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레귤러(5)
던전 공략은 빠르게 진행됐다.
정확한 판단을 내리는 S급 각성자 윤한과 수준 높은 팀원 간에 시너지가 발생한 덕이었다.
‘끝이 없네.’
전투식량과 물로 배를 채운 윤한은 여태까지 지나온 길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거의 몇 시간 동안 앞만 보고 걸었건만 윤한이 마주친 건 오직 몬스터뿐이었다.
다른 각성자와의 합류에 실패한 상황에서 윤한은 생각했다.
어쩌면, 던전을 클리어할 때까지 다른 사람을 만나지 못하는 구조일지도 모르겠다고.
‘안 좋은데.’
윤한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몇 시간 동안 이어진 여정의 끝이 점점 다가오고 있는 게 느껴졌다.
이 여정의 끝에 있는 게 출구라면 아무 상관 없었지만, 그게 아니라는 걸 윤한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아마 곧 던전의 수호자와 만나지 않을까.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고 여기에 계속 가만히 있어야 되냐? 그것도 아니었다.
일단 식량이 충분하지 못했다.
던전에서 꽤나 시간을 보낼 거라 가정하고 식량을 챙겨오긴 했지만, 이런 긴급 상황을 예상한 건 아니었기에 수량이 충분하지 못했다.
대충 계산해 봤을 때 내일이 한계. 진짜 극한까지 아끼면 3일 정도 버틸 수 있겠지만, 말 그대로 버티기만 할 뿐이라 그런 식으로 했다가는 전투를 할 기운을 다 잃을 게 분명했다.
결정해야 됐다.
이대로 가만히 구조를 기다릴지, 아니면 힘이 충분할 때 강행 돌파를 할지.
거기까지 생각한 윤한은 피식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구조를 바랄 입장은 아니긴 해.’
윤한은 이 던전에 3명 밖에 없는 S급 각성자.
구조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구조를 하러 움직여야 할 사람이었다.
역시 여기선 강행 돌파가 맞았다.
윤한이 각성자들을 둘러봤다.
모두 긴장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저들도 피부로 느끼고 있는 것이다.
곧, 무언가가 벌어진다는 걸.
휴식을 끝낸 윤한이 재차 길을 따라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여태까지의 방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거대한 공간이 튀어나왔다.
마치 알현실을 닮아 있는 거대한 공간에 도착한 윤한이 건너편에 시선을 고정했다.
알현실 끝. 거기에 무언가가 있었다.
천장에 닿을 거 같은 의자.
그곳에 앉아 있던 해골, 리치 로드가 말했다.
[드디어 첫 번째 손님인가. 기다리다 지칠뻔했군.]
쿵.
리치 로드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윤한의 뒤에 거대한 철문이 내려왔다.
퇴로가 막힌 상황에서 윤한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대화가 가능한 몬스터는 또 처음 보네. 이거 우리가 첫 발견 아니야?”
[몬스터라. 그리운 호칭이군.]
“여태까지 속으로만 궁금해했는데, 드디어 물어볼 수 있겠다. 너네 대체 목적이 뭐냐?”
[목적?]
“뭘 원하길래 남의 세계에 게이트 같은 걸 뿌리면서 난리를 치는 거냐고.”
윤한의 말에 리치 로드는 턱을 괸 자세 그대로 미동조차 하지 않고 말했다.
[고작 그게 궁금한 건가.]
“어. 궁금해 미칠 거 같아. 그러니까 대답 좀 해줘 봐.”
[어려울 거 없지. 근데.]
리치 로드의 눈이 검붉게 빛났다.
[조금 건방지군.]
리치 로드의 몸에서 검붉은 마나, 흑마력이 솟아올랐다.
우웅―!
알현실 의자 앞에 기형학적인 문양이 떠오르고.
그곳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마법진에서 튀어나온 누군가가 리치 로드 앞에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부르셨습니까. 후작님.]
[침입자를 처리해라.]
[알겠습니다.]
리치 로드의 말에 심연을 닮은 갑옷을 입은 기사, 어비스 나이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비스 나이트가 검을 뽑아 들었다.
심상치 않은 기세를 풍기는 어비스 나이트에 맞서 윤한이 마나를 끌어올렸고.
동시에 각성자들이 자신의 능력을 발동시켰다.
윤한의 몸엔 바람이, 주먹엔 빛이 깃들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콰아앙!
단단히 응집된 염동 포탄이 어비스 나이트에게 쏘아졌다.
