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브레이크(3)
백한영이 사준 치킨을 배불리 먹고 모텔에서 하룻밤을 잔 홍유진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선언했다.
“오늘 내로 집부터 구하자. 덤으로 방송 장비도 미리 봐놓고.”
“그래서 그놈의 인터넷 방송이 뭐냐니까?”
“나중에 얘기해 줄게.”
용사파티의 재정 및 관리를 맡고 있는 엘레나 크레프트의 말에 홍유진은 그렇게 대답한 후 그냥 도적, 이엘을 데리고 밖으로 나섰고.
“뭐야 이거.”
거리를 뒤덮는 사이렌을 맞이할 수 있었다.
처음 겪어보는 일에 당황했던 홍유진은 이내 정신을 차렸다.
잘은 모르지만 지금이 긴급 사태라는 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꺄아아악!
사람들의 비명에 홍유진은 반사적으로 이엘을 바라봤다.
홍유진이 시선이 닿기도 전에 땅으로 꺼지듯 사라진 이엘은 비명이 들린 곳에 등장하며 단검을 뽑아 들었다.
파지직!
뇌전을 머금은 단검이 사람을 습격하던 몬스터를 베고 지나가며 감전을 일으켰다.
몸이 굳은 몬스터의 머리에 마찬가지로 뇌전이 담긴 이엘의 발이 꽂혔고.
펑!
풍선 터지는 소리와 함께 몬스터의 시체가 땅에 널브러졌다.
“괜찮으세요?”
“네? 네. 괜찮아요.”
시민의 안전을 확인한 이엘이 작게 중얼거렸다.
“네 고향은 평화로운 곳이라며.”
“나도 그럴 줄 알았어.”
뒤늦게 따라온 홍유진이 힘없이 대답했다.
귀환하자마자 S급 몬스터와 싸우지 않나, 도시에 몬스터가 쏟아지지 않나.
어떻게 보면 이세계가 더 평화로웠던 거 같기도 했다.
‘그건 아닌가.’
홍유진은 경찰관에게 시민을 인계한 후 주위를 훑어봤다.
아직도 몬스터가 널려 있었다.
그때. 꺄아악―. 어린 소녀의 비명이 홍유진의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반사적으로 앞으로 뛰쳐나간 홍유진은 비명이 들린 곳에 도착하자마자 성검을 꺼내 빠르게 몬스터를 베었다.
캬아아아악!
오른팔에 기다란 자상이 남은 몬스터가 괴성을 지르며 홍유진을 노렸지만.
서걱.
능숙하게 공격을 피한 홍유진이 휘두른 성검에 목이 달아나고 말았다.
“아이고 죽겠다.”
얼굴에 튄 몬스터의 피를 닦아내는 홍유진에게 이엘이 다가와 물었다.
“괜찮아?”
“내 짬이 얼마인데. 이 정도는 가뿐하지.”
홍유진은 호흡을 가다듬은 후 입을 열었다.
나는 괜찮으니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라고 말하기 위해서였는데.
콰아아아앙.
저 멀리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거대한 폭음에 홍유진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이엘.”
“응.”
이엘이 홍유진을 품에 안고 땅을 박차고 하늘을 날았다.
얼굴을 때리는 바람을 뚫으며 현장에 도착한 홍유진과 이엘은 용대하의 심장을 반으로 쪼개기 직전인 용인을 발견할 수 있었고.
파지지직!
곧바로 막아냈다.
“당신들은···?”
“지나가던 행인입니다.”
이초아와 인사를 마친 홍유진은 용인을 막아내고 돌아온 이엘과 함께 적을 살펴봤다.
3m에 가까운 덩치, 단련된 근육, 단단한 비늘, 날카로운 창 등. 용인의 특징은 다양했지만, 홍유진의 신경을 거슬리게 한 건 딱 한 가지였다.
‘강해.’
용인이 품고 있는 거대한 힘을 파악한 홍유진은 흘긋 시선을 돌려 용대하와 김영운을 바라봤다.
전투불능인 것과 별개로, 둘과 용인 사이엔 어마어마한 수준 차이가 있었다.
홍유진이 말했다.
“혹시 이곳에 올 만한 사람 없습니까?”
“없는 거 같아요.”
이초아의 말에 홍유진이 표정을 굳혔다.
‘안 좋은데.’
홍유진이 파악하기론 일단 이초아의 힘으로 용인을 쓰러트리는 건 불가능했다.
이엘도 있긴 했지만, 솔직히 이엘이 전투에 특화된 게 아니라. 기습에 실패한 순간 이미 가치가 반 이하로 떨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너는 뭐지?]
“지나가던 행인이라니까 그러네.”
