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레귤러(6)
놀이공원에 온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백한영은 예전 기억을 떠올렸다.
어린 백은하와, 이제는 얼굴조차 흐릿한 부모님과 함께 놀이공원에 놀러 왔던 기억을.
그때는 참 재밌었는데.
은하가 이번에도 그때처럼 좋아해 줬으면 좋겠네.
그렇게 백한영이 옛 추억을 더듬거리고 있을 때였다.
“오빠.”
백은하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어. 은하야. 왜.”
“내가 오빠랑 이 나이 먹고 놀이공원 오는 것까진 오케이였거든? 근데 이건 아니야.”
백은하가 눈앞의 놀이기구를 잠깐 올려다봤다가, 다시 고개를 내린 후 중얼거렸다.
“진짜 아니야.”
백은하의 말에 백한영도 마찬가지로 눈앞의 놀이기구를 바라봤다.
말이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백한영이 이해가 안 간다는 말투로 말했다.
“저게 왜?”
“진짜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야?”
“예전엔 좋아했잖아.”
“대···체 언제 적 얘기를 하는 거야.”
순간 목소리가 커질 뻔했던 백은하는 주변에 사람이 많다는 걸 상기하고 화를 가라앉혔다.
짧게 심호흡을 한 백은하가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회전목마에 타도 되는 건 초등학교 고학년 때까지야. 그 뒤로는 안 돼.”
“저기 어른들도 많은데?”
“딱 봐도 가족 단위고 자식들 태우는 김에 같이 탄 거잖아. 아무튼 안 돼.”
“오빠도 가족인데?”
시무룩한 백한영의 말에 백은하가 단호히 말했다.
“절대 안 돼.”
그로부터 5분 후.
백은하는 목마에 올라타 빙글빙글 돌았다.
“은하야!”
밖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백은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작게 중얼거렸다.
“···제발 이름 부르지 말아줘 오빠. 누가 알아보면 어쩌려고.”
“은하야 여기 봐!”
계속되는 백한영의 외침에 백은하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가, 손가락으로 브이자를 그렸다.
오빠가 기분 좋아 보이니 일단 시키는 대로 하긴 하는데.
여간 창피한 게 아니었다.
‘것보다 오빠는 왜 같이 안 타는 거지.’
이렇게 창피한 일을 자기 혼자 하는 게 억울했던 백은하는 회전목마에서 내려오자마자 백한영에게 달려갔다.
“오빠도 타. 이번엔 내가 찍어줄게.”
“내가 타라고?”
“응. 오빠도 타야겠어.”
“어···. 알았어.”
백은하의 말에 순순히 회전목마에 탑승하는 백한영.
백은하는 백한영이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찍기 위해 싱글벙글 웃으며 카메라를 들었다가, 천천히 카메라를 밑으로 내렸다.
무료한 표정으로 회전목마에 탄 백한영은 어딜 봐도 부끄러운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조금 전의 백은하와 마찬가지로 손가락으로 브이자를 그리는 백한영의 사진을 잔뜩 찍은 백은하는, 뭔가 진 기분이 들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괜히 똑같은 기분 느끼게 해주겠다고 덤볐다가 손해만 봤네.
그냥 내가 좋아하는 놀이기구나 잔뜩 타야겠다.
회전목마에서 내린 백한영은 백은하를 따라 다양한 놀이기구를 타러 다녔다.
70M까지 천천히 올라갔다가 단번에 낙하하는 놀이기구라든가.
최고 시속 100KM로 달리며 10번 정도 빙글빙글 도는 놀이기구라든가.
귀신이 나와 사람을 놀라게 하는 집 같은 거라든가.
‘마지막은 좀 신선했다.’
마법이 가져다준 놀라운 변화 중 하나에 백한영이 귀신의 집을 추가하고 있을 때, 백은하가 말했다.
“이번엔 뭐 타러 갈래?”
“또 타러 가게? 안 힘들···응?”
“왜 그래?”
백한영이 갑자기 중얼거리는 바람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백은하.
백한영이 고개를 똑바로 하며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래서 뭐 타러 가자고?”
“음. 이번엔.”
백은하가 볼을 두들기며 생각에 잠긴 순간.
[환상의 나라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10분 후 퍼레이드가 진행될 예정이니, 환상적인 경험을 하고 싶다면 반드시 구경하러 와주세요!]
