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친구, 그리고(2)
변명을 하나 하자면 이초아는 절대로 백한영을 몰래 따라다닐 생각이 없었다.
S급 각성자라는 지위와 스스로의 외모에 자신 있는 이초아가 남자 뒤꽁무니를 몰래 쫓아다닌다?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이게 살다 보면 예상 밖의 일이 벌어지는 법이었다.
모든 건 간만에 외출을 한 이초아가 백한영을 발견한 것에서부터 시작됐다.
안 그래도 어떻게 밥을 산다고 할까 고민이었던 이초아는 잘됐다 싶어 백한영에게 말을 걸려 했고.
“한유림 씨? 미리 와 있으셨네요? 약속 시간까지 아직 10분 정도 남았는데.”
“방금 왔어요.”
“영화는 근데 갑자기 왜 보자고 하신 거예요?”
“모르셨어요? 이 영화 은하도―.”
기둥 뒤로 냉큼 숨었다.
그 뒤로는 뭐, 유지아와 비슷했다.
영화를 보고(팝콘을 안 좋아해서 콜라만 마셨다), 카페에 가고, 악세사리 매장에 갔다가.
고깃집까지 따라왔다.
몰래 따라다닌 거 맞지 않아? 라고 묻는다면, 맞다. 몰래 따라다녔다.
근데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세상이 등을 떠밀었다는, 그런 얘기를 이초아는 하고 싶었던 거다.
“누구도 등 떠민 사람 없지 않아요? 게다가 옆집이면 그냥 초인종 누르고 가서 말 걸면 되잖아요.”
“···조용히 해요. 댁은 뭔데요?”
“저요? 저는.”
이번엔 유지아가 멈칫했다.
살짝 시선을 돌리며 유지아가 말했다.
“친구 오빠? 동생 친구?”
“아는 오빠면 아는 오빠지 친구 오빠는 뭐예요. 별로 친하지도 않은 사람을 왜 몰래 따라다녔데.”
“그건 제가 할 말이에요. 그리고 저희 친해요. 저번에 같이 승급 시험 교관도 했어요.”
“저도 저번에 같이 월드 게이트 공략했어요.”
이초아와 유지아가 서로를 쳐다봤다.
‘만만치 않네.’
‘만만치 않아.’
상대가 호적수라는 걸 인정한 것이다.
대체 뭐가 호적수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랬다.
이초아와 유지아는 얘기를 더 꺼내기 위해 입을 열었다가, 바로 닫았다.
“한영 씨는 배우 할 생각은 없어요?”
“지금은요. 연기에 그다지 자신이 없어서요.”
둘의 타겟이 어느새 대화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래요? <여름에 피는 꽃>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배우 1위가 한영 씨던데. 자신을 가져도 되는 거 아니에요?”
“그건 여러모로 특수한 상황이 겹쳐서 가능했던 거라. 제 실력은 아니에요.”
“아닌데. 연기 잘하던데.”
“무슨 연기요?”
“바빠 보이는 연기 잘하시던데요?”
식은땀을 한 방울 흘리는 백한영.
한유림이 웃으며 말했다.
“농담이에요.”
이초아와 유지아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저 한유림이라는 여자가 살짝 거슬렸다.
이초아가 물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물었다.
“저 사람은 누구길래 백한영 씨랑 계속 저러고 있는 거죠?”
“영화배우 한유림이에요. 그것도 모르고 몰래 따라다녔어요?”
“제가 아는 사람은 백한영 씨니까요. ···몰래 안 따라다녔다니까요.”
이초아의 말에 유지아가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짓고는 말했다.
“본인이 아까 따라다녔다면서요.”
“뭘 들은 거예요. 말을 걸려다가 ‘잠깐만요.’ 타이밍을 놓쳤다니까요?”
“그러면 지금 가서 말을 걸던가요. ‘무슨 일이에요 한영 씨?’ 아직도 타이밍이 아니에요?”
“···식사 중이잖아요.”
진짜 잠깐만요.
한유림에게 양해를 구한 백한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소곤거리는 이초아와 유지아에게 다가갔다.
백한영이 말했다.
“저기, 두 분?”
“······.”
“······.”
“혹시 저한테 볼일이 있나요?”
유지아와 이초아가 고개를 숙였다.
스토킹은 범죄입니다. 주의해 주세요.
*
완벽하게 구워진 고기가 담긴 접시로 테이블이 가득 찼다.
백한영은 깻잎에 마늘과 소스를 듬뿍 찍은 고기를 얹어 입에 집어넣었다.
