대한 게이트. 거기에서 SF에서나 나올 것 같은 거대 함선이 튀어나왔고.
사람으로 추정되는 누군가가 날아오더니, 축구공 다루듯 함선을 게이트 안으로 뻥 차 버리는 곳에서 영상이 마무리됐다.
“브라보!”
요세프가 눈물을 흘리며 박수를 쳤다.
마치 평생 응원한 축구팀이 창단 처음 챔피언스리그에서 우승한 것과 더불어 트레블을 달성한 걸 현장에서 직관한 사람처럼.
그걸 보며 그의 부하들이 속닥거렸다.
“팀, 이게 몇 번째야.”
“나도 몰라, 열 번 넘은 뒤로 안 세서.”
“이러다 외우겠어. 저 영상을 대체 몇 번 돌려 보는 건지.”
확실히 미국의 특수 위성이 가져온 영상이 경이롭긴 했지만, 아무리 위대한 것일지라도 반복해서 보다 보면 풍화되고, 감정이 가라앉기 마련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거의 50번 넘게 같은 영상을 돌려 본 인류 대책국의 요원들은 더 이상 의문의 존재가 거대 축구공으로 축구 놀이를 하는 영상에 심장이 뛰지 않았지만.
“엑셀런트!”
그들의 수장인 마틴 요세프의 심장은 아직도 펄떡펄떡 뛰는 모양이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인류 대책국의 요원들이 지난 일주일간 모은 정보를 정리했다.
1. 그 혹은 그녀의 국적은 미상이다. 인류로 추정된다.
2. 그 혹은 그녀가 해결한 게이트의 등급은 SSS급 이상이다.
3. 그 혹은 그녀의 무력은 측정 불가다.
일주일간 개고생한 것치고 내용이 빈약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인류 대책국의 요원들이 고개를 들어 재방송을 시작한 위성 영상을 바라봤다.
“웨일? 저거 더 고화질로는 없어?”
“워낙 거대한 게이트라 그런가, 차원 파장이 격렬한 탓에 저 정도가 최대야. 오히려 나는 영상이 찍힌 게 더 놀라워. 국방부에서 외계인이라도 고문했나? 저게 왜 되는 거지?”
함선이 개박살 나며 게이트 안으로 꾸겨져 들어가는 장면이 10번쯤 나왔을 때, 요세프가 진중한 표정으로 책상에 앉아 깍지를 끼고 입을 가렸다.
“우리의 예상대로 게이트 사태는 외부의 침략이 맞는 것 같군.”
“정확히는 외부의 침략과 내부의 사정이 합쳐진 환장의 콜라보죠.”
“원인은 아직 모르는 건가?”
“짐작만 합니다. 아마 우리 세계에 외계인들이 환장하는 기름이라도 나는 게 아닐까요? 보통 전쟁은 그렇게 나잖아요.”
뼈 있는 부하의 농담에 요세프는 책상을 톡톡 치며 생각에 잠겼다.
“음.”
모두가 요세프의 입에 시선을 집중했다.
그들의 국장이 사태를 파악하고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해 무언가 말해 줄 거라 기대한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요세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히어로라는 단어가 들어갔으면 좋겠어.”
“예?”
“그러니까, 히어로라는 단어가 들어갔으면 좋겠다고.”
그러니까,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 하겠다니까요.
요세프의 부하들이 서로를 바라봤다. 국장의 입에서 앞으로의 전망 대신 히어로 같은 뚱딴지같은 소리가 튀어나왔으니 당연했다.
“국장님?”
“무슨 일이지?”
“그게 정확히 무슨 말씀이시죠?”
“오. 세상에. 기어코 슈퍼맨과 배트맨을 보지 않은 세대와 얘기를 하게 될 줄이야.”
“아니, 슈퍼맨은 저도 봤습니다. 단지 히어로라는 단어가 갑자기 튀어나온 이유를 물어본 겁니다.”
부하, 플랭 웨일의 질문에 요세프가 검지를 좌우로 까딱였다.
“이래서 아마추어들이란.”
“저희는 프로… 아닙니다. 고견을 듣겠습니다.”
“코드네임을 정해야 될 것 아니야!”
코드네임……?
확실히 중요 인물에 코드네임을 붙여 관리하긴 하는데.
그걸 지금 한다고?