놀이공원에 안내 방송이 울려 퍼졌다.
퍼레이드란 단어에 눈을 빛낸 백은하가 빠르게 말했다.
“저거 보러 가자.”
“그래. 그러면···.”
바로 움직이자, 라고 말하려던 백한영은 또다시 입을 다물고 먼 곳을 살펴봤다.
백한영이 미간을 찌푸린 채로 말했다.
“은하야. 잠깐만. 먼저 가서 보고 있어. 오빠 어디 좀 다녀올게.”
“어디를?”
“잠깐만.”
“오빠?”
갑작스러운 말에 백은하가 당황했지만, 백한영은 동생을 뒤로한 채 땅을 밟았다.
세상이 반으로 접혔다.
인적이 드문 장소에 도착한 백한영이 손가락을 세웠다.
그대로 허공을 긋자.
깔끔하게 공간이 베이며 두 세계가 연결됐다.
백한영이 있는 장소와.
김태식이 있던 던전의 내부가.
번쩍.
엄청난 에너지가 담긴 흑마력 광선이 백한영을 향해 쏘아졌다.
정확히는 김태식을 향해 쏘아진 것이었지만, 지금 막 수호자의 방에 도착한 백한영에게 그런 구분은 의미가 없었다.
백한영이 손가락을 살짝 휘둘렀다.
그러자.
서걱.
흑마력 광선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어···. 어?”
“너는 뭐 저런 거랑 싸우고 있냐.”
백한영은 김태식의 오른쪽 어깨를 슬쩍 살펴봤다.
김태식 몰래 심어놨던 자신의 의념이 멀쩡히 있는 걸 확인한 백한영은 이내 고개를 돌려 정면을 바라봤다.
천장에 닿을 것 같은 커다란 의자.
거기에, 해골이 앉아 있었다.
“뭐야 저건. 강시인가?”
[넌 뭐지.]
뼈만 남은 몬스터를 훑어보던 백한영은 상대의 말에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말이 통하네?”
[왜 하나 같이 그 소리를 하는 건지. 네놈들이 아는 하등한 마물과 나를 동급으로 보지 마라.]
“그래? 넌 좀 쎈가 봐?”
백한영은 무림세계에서의 추억을 떠올렸다.
그때도 사람과 말이 통하는 괴물들은 자신을 괴력난신의 왕이라고 칭하던 놈들밖에 없었다.
그러니 저 해골도 비슷한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며 백한영은 주위를 둘러봤다.
당장 치료가 필요해 보이는 사람도 있었고, 그냥 기절해 있는 사람도 있었다.
‘난장판이네.’
백한영은 목에 메고 있던 카메라를 김태식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이거 좀 들고 있어라. 고장 내면 알지?”
“형이 왜 여기 있어요?”
“왜 있긴. 네가 위험한 거 같아서 왔지.”
“···진짜로요?”
김태식의 말에 백한영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계속 지켜보니까 안심하고 가라고 했잖아. 안 믿은 거야?”
“어···그런 말 들은 적이 없는 거 같은데요?”
김태식이 백한영에게 들은 거라고는 괜찮으니 그냥 좀 가라는 말밖에 없었다.
백한영이 눈을 끔뻑이며 말했다.
“말 안 했다고?”
“네.”
“어. 음. 말 안 했네. 그럴 수 있지.”
시간 맞춰서 왔으면 됐잖아, 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백한영.
그 말을 듣자마자 김태식은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었던 몸이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여상한 백한영의 태도를 보니 여기가 던전 코어방인지 동네 카페인지 구별이 안 가는 것이다.
“가서 사람들이나 돌봐라. 포션 가지고 있지?”
“네. 형 조심하세요. 저 녀석···.”
[가만히 듣고 있으니 가관이군.]
김태식의 말을 끊으며 리치 로드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어느 안전이라고 장난질을 하는 거지?]
리치 로드의 몸에서 흑마력이 뿜어져 나왔다.
허공에 기형학적인 문양이 새겨진 마법진이 생성됐다.
수십 개의 마법진이 천장을 가득 메우는 걸 보며 김태식이 다급히 백한영을 찾았다.
무시무시한 마법진의 위용에 느슨해졌던 정신이 원래대로 돌아온 것이다.