검을 들어 염동 포탄을 막아낸 어비스 나이트가 나직이 말했다.
[방해꾼이 있군.]
“왜? 1대1로 싸워줘?”
[아니. 굳이 그럴 필요 없다.]
어비스 나이트의 검에 흑마력이 뭉쳤다.
흑마력을 머금은 검을 역수로 잡은 어비스 나이트가 그대로 땅을 찍은 순간.
흑마력이 사방으로 퍼졌다.
[직접 처리하면 되니까.]
어비스 나이트의 몸이 땅으로 꺼지듯 사라졌다가, 바로 나타났다.
후열해서 전투를 준비하던 각성자들의 그림자에서 말이다.
“이 새끼가.”
윤한이 다급히 뒤로 돌아 어비스 나이트에게 달려들었지만, 거리가 너무 멀었다.
쾅!
어비스 나이트의 검에 얻어맞은 염동력 각성자가 맥없이 허공을 날았다.
염동력으로 최대한 방어해 즉사는 면했지만, 눈이 뒤집힌 걸 보니 당분간 전투에 참여하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윤한의 강환(罡丸)이 어비스 나이트에게 날아갔다. 콰아앙! 어비스 나이트가 있던 자리에 강환이 터지며 폭발이 일어났다.
“으아아악!”
각성자 중 한 명이 팔을 부여잡으며 비명을 질렀다.
어느새 폭발의 반대편으로 이동한 어비스 나이트가 검을 휘두른 탓이었다.
순식간에 아비규환이 된 전장에서, 김태식은 빠르게 마나를 끌어 올렸다.
‘온다.’
달아오른 감각을 믿으며 김태식이 적련의 검날에 불꽃을 모은 직후.
김태식의 그림자에서 어비스 나이트가 튀어나왔다.
화륵.
적련에서 시작된 불꽃이 어비스 나이스를 덮쳤다.
어비스 나이트가 나타날 타이밍을 정확히 알아맞힌 덕에 제대로 공격이 들어간 것이다.
‘됐다.’
완벽히 공격에 성공한 김태식이 속으로 자축하고 있을 때였다.
번쩍.
불꽃 속에서, 검붉은 눈동자가 아무렇지 않게 빛났다.
김태식이 그걸 보고 뭐라 생각하기도 전에, 어비스 나이트의 발이 김태식의 배를 힘껏 걷어찼다.
“커헉.”
김태식이 배를 부여잡고 땅을 굴렀다.
내장이 파열된 거 같은 고통에 김태식은 벌벌 떨리는 손을 움직여 허리춤에 있던 포션을 꺼내 마셨다.
천천히 사라지는 고통을 느끼며 김태식은 거친 호흡을 한 채로 어비스 나이트를 바라봤다.
[이걸로 방해꾼은 전부 정리됐군.]
어비스 나이트가 윤한에게 검을 겨누며 말했다.
서 있는 사람이 자신밖에 없다는 걸 깨달은 윤한이 주먹에 강기(罡氣)를 머금은 채 어비스 나이트에게 달려들었다.
콰아앙!
윤한의 주먹과 어비스 나이트의 검이 어지럽게 얽혔다.
강기 파편에 땅이 움푹 패였고, 흑마력이 깨지며 주변을 할퀴었다.
김태식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저게···S급.’
A급을 넘어 S급에 도달한 각성자의 힘을 두 눈에 새기며 김태식이 침을 삼켰다.
의지가 꺾이는 기분이 들었다.
김태식은 본인의 장점이 자기 객관화를 잘하는 것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재능이 어느 정도인지 굉장히 잘 알고 있다고 여겼건만.
지금 그 생각이 철저히 박살 나 버렸다.
뭐가 협회가 주목하는 유망주야.
뭐가 언젠가 S급이 될 수 있는 재능이야.
고작 발차기 한 번에 꺾여 버리는 녀석한테 그런 수식어가 어울리는 거 맞아?
김태식이 입술을 깨물고 쓰게 웃었다.
자신이 많이 부족하다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막상 현실로 겪으니 속이 많이 쓰린 것이다.
바닥에 널브러진 채로 고개를 들어 윤한과 어비스 나이트를 지켜보던 김태식은 그대로 몸에 힘을 빼고 알현실 천장으로 시선을 옮겼다.
어비스 나이트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실감했기 때문일까.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었다.