아직 할 일이 산더미인데, 전부 제쳐 놓고 정말로?
톡톡.
누군가 웨일의 어깨를 두들겼다. 같은 인류 대책국의 요원, 파알 팀이었다.
팀이 고개를 저었다. 그냥 포기하고 시키는 대로 하는 게 빠르다는 의미였다.
모든 요원들이 고개를 저은 후 이런저런 의견을 내놨다.
“슈퍼히어로는 어떨까? 국장님 말대로 그런 느낌이잖아.”
“너무 단순해서 별로야.”
“솔직히 저게 히어로라는 단어로 표현이 됩니까? 함선을 발로 차서 박살 냈는데요?”
“너 몇 살이야. 슈퍼맨 안 봤지.”
시켜서 하는 일이었지만 모두가 진지했다.
그도 그럴 게, 코드네임은 중대 사항이었으니까.
“이거다.”
요세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랜 토론 끝에 코드네임이 정해진 것이다.
“이 의문의 존재를, 지금부터 에픽 히어로(Epic Hero)라고 부르자.”
백한영의 코드네임.
결정.
* * *
홍유진의 인터넷 방송을 잠깐 구경했던 백한영은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침대에 누워 생각했다.
홍유진이 마왕을 잡고 돌아와 동료들과 신나게 수다를 떠는 걸 보니 문득 깨달은 게 있는 것이다.
‘나 요즘 상상 이상으로 바쁜 것 같은데, 착각인가?’
백한영은 중원에서 귀환한 후에 일어난 일들을 되돌아봤다.
우선 S급 게이트. 귀환한 지 일주일 만에 저걸 갑자기 해결했었다
다중 게이트는 어떻고. 그것도 나 아니었으면 큰일 났을 거다.
드라마는……. 이건 은하랑 같이 놀 수 있어서 좋긴 했는데, 그 뒤에 테러를 막지 않나, 제주도에 생긴 SS급 던전 게이트에서 해골을 반으로 썰질 않나.
교관 노릇도 하고, 중원에서 죽였던 신의 유년기 같은 놈도 자살시키고, 예능… 은 이모 도와준 거니까 빼고.
아무튼 이렇게 많은 일을 겪은 다음에 대규모 던전 브레이크까지 해결했네?
은하랑, 가족이랑 편안한 일상을 보내고 싶어서 귀환한 건데, 어째 귀환하기 직전보다 일을 더 많이 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평소에 게임하느라 실컷 놀면서 또 쉬려고? 하는 물음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거랑 이건 달랐다.
진짜로.
백한영이 스마트폰을 꺼냈다.
이대로는 안 돼.
내가 원한 삶은 이런 게 아니야.
백은하의 히트곡이 백한영의 귓가를 자극하고, 잠시 후 노래를 부르던 것과 똑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오빠, 왜.]
“은하야, 스케줄 싹 다 빼. 오키나와 가자.”
[…오빠, 술 마셨어? 그리고 스케줄을 내가 어떻게 빼. 당분간 엄청 바쁘다고 말했잖아.]
“은하야, 제발.”
[하아. 오빠, 나 촬영 중이야. 일단 끊어.]
띠리링.
가차 없이 통화를 끊는 백은하.
침묵에 빠진 스마트폰을 한참 동안 쳐다보던 백한영이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 되겠다.
특단의 조치를 내려야겠어.
* * *
“어디 좀 가자고요?”
“그래.”
“저희 드디어 놀러 가는 거예요? 어디로요? 제주도? 하와이? 오키나와?”
“오키나와……?”
백한영이 스윽 최동협을 바라봤다.
최동협이 눈을 깜빡였다.
혹시 최근 일본에 갔다 오셔서 또 일본에 가는 건 별로인 건가? 하는 생각을 하며.
최동협이 말했다.
“오키나와가 별로면 세부는 어때요?”
“허허.”
백한영이 웃었다. 그걸 자신의 제안이 먹힌 걸로 인식한 최동협이 따라 웃었다.
“교관님, 역시 저밖에 없죠?”
“그래. 너밖에 없다. 자, 가자, 얘들아.”
“지금이요? 저 여권 안 가져왔는데요?”
“자. 가자.”
이 모든 걸 바로 옆에서 지켜보던 신유나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백한영 교관님이 상당히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데, 착각이겠지?
그로부터 3시간 후.