“형!”
“태식아 카메라 똑바로 들고 있으라고 했지! 그거 비싼 거니까 조심히 좀 다뤄!”
“형 그게 아니라 지금―.”
[건방진!]
끝까지 자신을 무시하는 백한영에게 분노하는 리치 로드.
쿵. 리치 로드가 허공에서 꺼낸 지팡이로 땅을 찍었다.
기기기긱.
마법진에 어마어마한 흑마력이 빨려 들어가며 공간이 일그러졌다.
수십 개의 마법진에 제각각 다른 마법이 장전됐다.
산을 날리는 위력의 마법이 하나만 있어도 무시무시한데, 그런 마법이 무려 수십 개나 준비된 상황.
심지어 그 종류도 다양해 대처하기 까다롭기까지 했다.
괜히 언데드 마법사의 정점 리치. 그 리치 중의 정점인 리치 로드가 아닌 것이다.
철컥. 마법적인 트리거가 당겨지며 마법진에 빛이 들어왔다.
모든 준비가 끝난 순간 리치 로드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죽어라!]
마법진에서 재앙이 쏟아졌다.
마도의 정점에 오른 나라를, 신을 숭배하는 나라를, 자연의 화신과 더불어 살아가는 자들을 멸망시켰던 마법이 던전 코어방에 해방됐다.
그리고.
사라졌다.
“······?”
누군가 세상을 편집이라도 한 것처럼 아무런 전조도 없이 사라진 재앙들에 김태식이 입을 벌리고 고개를 우로 기울였다.
전두엽이 고장 난 거 같은 기분이었다.
[―! ――!]
그건 리치 로드도 마찬가지였는지 리치 로드가 입을 벌리고 이상한 소리를 냈다.
사람으로 치면 괴성을 지르는 중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게 사람이 말하는데, 예의 없이.”
리치 로드를 노려본 백한영이 다시 김태식을 보며 말했다.
“렌즈에 절대 손대지 말고 얌전히 목에 메고 있어. 조금 있다가 확인한다.”
“형?”
“쟤는 그리고 왜 저렇게 성격이 급하냐. 어련히 때 되면 알아서 찾아가 주는데.”
백한영이 리치 로드를 향해 손가락을 세웠다.
저런 놈에겐 검을 쓰기도 귀찮았다.
너무 늦으면 은하가 화낼 테니, 빠르게 끝내자.
백한영이 정신을 집중하자 거대한 심상의 세계가 펼쳐졌다.
하늘에서 빛나는 별이 그대로 담긴, 끝없이 펼쳐진 호수.
그 호수에 박혀있는 수백, 수천 개의 검 중 제일 심플한 디자인의 검을 백한영이 뽑아 든 순간.
세상이,
반으로 갈라졌다.
*
가부좌를 틀고 정신을 집중하고 있던 천진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먹을 쥐었다 피며 자신의 몸 상태를 점검하는 천진혁.
깨달음을 전부 수습한 것이다.
“끼아아악!”
자신에게 덤비는 밴시를 베어버린 천진혁은 그대로 앞으로 나아갔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천진혁은 거대한 알현실 같은 방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제 오냐.”
천진혁이 고개를 돌려 목소리가 들린 방향을 바라봤다.
거기엔 급하게 붕대를 몸에 감아 응급처치를 한 윤한이 있었다.
윤한이 말했다.
“그래도 네가 두 번째야. 그렇게 늦지는 않았어.”
“적은?”
“적은, 이러고 있다. 저걸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오냐.”
천진혁의 말에 윤한은 엄지로 자신의 등 뒤를 가리켰다.
윤한이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본 천진혁은, 순간 입을 다물었다.
기가 막힌 광경에 할 말을 잃은 것이다.
천진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건?”
“나도 몰라.”
“모른다고?”
“깨어나니까 저 상태였어. 나 말고 다 정신을 잃었다고 해서 누가 했는지 알 방법도 없고.”
윤한의 말에 천진혁은 재차 윤한의 뒤편을 살펴봤다.
거대한 의자. 화려한 문양이 뒤덮인 벽이.
아니.
세상이 반으로 갈라진 광경을 보며 천진혁은 생각했다.
누가 저런 짓을 했는지, 어렴풋이 알 것도 같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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