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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신이 귀환했다-46화 (46/117)
  • < 서울 브레이크(5) <여기부터 유료입니다> >

    갑작스러운 사태에 당황했던 아스트레일이 빠르게 정신을 차렸다.

    무슨 수를 쓴 건진 모르겠지만, 저 남자가 함장과 전투원을 해치우고 함선을 게이트 안으로 구겨 넣은 듯했다.

    [보잘것 없는 문명인 줄 알았는데, 숨겨둔 한 수가 있었나 보군.]

    그리고 그게 가능했던 이유로 아스트레일은 이 세상의 기술이 응축된 비밀병기를 예상했다.

    방금 일어난 일을 인간 혼자서 벌인 거라고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검사인가.]

    아스트레일이 백한영을, 정확히는 그의 팔목을 보며 말했다.

    마법과 과학이 초고도로 발전된 레티오르의 황제인 만큼 백한영의 손목에 있는 팔찌가 엄청난 기술이 집약된, 굉장히 뛰어난 검이라는 걸 눈치챈 것인데.

    스릉.

    아스트레일의 예상과는 다르게 백한영은 허리춤에 있던 검을, 청심(淸心)을 뽑아 들었다.

    [무슨 짓이지?]

    “뭐가.”

    [왜 보물을 놔두고 그런 쓰레기를 사용하냐는 얘기다.]

    “쓰레기?”

    백한영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이게 보자 보자 하니까.

    “넌 다른 것보다 눈부터 고쳐야겠다. 안목이 아주 별로야.”

    [역시 뭔가 수작을 부린 모양이군. 무기 하나 제대로 못 고르는 놈이 단신으로 이런 짓을 벌일 수 있을 리가 없지.]

    우웅―!

    아스트레일의 내공이 단번에 활성화됐다.

    두 주먹에 심상을 본떠 만든 수투(手套)를 씌운 아스트레일이 함선의 잔해를 박차고 앞으로 뛰쳐나갔다.

    콰아앙!

    아스트레일의 주먹이 닿은 부분에 거대한 크레이터가 생겼다.

    뒤로 살짝 물러나며 공격을 피한 백한영에게 아스트레일이 소리쳤다.

    [쥐 새끼처럼 잘도 도망치는구나!]

    아스트레일의 주먹이 거칠게 대기를 찢었다.

    천인(天人)을, 천룡(天龍)을 고꾸라트린 무공. 금룡파천권(禁龍破天拳)의 묘리를 따라 강기수투가 백한영의 심장과 머리를 노렸고.

    사라졌다.

    ······.

    ······?

    당황한 아스트레일이 바닥을 박차고 다급히 뒤로 물러났다.

    [그건 무슨 사술이냐!]

    “와. 그 말을 여기서도 듣네.”

    설마 용인의 입에서 저 소리가 나올 줄 몰랐던 백한영이 그렇게 말하자, 아스트레일이 재차 강기수투를 만들었다.

    이번엔 확실하게 금룡파천권의 오의를 사용해서―.

    ‘?’

    아스트레일이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봤다.

    직전까지 금빛으로 빛나고 있던 강기수투가, 또다시 사라져 있었다.

    “이번에도 사술이라고 하게?”

    백한영의 말에 아스트레일은 상대의 경계 수준을 한 단계 높인 후 의식을 내면으로 가라앉혔다.

    일반적인 무공의 경지는 다음과 같았다.

    가장 먼저 기(氣)를 외부로 표출하는 경지. 절정이 있었고.

    그다음으로 강기(罡氣)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경지. 초절정이 있었다.

    초절정의 극에 이르면 강기를 압축해 강환(罡丸)을 다룰 수 있었는데, 그것만으로도 무림 10대 고수에 들기엔 충분했지만.

    그 이상으로 가기 위해선 이제 다른 게 필요했다.

    심상(心像).

    무인에게 그것은 하나의 무공을 익히며 벼려낸 이미지였으며.

    영혼에, 마음에 새겨진 이상향을 의미했다.

    그렇게 수십 년간 벼려낸 이미지를 이용해 내면에 소세계(小世界), 혹은 소우주(小宇宙)를 완성한 경지를 세간에선.

    화경(化境)이라고 불렀다.

    아스트레일의 심상병기(心像兵器), 파천갑(破天鉀)이 그의 두 주먹을 덮었다.

    파천갑에 담긴 의념이 폭주했다.

    하늘을 뛰놀던 천인과 천룡을 때려죽였던 금룡파천권의 심상을 재료 삼아 만들어진 파천갑이 그 진가를 발휘―.

    ‘······?’

    아스트레일이 멍하니 두 손을 내려다봤다.

    직전까지 흉흉한 기세를 내뿜고 있던 파천갑이,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왜?”

    천연덕스러운 백한영의 말에 아스트레일이 신중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짓을 한 거냐.]

    “사술이라며 니가. 그럼 사술이겠지.”

    [무공이냐?]

    처음엔 사술이라며 당황했지만, 두 번이나 당하고 나니 아스트레일의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심상병기를 단번에 지워버릴 수 있는 사술은 적어도 아스트레일이 알기론 없었다.