간만에 먹는 맛있는 음식에 행복한 표정을 지은 백한영은 깻잎을 또 집어 들려다가, 손을 책상 밑으로 내렸다.
테이블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백한영은 눈동자만 굴려 테이블을 살펴봤다.
우선 옆에는 한유림이 앉아 있었고, 맞은 편엔 유지아와 이초아가 나란히 앉아 있었는데.
전부 고기를 먹지도 않고 생각만 골똘히 하고 있었다.
‘별로 안 친한 사람들을 괜히 합석시켰나?’
백한영은 아까 전의, 그러니까 영화관에 들어가기 전의 일을 떠올렸다.
그때도 유지아와 이초아가 근처에 있는 건 알았지만, 저 사람들도 올 정도로 앞으로 볼 영화가 인기가 많구나 하고 넘어갔었다.
하지만 이렇게 고깃집까지 따라온 걸 보고 볼 일이 있나 싶어 말을 걸었는데.
지금 분위기를 보면 실수인 듯했다.
잠깐 고민한 백한영은 이내 깻잎을 다시 집었다.
분위기는 분위기고 고기는 고기지.
식기 전에 먹자.
유지아는 애꿎은 젓가락만 만지작거리며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창피해!’
이런저런 핑계를 댔지만 결국 남을 몰래 따라다녔다는 걸 잘 알고 있었는데, 하물며 들키기까지 했으니. 이만저만 창피한 게 아니었다.
이초아도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그래도 대화할 기회가 만들어지긴 했네.’
물론 그 속내는 유지아와 정반대였다.
이러면 자연스럽게 월드 게이트 때의 얘기를 꺼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인데.
그 짧은 순간에 이미 스토킹을 한 게 아니라 보답을 하고 싶어서 따라다닌 거라고 합리화를 끝내버린 이초아였다.
“한영 씨 어때요? 맛있어요?”
“맛있네요.”
“알만한 사람들은 아는 맛집이에요. SNS에 입소문이 퍼지면 웨이팅이 엄청 길어질 걸요?”
한유림은 어땠냐면, 잠시 당황하긴 했지만 곧장 정신을 차렸다.
이상한 사람들이 끼어든 건 끼어든 거고 할 일은 해야지.
어떻게 잡은 약속인데 이대로 허무하게 날릴 수는 없었다.
“거기 두 분은 어때요? 음식이 입에 좀 맞나요?”
“네. 뭐. 맛있네요.”
어영부영 대답한 후 이초아가 고기를 한 점 입에 집어넣었다.
한유림은 이번엔 유지아를 보며 말했다.
“제가 사는 거니까 편하게 드세요.”
“···아뇨. 사주실 필요는 없어요. 각자 내죠.”
“귀찮게 그럴 필요 있나요. 그냥 제가 사드릴게요. 백한영 씨 지인들이기도 하고.”
한유림이 사주는 밥을 먹고 싶지 않았지만, 거부할 명분이 없었기에 유지아는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유림은 옆에 놓인 물을 한 잔 마신 후 입을 열었다.
“두 분 다 각성자시죠? 이초아 씨는 저도 알아요.”
“맞아요.”
“그러고 보니 한영 씨도 각성자셨죠. 연기했던 모습이 너무 강하게 남아서 까먹고 있었지 뭐예요.”
“일단은 각성자가 본업입니다.”
백한영의 말에 꺄르르 웃는 한유림.
유지아가 정색하며 한유림을 쳐다봤다.
방금 어디에 웃을 포인트가 있었던 거지?
이해가 안 되네.
백한영의 어깨를 살짝 두들기며 웃는 한유림에게 유지아가 말했다.
“아까 보니까 백한영 씨 동생 얘기를 그렇게 많이 하던데, 아는 사이세요?”
“은하가 연예인 됐을 때부터 알고 지내서요. 꽤 친해요.”
“연예인이 됐을 때부터요.”
그러면 아무리 길어 봤자 7년 정도 알고 지냈다는 건데.
7년? 유지아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고작 7년 알고 지낸 걸로 유세를 떤 게 가소로운 것이다.
한유림이 살짝, 아주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갑자기 쟤가 왜 저러지?
신경을 긁는 유지아의 행동에 한유림이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이런 우연이 있네요. 어떻게 저희랑 동선이 딱 겹칠 수 있죠?”
“···그러게요.”
볼일이 있는 거 아니냐는 백한영의 말에 유지아와 이초아는 우연히 동선이 겹쳤다고 변명을 했는데, 그걸 지금 한유림이 꼬집고 있는 것이다.
어디서 되도 않는 거짓말을 하고 있냐고 말이다.