[확실히 그렇군. 상대하기엔 수준이 너무 떨어져.]
용인의 말을 들으며 홍유진은 생각했다.
사실 내가 이세계에 전이돼 용사 노릇을 한 건, 지구를 위기로부터 구하고 싶었던 거대한 의지의 발현이 아니었을까?
확률 같은 게 아니라.
그게 아니면 귀환하자마자 이렇게 일이 펑펑 터질 리가 없잖아.
진짜 세상은 왜 이렇게 나를 못 괴롭혀서 안달인 걸까. 도무지 알 수가 없네.
홍유진이 고개를 들었다.
용인과 이곳에 있는 사람들 간의 격차는 명백했다. 아마 쓰러져 있는 두 사람이 멀쩡히 회복된다고 해도 용인을 쓰러트리는 건 불가능할 것이었다.
그렇다고 지원군이 있냐?
그게 아니라는 건 방금의 대답으로 확인받았다.
패가 이미 정해져 있고, 보유한 카드를 어떻게 조합하든 상대를 이기는 게 불가능하다면.
방법은 하나뿐.
조커가 등장할 시간이다.
마음을 굳힌 홍유진이 한 발짝 앞으로 걸어 나갔다.
“하지 마.”
이엘이 홍유진을 제지했다. 그가 뭘 하려고 하는 건지 눈치챈 것이다.
“약속했지. 다시는 안 쓰겠다고.”
“이엘.”
홍유진이 쓰게 웃었다.
확실히 홍유진은 이엘과, 용사파티의 멤버들과 약속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다시는 성검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하지만 당시, 마왕을 죽인 직후, 승리의 기쁨을 만끽해야 될 그 순간에, 다 죽어가던 몸을 부여잡고 약속을 하면서도 홍유진은 생각했었다.
언젠가 써야 될 때가 온다면, 망설이지 않고 성검을 쓰지 않을까, 라고.
그리고 실제로 홍유진의 생각이 맞았다.
이렇게 써야 될 타이밍이 오니까 결국 앞으로 나서는 걸 보면.
“조금만 쓸게.”
홍유진이 성검을 꺼내 들었다.
[음?]
용인의 표정이 바뀌었다. 홍유진의 기세가 달라진 걸 느낀 것이다.
홍유진은 딱히 자신만이 세상을 구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스스로가 정의롭다고 믿는 부류도 아니었다. 홍유진에게 정의란 따끈한 치킨 정도밖에 없었다.
홍유진이 먼 옛날, 보육원에서 추운 겨울을 보냈을 때부터 만들었던 룰은 간단했다.
하나를 받았으면 하나를 준다.
그게 은이든 원이든 받았다면 그만큼 돌려준다.
아무것도 주지 않고, 하지 않고 무언가를 요구하는 건 양아치 짓이다.
반대로 무언가를 받았음에도, 보답하지 않는 것도 사람의 도리가 아니다.
그러한 연유로 홍유진은 지금 딱 받은 만큼 일을 하려는 중이었다.
고마운 줄 알아 이 녀석들아.
너네가 치러야 될 값을, 대신 치러준 사람이 있으니까.
빛이 모였다.
별의, 신의, 생명의 빛을 닮은 광휘가 성검에 모였다.
[잔재주를!]
용인이 홍유진에게 달려들었다.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알아챈 것이다.
파지직!
이엘이 입술을 깨물며 용인을 막아섰다.
눈물을 흘리진 않았다.
눈물 같은 건 이미 진작에 다 쏟아낸 후였으니까.
‘빨리 끝내자.’
속으로 한숨을 내쉰 홍유진이 정신을 집중했다.
촤르륵.
쇠사슬 소리가 들렸다. 지긋지긋한 운명의 천칭이 찾아온 것이다.
[소망을 말해라.]
늘 듣던 음성에 홍유진이 천천히 입을 열었고.
동시에.
“웬 도마뱀이 걸어 다니는군.”
허공에서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콰아앙!
용인의 머리에 강기(罡氣) 다발이 떨어졌다.
이엘과 대치하다 말고 다급히 강기 다발을 막아낸 용인이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네놈은 누구냐.]
“알 거 없다. 도마뱀”
[네놈.]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도발에 성공한 남자를 보며 홍유진이 운명의 천칭을 돌려보냈다.
‘이 세계에도 용사가 있긴 했구나. 난 또 내가 다 해야 되는 줄 알았네.’
안심한 홍유진이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린 순간.
남자, 검신 천진혁이 검을 들며 말했다.
“바쁘니 빨리 끝내자.”
직후.
용인의 창과 천진혁의 검이 소닉붐을 일으켰다.