    “무공? 무공이긴 하지.”

    [어떤 무공이지?]

    “이거?”

    [내가 익힌 무공의 이름은 금룡파천권이다. 먼 옛날 자유를 갈구했던 한 용인의 만든 무공이지. 네 무공은 뭐지?]

    침략자의 입장을 떠나 정말 순수하게 무인으로서 궁금했던 아스트레일의 질문에, 백한영이 잠깐 고민하고는 입을 열었다.

    “방금 사용한 건···. 일단 뿌리는 절대무적독존검법인데.”

    [······나를 우롱하는 거냐.]

    “아니. 그렇게 말할 거 같긴 했는데, 이게 진짜라니까? 나도 제대로 알려달라고 몇 번이나 말했는지 몰라.”

    백한영은 오래전, 아주 오래전의 추억을 잠시 떠올렸다.

    낯선 몸에 막 빙의해 정신이 없던 시기. 가진 게 아무것도 없어서 굶어 죽기 직전이었던 자신을 거둬줬던 한 낭인을, 스승을 만났던 추억을.

    뭐 스승이 봤다면 이름만 절대무적독존검법이고 아예 다른 무공이지 않냐고 한마디 했겠지만.

    바라본 이상향만 같으면 됐지. 욕심은 많아가지고.

    고금제일인의 유일한 스승이면 만족하세요. 솔직히 스승이 알려준 무공 자체는 쓰레기 같았잖아요. 동의하시죠?

    백한영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간만에 스승 생각을 했더니 절로 웃음이 새어 나온 것이다.

    [놈.]

    그걸 조롱이라 느낀 건지 아스트레일이 의념과 내공을 끌어 올렸다.

    우웅―!

    온몸을 의념으로 뒤덮으며 아스트레일이 정신을 집중했다

    심상의 틀이 잡히기 시작해 그 틀에 맞춰 강기를 주무를 수 있는 경지가 화경의 초입.

    소세계가 완성되어 심상의 일부를 현실로 꺼내올 수 있게 되는 경지를 화경의 완숙이라 불렀고.

    그 화경의 경지가 극에 이르면.

    소세계를 지배하는 법칙을 현실로 꺼내올 수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파지지지직!

    아스트레일의 소세계와 현실이 만나며 거센 일그러짐을 낳았다.

    소세계에 새겨진 하나의 절대적인 룰이 아스트레일을 뒤덮었다.

    금룡파천권. 용을 봉하고 하늘을 부순다.

    모든 것을 무릎 꿇린다.

    즉. 금룡파천권은, 군림자의 무공이며.

    그런 금룡파천권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소세계에 새겨진 법칙은―.

    “그만해 인마.”

    서걱.

    아스트레일을 뒤덮던 법칙이 깔끔하게 베어 사라졌다.

    백한영이 말했다.

    “가만히 봐주고 있으니까 끝이 없네. 내가 말한 질문에 대답이나 해. 그래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보물이 뭐냐니까?”

    아스트레일의 머리가 차가워졌다.

    처음엔 사술, 두 번째엔 특수한 무공을 가정했지만, 세 번이나 당하고 나니 그런 게 아니라는 걸 확실히 알아챈 것이다.

    ‘설마.’

    아스트레일은 만 년 전의, 용인제국이 아직 만들어지기 전의 일을 떠올렸다.

    현재는 말로만 전해지는, 생명체가 단신으로 함선을 넘어서는 위력을 냈던, 화경 위의 경지가 실제로 존재하던 시기의 이야기들을.

    ‘그렇다면.’

    촤악. 가볍게 손가락에 상처를 낸 아스트레일이 착용하고 있던 반지에 피를 흘려보냈다.

    우우웅―!

    아스트레일의 주변 공간이 활짝 열렸다.

    초고도로 발전된 만년제국 레티오르의 정수가 강림하려는 것이다.

    파지직!

    아공간에서 튀어나온 수많은 병기가 백한영을 겨눴다.

    촤르륵.

    강철로 된 다양한 파츠가 아스트레일을 감쌌다.

    순식간에 완성되는 강철의 거인에 탑승하며 아스트레일이 소리쳤다.

    [이름 모를 무인아! 황제의 명령이다. 참회하라!]

    함선의 반 정도의 크기로 늘어난 강철의 거인의 손에 거대한 검이 잡히고.

    제국의 역량이 집중된 거대병기의 표면이 파랗게 타올랐다.

    회로에 마나가 주입되며 수천, 수만 개의 마법이 동시에 발동하려던 것이었는데.

    “왜 하나 같이 말로 하면 못 알아듣는 걸까.”

    지긋지긋하다는 말투로 중얼거린 백한영이 검을 들고.

    그대로 내려그었다.

    구구구구궁!

    거대한 질량의 참격이 강철의 거인을 덮쳤다.

    병기가 반으로 부러지고, 강철 거인의 무릎이 꺾였다.

    거기서 끝나지 않고 수많은 병기와 강철의 잔해가 유압프레스에 들어간 것처럼 반쯤 납작해졌을 때.