정확히는,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윤한에게 자신이 도움이 될까는 둘째치고, 이번에야말로 끼어들었다가는 목이 날아가는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몸을 지배한 것이다.
무력감을 느끼며 김태식은 생각했다.
그냥 이대로 있자.
윤한도 고작 B급 각성자가 자신을 도와줄 거라고 기대하지 않을 거다.
누가 뭐라 할 사람도 없었다.
B급 각성자가 S급 던전 게이트의 수호자 방까지 와서 시원하게 공격 한 번 성공했으면 밥값 한 거지.
그 시점에서 왜 가만히 있었냐고 질타받을 일은 없었다.
없을 텐데.
“하.”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며 김태식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생각과는 반대로, 몸이 멋대로 움직였다.
이대로 할 수 있는 최대의 공격을 퍼부어도 어비스 나이트는 꿈적도 하지 않을 것이었다.
방금 해봤기에 더욱 잘았건만.
그럼에도 김태식은 적련을 손에 들었다.
김태식은 자기 객관화가 잘 되는 사람이었다.
때문에 알 수 있었다.
지금 도망치면, 영원히 검을 들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김태식이 앞으로 한 발짝 움직였다.
김태식의 머릿속에 여태까지 백한영과 나눴던 대화가 하나 둘 씩 떠올랐다.
‘형 잠깐만요! 진짜 형이 허락할 때까지 각성 능력 쓰지 마요?’
‘정 위험하면 써야겠지만, 한 번 쓸 때마다 기본기 훈련을 한 달씩 더 해야 된다고 생각하면 편할 거다.’
이미 능력을 잔뜩 썼으니 일 년은 기본기 훈련만 해야 되는 건가.
‘동작이 크다 태식아.’
‘거리를 재는 감각도 엉망이고, 상대의 움직임도 대충 보고, 진짜 난리 났다.’
백한영이 말하던 것들은 대부분 완벽히 이해가 안 됐지만, 그렇다고 아예 감이 안 잡히는 건 아니었다.
늘 지적받던 동작이 크다는 얘기.
그 부분에 최대한 집중하며 훈련 및 실전을 겪어본 결과, 김태식은 적련을 제어할 때 자신의 동작이 쓸데없이 커진다는 것까지는 알아챌 수 있었다.
하지만 거리를 재는 감각이 엉망이라는 게 무슨 소리인지는 아직도 이해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스스로가 생각하기에 이미 충분히 거리를 잘 재고 있었으니까.
공격을 잘 맞추기도 하고, 상대의 공격을 잘 피하기도 하는데, 왜 거리 감각이 엉망이라는 걸까.
이해할 수가 없었다.
‘팁? 음···.’
‘일단 봐. 그게 시작이고 나머지는 다음이야.’
본다라.
김태식이 걸음을 멈추고 어비스 나이트를 바라봤다.
‘컥.’
갑자기 숨이 막혔다.
누군가 심장을 움켜쥔 거 같은 착각이 든 것이다.
적은 저 멀리 있는데, 그 사이에 윤한까지 있는데.
그저 쳐다본 것만으로도 겁을 먹는다고? 내가···그 정도로 겁쟁이라고?
그럴 리 없었다.
방금 그건 그런 게 아니었다.
이건 몸이 경고한 거다. 어비스 나이트가 당장이라도 나를 죽여버릴 수 있으니 조심하라고.
저 멀리 있는 녀석이 대체 어떻게?
그에 대한 답은 하나였다.
지금 서 있는 이곳이 녀석의 사정거리 안쪽이라면, 모든 의문이 풀렸다.
그걸 깨달은 순간, 김태식은 머릿속이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어비스 나이트를 중심으로 커다란 원이 있는 게 느껴졌다.
김태식의 시선이 자신의 주위로 향했다.
녀석의 원에 비하면 김태식의 원은 조그맣고, 흐렸다.
거리 감각이 엉망이라는 게 무슨 소리인지, 이제야 좀 알 거 같았다.
일단 이 원을 선명하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
김태식이 적련에 불꽃을 모았다.
불꽃이 검날을 타고 흘렀다.
불꽃으로 된 칼날, 검기(劍氣)가.
앞으로 달려 나가며 김태식이 검기의 형질을 변화시켰다.
적련에 파괴의 정수가 깃들었다.
불꽃으로 된 파괴의 정수, 강기(罡氣)를 머금은 김태식이 빠르게 검을 내질렀다.
자신의 거리와 상대의 거리를 아니.