신유나는 다시금 속으로 중얼거렸다.
왜 불안한 예감은 틀리질 않는 걸까.
한 번쯤은 착각이어도 되잖아.
“형?”
“어, 왜.”
“원래 던전 게이트라는 게 이렇게도 생겼어요?”
철썩.
파도가 치는 모래사장에 앉아 묻는 최동엽에게 김태식이 말했다
“최근에 던전 게이트의 생태계가 많이 바뀌고 있다고 하더라고. 일본에 생성된 월드 게이트 있지? 그거랑 비슷한 형태의 소규모 게이트가 하나둘씩 늘어나고 있다더라.”
“그래요? 그나저나 저 물고기 먹어도 되는 걸까요. 게이트 내부에 있는 건데.”
“일반 동식물은 괜찮다고 하던데. 잘 알아보고 먹긴 해야지.”
“아. 이럴 줄 알았으면 생존 다큐멘터리라도 열심히 챙겨 볼걸.”
뚝. 무언가 끊기는 소리가 났다.
실제로 난 소리는 아니고, 한가하게 계속 얘기하는 두 사람 탓에 신유나의 내면에 있던 인내심이 끊어진 것이었다.
“모두 일해요.”
“어. 응.”
“알겠어.”
살벌한 신유나의 목소리에 최동협과 김태식이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작업을 시작했다.
신유나는 아까 전, 정확히는 던전 게이트 입구에 길드원을 세워 놓고 먼 산을 바라보던 백한영을 떠올렸다.
“교관님, 여긴 게이트 아닌가요?”
“그걸 물어봐야 아니.”
“오키나와는요?”
“그걸 물어봐야 아니.”
먼 산을 바라보던 백한영은 거듭된 최동협의 말에 고개를 정면으로 돌리고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너네가 약하기 때문에 내가 못 쉬는 거다. 그게 내 결론이다.”
“교관님?”
“오늘부터 무신련 특별 과정에 들어간다. 이의는 받지 않는다.”
이상이 신유나가 아무런 장비 없이 던전 게이트에 떨어져 아카데미… 아니, 던전에서 살아남기를 찍고 있는 이유였다.
“오늘 지낼 집부터 지어요. 던전 내부의 환경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니 필수예요.”
“알았어, 유나야.”
“먹을 음식은, 최동협 네가 맡아. 사냥은 원래 짐승의 역할이잖아.”
“알았어…….”
신유나의 지시에 따라 김태식과 최동협이 흩어지고 3시간 후.
“됐다!”
최동협이 완성된 나무집 앞에서 만세를 불렀다.
“그래도 각성 능력이 있으니 아예 답도 없진 않네.”
“살다 살다 제 각성 능력으로 나무를 깎게 될 줄은 몰랐어요.”
김태식과 신유나가 상기된 표정으로 완성된 나무집을 보며 감상을 늘어놨다.
고생해서 베이스캠프를 만들고 나니 뿌듯함에 몸이 부르르 떨린 것이다.
“얼른 밥부터 먹자. 생선이랑 열매를 아까 전부 모아 놨―.”
최동협이 커다란 나뭇잎 위에 모아 놓은 음식을 가지고 집 앞으로 걸어왔다.
그때였다.
콰아아앙!
무언가가 최동협의 말을 끊고 하늘에서 떨어졌다.
박살 난 베이스캠프의 잔해와 충격파로 날아간 음식을 바라보던 최동협이 이내 고개를 돌렸다.
웬 원숭이처럼 생긴 몬스터가, 최동협 일행을 바라보며 히죽 웃고 있었다
“…처죽여!”
몇 시간 동안 개고생해서 만든 집이 산산조각 난 탓에 이성을 잃어버린 신유나가 빛의 검을 수십 개 소환했고.
화륵.
김태식이 마검을 소환해 몬스터에게 덤벼들었다.
저놈을 당장 잡아다 먼지 나게 패지 않으면 분노가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잘하네.”
그리고 그걸 지켜 보며 백한영이 중얼거렸다.
그의 손에는 피자가, 돗자리에는 치킨이 있었는데.
은하가 나오는 예능을 시청하던 걸 멈추고 백한영이 하늘을 바라봤다.
“오키나와 가고 싶었는데.”
작게 한숨을 쉰 백한영이 다시 은하가 나오는 예능을 시청했다.
우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