    백한영이 압력을 풀고 아스트레일에게 걸어갔다.

    쿨럭.

    상당한 데미지를 입은 아스트레일이 힘겹게 일어나자, 백한영이 말했다.

    “선생님 제가 질문이 있는데요. 그래서 보물이 뭡니까.”

    [너.]

    “나? 내가 보물이라고?”

    [너는 대체 뭐냐.]

    아스트레일이 미지의 괴물을 마주친 어린아이처럼 바들바들 떨었다.

    [어떻게 한 거지?]

    “사술입니다.”

    [네가 처음에 썼던 것과 지금 사용한 건 엄연히 다른 심상이다. 내가 화경의 다음 경지를 가보지 않았다고 해도 그 정도는 알 수 있어!]

    백한영이 처음에 아스트레일의 강기수투를, 심상병기를, 소세계를 베어버렸던 심상과 강철의 거인을 짜부라트린 심상이 아예 다른 성질의 것이라는 건 딱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었는데.

    거기서 문제가 생겼다.

    [어떻게 한 인간의 몸에 두 개의 심상이 있을 수 있는 거냐!]

    사람이, 생명체가 가질 수 있는 심상은, 한평생에 하나밖에 없던 것이다.

    [한 몸에 여러 개의 심상을 품는 건 위대한 우리의 선조도 못 했던 거다! 무슨 짓을 저지른 거냐! 이 괴물아!]

    “괴물이라는 단어가 왜 댁 입에서 나와요.”

    아스트레일의 말에 백한영은 머리를 긁적이고는 대답했다.

    “확실히 네 말대로 한 사람이 여러 개의 심상을 품는 게 불가능하긴 한대. 방법이 아예 없진 않아.”

    [헛소리! 만년이 넘는 제국에서도, 수많은 차원에서도 그 누구도 못 했던 걸 네가 성공했다고?]

    “걔네가 못 했다고 나까지 못 하리란 법은 없잖아.”

    [어떻게, 어떻게 했다는 거냐!]

    절규에 가까운 아스트레일의 물음에, 백한영이 담백하게 말했다.

    “검신이라면 그 정도는 해야지.”

    [으아아아!]

    공포에 미쳐버린 아스트레일이 두 번째 반지를 작동시켰다.

    제국의 병기들과 강철의 병사들이 아스트레일의 주위를 가득 메웠다.

    거대 함선에 달려도 이상하지 않을 병기에 차례대로 마나가 주입되고.

    산을 부수는 포격이 한 점에 집중됐다.

    그리고.

    “진짜 귀찮게 하네.”

    백한영의 검이, 만년의 역사를 덮쳤다.

    *

    서울에 대규모 던전 브레이크가 열리고 하루 후.

    모든 소란이 마무리된 서울에 권왕, 윤한이 찾아왔다.

    “너는 어제 그 난리가 났었는데 또 수련이야?”

    “음.”

    수련실 중앙에서 검을 휘두르는 천진혁을 확인한 윤한이 졌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저 검에 미친 놈은 죽기 직전까지 수련을 할 생각인 듯했다.

    “이번에 활약했다며. 어땠어?”

    “강했다.”

    “확실히 강적이었던 거 같긴 하더라. S급 각성자···. 아. 백두 길드의 아저씨가 이번에 S급 된 건 알지?”

    “모른다.”

    “아무튼 그 아저씨랑 이초아가 달라붙었는데도 못 이겼으니, SS급은 되지 않았을까 싶은데.”

    말을 하면서도 윤한은 살짝 어이가 없어졌다.

    ‘또 강해졌어?’

    S급 두 명이 달라붙어도 못 이긴 상대를 단신으로 쓰러트린 천진혁에게 속으로 살짝 감탄한 후 윤한이 입을 열었다.

    “너랑 우리나라를 세계가 주목 중이더라. S등급 위에 SS등급을 신설해야 되는 거 아닌가 말이 많던데?”

    “흠.”

    윤한의 말에 천진혁은 별 반응 없이 재차 검을 휘둘렀다.

    ‘저놈이 이런데 관심이 있을 리가 없지.’

    작게 혀를 찬 윤한은 이내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그러고 보니 이번엔 백한영 씨 얘기가 안 들리던데, 뭐 아는 거 없어?”

    “없다.”

    “그래?”

    윤한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백한영 씨 정말 주목할 만한 거 맞아? 어째 그 뒤로 소식이 없는 거 같다.’

    그렇게 윤한이 백한영의 실력을 아주 살짝 의심하고 있었을 때.

    백한영은.

    “개나 소나 육체를 가진 상태로 차원을 넘어 다니는데, 술법사 놈들 왜 안 된다고 난리를 쳤던 거야. 이러면 내가 거짓말을 한 사람이 되잖아.”

    가상의 협곡을 누비며 중원의 술법사들을 사정없이 욕했다.

    나중에 이걸로 걔한테 한 소리 들으면 술범사놈들 찾아가서 갈궈야겠다.

    애초에 걔를 만날 일이 없긴 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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