최적의 경로로 검을 움직일 수 있었다.
화악―!
불꽃의 강기가 허공을 날아가 어비스 나이트의 상반신을 불태웠다.
아무리 어비스 나이트라고 해도 화속성의 마나로 만들어진 강기에 맞고 아무 피해가 없는 건 불가능했다.
물론 실력의 차이가 많이 나 약간의 피해를 주는 게 끝이었지만.
그 정도만으로 김태식은 자신의 할 일을 다 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나이스!”
김태식의 강기 덕에 생긴 약간의 빈틈을 노리고 윤한이 준비하고 있던 기술을 사용했다.
윤한이 강환(罡丸)을 머금은 주먹을 내지르며 회전시키자, 어마어마한 기류가 발생하며 두 개의 강환이 어비스 나이트의 몸통을 꿰뚫고 지나갔다.
쿵.
거대한 어비스 나이트의 몸체가 땅에 쓰러졌다.
짧지만 굵었던 싸움의 끝이 난 것이다.
싸움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리치 로드가 입을 열었다.
[설마 이길 줄이야. 제법이군.]
“다음은 너야 이 새끼야.”
[고작 내가 가진 말 하나를 쓰러트려 놓고 기고만장하군. 주제를 알 필요가 있겠어.]
“설마 내가 방금 전력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거야?”
우웅―!
윤한의 몸에서 거대한 마나의 흐름이 일었다.
던전의 수호자가 떡하니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전력을 다할 정도로 윤한이 바보는 아니었던 것이다.
“거기서 내려와. 바로 끝내줄 테니까.”
[역시 건방지군.]
“아니. 그냥 거기 있어. 내가 갈게.”
단전에서 시작된 거대한 마나의 흐름이 윤한의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거듭된 전투로 소모가 많았던 윤한에게 전투가 길어지는 건 여러모로 최악이었다.
상대가 방심하고 있는 지금 모든 힘을 쏟아부어 승부를 봐야만 했다.
빠지직.
윤한의 온몸에서 번개가 뿜어져 나왔다.
그대로 땅을 박차고 한줄기의 벼락처럼 앞으로 쏘아지는 윤한.
윤한이 양 주먹을 뒤로 당기며 장전했다.
지지지직―!
윤한의 주먹 근처에 번개로 된 강환이 생성됐다.
하나, 둘, 셋···.
제어할 수 있는 한계까지 강환을 생성한 윤한이 주먹을 빠르게 내질렀다.
용린권법. 오의.
뇌룡승천.
다수의 뇌속성의 강환이 원을 그리며 리치 로드에게 쏘아졌다.
회전하는 강환에서 어마어마한 인력이 발생하며 모든 걸 빨아들였다.
엄청난 속도로 날아가는 강환.
김태식은 생각했다.
상대가 너무 방심했다고. 아무리 강해도 저런 걸 무방비로 맞으면 무사할 리가 없다고.
이겼다. 김태식이 속으로 짧게 중얼거린 그 순간이었다.
[건방지다고 말했다.]
번쩍.
리치 로드에게서 쏘아진 검붉은 광선이 뇌속성의 강환을 꿰뚫고 윤한을 걸레짝으로 만들어 버렸다.
“어?”
멍청한 목소리를 내며 김태식이 땅에 쓰러진 윤한을 쳐다봤다.
뇌가 고장난 기분이었다.
S급 각성자가 공격 한 방에 나가떨어지다니.
이런 게 현실이라는 것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여흥치고는 괜찮았지만, 그래 봤자 여흥. 슬슬 끝내는 게 좋겠군.]
리치 로드의 손에 방금의 검붉은 빛이 모였다.
멍하니 리치 로드의 손끝을 바라보던 김태식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끝을 직감한 것이다.
김태식이 눈을 감자마자 세상에 소리가 사라졌다.
어마어마한 흑마력이 알현실을 가로지른 탓이었는데.
“······.”
김태식이 조심히 감았던 눈을 떴다.
아무리 기다려도 예상했던 고통이 찾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 어?”
김태식이 언어를 잊어버린 사람처럼 이상한 소리를 냈다.
근데 그럴 만했다.
눈앞에, 여기에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이 있었다.
“너는 뭐 저런 거랑 싸우고 있냐.”
그렇게 말한 백한영은 김태식을 잠깐 살피고는, 고개를 정면으로 옮겼다.
이러다 퍼레이드에 늦겠다.
빨리 끝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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