한유림이 가득 미소를 지었다.
교양인답게 굳이 건드릴 필요가 없는 화제를 언급하지 않고 있었는데, 유지아 쪽에서 저렇게 나오면 얘기가 달라졌다.
안 그래도 한영 씨와의 식사 자리가 망가져서 짜증 나는데, 꼬맹이가 어디서.
그 말에 유지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비록 자기가 먼저 시작했다고 해도 가만히 맞고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아니. 애초에 시작도 한유림이 먼저 했다.
진짜로.
“한유림 씨가 출연한 영화를 보다가 동선이 겹친 건데, 신기할 것도 없지 않아요? 영화가 워낙 재밌어서 본 사람이 그렇게 많은데 우연히 같은 시간에 볼 수도 있죠.”
“어머. 제 영화를 재밌게 보셨나 봐요?”
“네. 한유림 씨 연기가 아주 일품이더라고요. 막 여우같이 남자 주인공을 홀리는 게 아주.”
“···제가 맡은 배역은 첫사랑 역할이라 딱히 여우 같이 주인공을 홀리지 않았는데요?”
한유림의 지적에 유지아가 생각지도 못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요? 주인공의 가족 얘기까지 하면서 꼬시길래 전 영락 없이 불여우 캐릭터인 줄 알았어요.”
실제로 한유림이 맡은 배역이 주인공에게 가족 이야기를 하긴 했다.
하긴 했는데.
지금 그 말을 하는 게 아니라는 걸 한유림도, 유지아도 잘 알고 있었다.
한유림이 작게 웃음을 터트리고는 물었다.
“유지아 씨, 올해로 몇 살이죠?”
“제 나이는 왜요? 한유림 씨보단 적어요.”
“아뇨. 뭔가 어른스러워서요. 요즘 애들 같지 않은 게, 참 보기 좋네요?”
“감사해요. 한유림 씨 같은 어른이 되는 게 늘 꿈이었어요.”
하하호호 말하고 있음에도 왠지 모르게 숨 막히는 상황에 백한영의 주변 테이블이 조용해졌다. 동시에.
“여러분. 밥 안 드세요?”
백한영이 입을 열었다.
그 말에 뜨거워지려던 분위기가 단숨에 가라앉았다.
잠깐 휴전이라는 듯 서로를 흘겨보고는 고기를 먹기 시작하는 유지아와 한유림.
고기를 세 점 정도 먹은 후 한유림은 생각했다.
이게 아닌데.
처음에 세웠던 계획이 자꾸만 꼬이는 느낌이 들었다.
원래는 좋은 분위기···는 고깃집에 온 순간 깨지긴 했는데, 아무튼 백한영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눌 예정이었는데.
저 둘이 끼어들며 전부 어그러졌다.
이대로는 안 된다는 걸 깨달은 한유림이 다급히 말했다.
“한영 씨 조금 있다가 PC방이라도 갈까요?”
“갑자기요?”
“언젠가 한번 가보고 싶었는데, 한영 씨랑 같이 가면 편할 거 같아서요.”
“흐음.”
한유림의 말에 백한영이 살짝 흥미를 보였다.
별 이유는 아니고, 그냥 요즘도 간간이 접속하는 MMORPG 창천지로의 PC방 이벤트 때문에 그랬다.
PC방 이벤트에서 돈으로도 못 구하는 유일 스킬이 랜덤으로 뜬다던데.
한번 가보긴 해야 되지 않을까?
그렇게 백한영이 PC방에 가려는 마음을 반쯤 굳혔을 때, 유지아가 웃으며 말했다.
“PC방이요? 좋네요.”
“···유지아 씨는 뭐죠?”
“같이 밥 먹은 것도 인연인데, 여기서 헤어지는 건 아쉽잖아요. 그쵸? 이초아 씨?”
혼자는 버겁다고 생각했는지 이초아와 임시 동맹을 맺는 유지아.
갑자기 이름이 불린 이초아가 고기를 먹다 말고 눈을 깜빡였다.
“PC방이 뭔가요?”
참고로 말해주자면, 그녀는 컴맹이었다.
동맹군이 허무하게 침몰하는 걸 보며 비통한 표정을 짓는 유지아와 승리의 미소를 짓는 한유림.
그리고 빨리 PC방에 가서 이벤트 뽑기를 해보고 싶은 백한영까지 섞인 환장의 파티가 진행되고 있는, 그 순간이었다.
애앵―!
고깃집에, 아니. 서울 전역에 사이렌이 울려 퍼졌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이초아와 유지아가 서로를 바라봤다.
원인은 알 수 없지만, 긴급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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