*
시간을 조금 돌려 긴급 경보 사이렌이 막 울렸을 때.
백한영에게 이초아가 말했다.
“백한영 씨 여기는 괜찮으니까 얼른 가보세요.”
“아. 네. 알겠습니다.”
안 그래도 뛰쳐나갈 준비를 하고 있던 백한영은 이초아의 말에 바로 목적지를 향해 빠르게 날아갔다.
허공을 밟으며 방송국에 도착한 백한영은 건물 앞에서 시위하던 몬스터들을 반으로 갈라버린 후 안으로 들어갔다.
방송국 내부는 어수선했다. 국가중요시설인 덕에 상시 대기하는 각성자가 있긴 했지만, 그거랑 별개로 긴급 사태가 터지니 사람들이 불안에 빠진 것이다.
방송국 로비를 가로지른 백한영은 익숙한 기척이 있는 곳으로 가 손을 흔들었다.
“은하야.”
“오빠? 오빠가 여긴 왜 있어.”
“근처 지나가다가 걱정돼서 들렸어.”
근처라기엔 꽤 떨어진 곳에서 달려온 거긴 했지만.
백한영의 말에 백은하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게 아니라 내 말은, 유림 언니랑 같이 있었을 거 아니야. 언니는 어디 두고 오빠만 여기 있어?”
“다른 사람한테 맡겼어. 이초아 씨 알지? S급 각성자. 그러니까 괜찮아.”
“그럼 다행인데···.”
오빠가 무사한 걸 확인해 내심 안심이 된 백은하가 입을 열었다.
“봐서 알겠지만 나는 괜찮아. 근데 오빠 이러고 있어도 돼?”
“뭐가?”
“그러니까. 여기에 있어도 되냐고.”
백한영이 식물인간 상태에서 깨어난 후 벌인 일을 백은하가 전부 아는 건 아니었지만, 나름 꽤 많이 알았다.
다 체쳐놓고 몇십, 몇백억이라는 돈을 팍팍 벌어오는 시점에서 백은하는 백한영이 A급에서 S급 사이의 실력자가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하고 있었는데.
오빠가 위험에 빠지는 건 싫었지만, 그렇다고 오빠 정도의 실력자가 대피소에만 있는 것도 문제가 있지 않나 싶었던 것이다.
“괜찮냐고?”
“응.”
“어···. 안 괜찮네?”
“안 괜찮아?”
저 멀리에 용인이 막 등장했을 때 백한영이 꺼낸 말이었다.
용인의 실력과 대치 중인 각성자들 사이에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었기에 그런 소리를 한 건데.
“아닌가? 괜찮나?”
이건 홍유진이 성검을 소환했을 때 꺼낸 말이었다.
자꾸 왔다 갔다 하는 백한영에게 백은하가 기어코 한마디 했다.
“안 괜찮다는 거야 괜찮다는 거야. 왜 자꾸 말이 바뀌어.”
“이게 진짜 안 괜찮았다가 괜찮아져서 그래.”
“그래? 지금은 어떤데.”
“지금?”
백한영은 용인이 있는 곳을 재차 살펴봤다.
“확실히 괜찮네. 여기 있어도 되겠다.”
검신 천진혁의 등장에 백한영이 그렇게 말하자, 백은하가 미심쩍은 눈을 했다.
가만히 서서 괜찮다, 안 괜찮다, 괜찮다 계속 말이 바뀌는데 이상하게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진짜 안 도와주러 가도 돼?”
“괜찮아.”
백한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천진혁과 용인 창술사의 실력 자체는 비슷해 보였지만, 괜찮았다.
검신 딱지가 붙었으면 저 정도는 알아서 해야지.
아니면 나한테 돌려주든가.
‘그나저나.’
백한영이 고개를 들고 위를 바라봤다.
“오빠 왜?”
오빠를 따라 방송국 천장을 바라보며 백은하가 묻자, 백한영이 말했다.
“착각이 아니었네. 잠깐 있어봐 은하야.”
“어? 오빠?”
당황하는 백은하를 뒤로한 채 방송국 밖으로 나간 백한영이 가볍게 발을 굴렀다.
끝을 모르고 위로 올러가던 백한영은 이내 구름을 넘어 성층권을 돌파했고.
은하수를 배경으로 생성된 거대한 게이트와, 그 안에서 튀어나오고 있는 함선의 뱃머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함선 위에 착지한 백한영이 그 위에 서 있던 용인들에게 물었다.
“너네 뭐하냐?”
그 말에 용인들의 최선두에 있던 만년제국의 황제가 크게 웃었다.
재미있는 장난감을 발견한 어린아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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