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브레이크(4)
용인들의 나라, 만년제국 레티오르는 무(武)를 숭상하는 국가였다.
세상을 지배했던 인류와 그 위에서 군림하던 용(龍)을 두 주먹으로 때려죽여 버린 용인에서 시작된 나라인 만큼, 그들에게 육체를 단련하고 무공을 익히는 건 신성한 의식 같은 것이었는데.
고도로 발전하며 무공이 전부라는 인식은 옅어지긴 했지만, 나라의 근본이 근본인지라 어디서든 일정 이상의 무공을, 하물며 거대 함선의 함장 자리라면 더욱 무공을 따질 수밖에 없었고.
만년제국 레티오르의 제2함장, 락스일이 굉장히 뛰어난 창술사인 데에는 다 그러한 이유가 있었던 거다.
기경팔맥을 따라 전신에 내공을 퍼트린 락스일의 몸이 가속했다.
강환(罡丸)이 맺힌 락스일의 창이 허공을 꿰뚫자, 수만 마리의 벌 떼가 모인 거 같은 소음이 울려 퍼졌다.
반극낙일창. 1식.
일선천류.
콰아아앙!
창과 검이 만나며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음속에 도달한 창을 막기 위해 빠르게 검을 휘둘렀던 천진혁이 뒤로 한 걸음 물러나자, 락스일도 살짝 거리를 벌렸다.
[나쁘지 않군.]
“흠.”
천진혁과 락스일이 서로를 바라봤다.
인사차 가볍게 초식을 주고받았으니 다음에 할 일은 뻔했다.
락스일이 자세를 낮추고 내공을 끌어 올리며 말했다.
[이것도 따라올 수 있을지 궁금하군.]
락스일의 의식이 안쪽 깊은 곳으로 향했다.
사방에서 물이 쏟아지는 폭포 속. 그곳에 있는 물에 비친 태양을 꿰뚫은 창을 락스일이 잡은 순간.
그의 의식이 부상했다.
우웅―!
강기(罡氣)가 락스일의 창을 뒤덮었다.
강기가 뭉치고 얽혔다.
더 단단하게, 더 파괴적으로.
강기로 완전히 뒤덮인, 그의 심상을 본떠 만들어진 강기창을 집어 든 후 락스일이 말했다.
[지금부터는 조금 진심으로―.]
“이봐.”
락스일의 말을 끊은 천진혁이 똑같은 강기검을 만들어 내며 입을 열었다.
“그게 끝이라면 너무 실망인데.”
[······.]
락스일이 파안대소를 했다.
제2함장 자리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전투를 치르고, 얼마나 많은 차원을 짓밟고 다녔는가.
때론 마법을, 때론 초능력자를, 때론 초과학의 산물을 상대로 전투를 치렀던 락스일이었지만.
이렇게 다른 차원의, 정점에 오른 무인과 붙어보는 건 정말로 오랜만이었다.
[원한다면 그렇게 해줘야지.]
나직이 읊조린 락스일이 강기창을 허공에 띄운 후 내면의 세계로 들어갔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수면에 꽂혀있는 심상의 창에 손을 가져다 댄 락스일은.
그대로 심상의 창을 거세게 뽑아 들었다.
우우웅―!
락스일의 빈손에 창 한 자루가 만들어졌다.
의념을, 심상을 재료 삼아 만들어진 심상병기(心像兵器), 낙일창(落日槍)을 붙잡으며 락스일이 말했다.
[이게 네가 그토록 원하던 내 진심이다. 받아 봐라.]
이기어창(以氣馭槍)의 묘리로 강기창을 조종한 락스일이 손에 쥔 심상병기를 천천히 움직였다.
락스일이 익힌 무공의 이름은 반극낙일창(反極落日槍)으로, 먼 옛날 용들의 왕 중 하나를 땅에 떨어트린 창술이었다.
반극낙일창의 창시자가 바란 건 간단했다.
자신들을 억압하는 하늘을 부수는 것.
그러한 결심하에 창시된 반극낙일창이 추구하는 바는 하나였다.
하늘을 부수기 위해선 하늘에 닿을 필요가 있었고.
위에 고고히 떠 있는 해를 땅에 떨구기 위해선, 해에 닿을 필요가 있었다.
때문에 반극낙일창의 초식은 후반으로 갈수록 간략해졌다.
처음엔 천 개의 창로로 적을 꿰뚫는 1초식에서 시작하지만, 2초식에선 그 반을, 3초식에선 또 반을 줄여나가다 결국 하나의 창로만 남겨 최단 루트를 찾아내는 방식으로.
하늘과의, 해와의 거리를, 좁히는 방식으로.
락스일의 혈도를 타고 내공이 거세게 순환했다.
이기어창의 묘리로 강기창을 선두로 세운 락스일이 심상병기로 천진혁 겨눴고.
심상병기, 낙일창에 담겨 있던 의념이 폭발하듯 증폭됐다.
그리고.
락스일과 천진혁 사이의 거리가, 반으로 접혔다.
반극낙일창. 진오의.
쌍선이극.
창에 담긴 개세적인 힘에 짓눌려 주변의 땅이 움푹 팼다.
두 개의 창을 쥔 락스일의 몸이 천진혁을 향해 빠르게 쏘아졌다.
동시에.
천진혁의 의식이 내면으로 가라앉았다.
칠흑보다 어두운 깜깜한 세상. 그곳에서 유일하게 빛이 비치고 있는 곳에 천진혁의 시선이 닿았다.
스포트라이트처럼 빛이 내려앉은 곳에는 묘비가 있었는데, 그 묘비에 완전에 한없이 가까운 검이 꽂혀있었다.
묘비에 다가간 천진혁은 그곳에 적혀있는 글자를 천천히 읽어 내렸다.
천태진. 참 오랜만에 보는 이름이었다.
아버지의 이름이 적힌 묘비를 쓸어내린 천진혁이 이내 상념에 잠겼다.
천태진, 천진혁의 아버지는 광인(狂人)이었다.
천진혁의 아버지는 검에 미친 인간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조금 달랐다.
그냥 미쳐있는 인간. 천진혁은 천태진을 그렇게 표현하고 싶었다.
현대인을 기준으로 검에 미쳐있는 인간은 보통 한가지였다.
스포츠로 전락해 버린 검술을 과거로 돌리기 위해 평생을 바치는 사람. 보통 이 정도가 검에 미쳐있는 인간일 것이었다.
그에 반해 천태진은 어땠냐면, 그도 과거의 실전성 넘치는 검술을 파고들긴 했다.
파고들긴 했지만.
이게, 목적이 남들과는 조금 달랐다.
과거의 영광을 복원하고 뼈와 살을 깎아내며 검술을 익혔던 천태진의 목적은 하나였다.
그는 세상을 베고 싶었다.
산을 베고 바다를 가르고.
밤하늘의 달을 베고 싶었다.
신비의 흔적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던 세상에서 천태진은 진심으로 그러한 꿈을 꾼 것이다.
미치광이라고 부르는 게 어떻게 보면 온전한 처사일 수도 있었다.
8년 전 게이트가 열린 후 천태진 같은 꿈을 꾸는 사람이 조금 늘어나긴 했지만, 그가 목을 매달고 자살한 건 그보다 조금 앞선 12년 전. 선지자는 언제나 고독한 법이었다.
천진혁은 생각했다.
만약 게이트가 열린 8년 전까지 천태진이 목을 매달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살아있었을까?
꿈을 이뤘을까?
그에 대한 천진혁의 대답은 명확했다.
절대 아니었다.
천진혁이 보기엔 그의 아버지에겐 이상향에 도달할 만큼의 재능이 없었다.
천태진에게 오랫동안 직접 가르침을 받았기에 잘 알았다.
자신의 꿈이 망상에 불과했다는 것에 절망한 남자가 자신의 재능에 절망하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결국 목을 매다는 건 똑같았을 것이다.
결과가 똑같다면, 과연 천태진은 언제 목을 매달았을까?
그에 대한 천진혁의 대답도 명확했다.
아마, 천태진이 꿈에 그리던 경지에 천진혁이 오르는 순간 목을 매달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만약 천태진이 살아있었다면, 천진혁은 다음 경지에 오르는 걸 망설였을까?
영원히 제자리에 멈춰있었을까?
아니. 그럴 리가.
아버지가 목을 매달 거라는 걸 직감 했음에도 천진혁은 망설임 없이 지금과 같은 선택을 했을 거다.
그도 그럴 게 천진혁도 천태진과 같은.
검에 미친 광인(狂人)이었으니까.
묘비에 꽂혀있던 완전의 검을 붙잡은 천진혁이 그대로 검을 뽑아 들었다.
우웅―!
천진혁의 마나가 움직였다.
천진혁이 익힌 검법의 이름은 무상검법(無上劍法).
각성 능력은 아니었다. 이건 천진혁이 각성자가 되기 전부터 익히고 있던 검법이다.
무상검법의 창시자가 품은 소망은 단 하나였다.
세상을 베고 싶다.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 창시자가 고른 도구의 이름은.
무상(無上). 위가 없으니 올라갈 곳이 없고, 결점이 없다는 뜻이었으니.
이를 세간에선, 천의무봉의 경지라고 불렀다.
완전의 의념이 담긴 심상병기(心像兵器), 무상검(無上劍)이 나선의 핵을 향해 천천히 움직였다.
완전하다는 건 바꾸어 말하면 자신 외의 타인은 전부 불안전하다는 것.
완전과 불안전이 부딪혀서 무너지는 게 어떤 것일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공간을 격하고 날아온 두 자루의 창을 바스러트린 무상검이 그대로 앞을 베며 지나갔다.
영겁과도 같은 시간이 흐르고.
쿨럭.
누군가 피를 토했다.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무릎을 꿇은 락스일이 믿기지 않는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설마 이 내가 질 줄이야.]
황제를 제외하곤 적수가 없었던 락스일인 만큼 이번의 패배가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패배를 인정하나?”
[패배?]
락스일이 죽어가는 몸을 아랑곳하지 않고 크게 웃었다.
락스일이 외쳤다.
[패배? 확실히 난 너에게 졌지. 하지만 그게 패배를 의미하는 게 아니야!]
“그게 무슨 소리지?”
[나는 졌다. 하지만 내 동료가, 나의 주군이 너희를 전부 잿더미로―!]
죽기 직전의 락스일이 만년제국 레티오르가 자랑하는 제1함선에 무장된 무기들을 떠올리며 그렇게 소리쳤을 때였다.
콰아아아앙―.
저 멀리 하늘 위에서 무언가 박살 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락스일이 멍하니 입을 벌리고 머리 위를 쳐다봤다.
뭔가,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
만년제국의 현황제 아스트레일는 앞의 건방진 인간 하나를 바라봤다.
보잘것없는 문명의 차원인 줄 알았는데, 단신으로 하늘 위 함선까지 올 수 있는 녀석이 있었을 줄이야.
살짝 다시 봤다.
“너네 왜 남의 세계에 와서 이러는 거야. 여기 뭐가 있다고.”
[뭐가 있냐고?]
인간, 백한영의 말에 아스트레일이 상대의 인식을 재차 수정했다.
[간만에 재미있는 장난감을 발견한 줄 알았는데, 자기들이 뭘 소유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버러지였군. 역시 너네에겐 너무나 아까운 보물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뭘 가지고 있냐니―.”
[흥이 식었다. 해치워라.]
아스트레일의 명령에 제3, 4, 5함장을 비롯한 수많은 전투원이 백한영에게 달려들었다.
아스트레일이 지상을 바라봤다.
제2함장의 활약을 지켜보고 이 세계의 원주민이 어떤 실력을 가지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는데.
“야.”
그런 아스트레일의 귓가에 섬뜩한 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다급히 고개를 든 아스트레일의 시야에 주변 풍경이 들어왔다.
아스트레일이 눈을 끔뻑였다.
함선 위에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 아무것도.
함장도, 승무원도 전부 사라진 함선 위에서 아스트레일이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대체 무슨 일이···?]
“물어본 말에 대답은 안 하고 헛소리만 하네. 안 되겠다 너네는. 좀 혼나자.”
탓. 갑판을 박차고 뛰어오른 백한영이 그대로 함선의 최선두로 이동했다.
약간의 내공을 모은 백한영은 그대로 다리로 내공을 보낸 후, 그대로 사량발천근(四兩撥千斤)의 묘리를 살짝 밀었다.
천근이라고 퉁치기엔 지나치게 무거워 보이긴 했지만, 뭐 밀리기만 하면 그만 아니겠는가.
콰아아아앙!
거대한 폭음이 들리며 함선이 게이트 내부에 꾸겨 넣어졌다.
반쯤 박살 난 함선 위에 착지한 백한영이 이내 망연자실하고 있는 아스트레일에게 말했다.
“그래서 우리 세상에 있는 보물이 대체 뭔데. 너만 알지 말고 같이 좀 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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