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바이트(6)
처음엔 백한영도 가벼운 마음으로 가성비 패키지, 이른바 혜자 패키지라고 불리는 유료상품을 구매했다.
조금만 강해져도 자신의 컨트롤이라면 <매화검수>를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실제로 불가능한 얘기는 아니었다. 창천지로는 비슷한 부류의 과금 게임들 중 유일하다시피 할 정도로 컨트롤의 비중이 높은 게임이었으니까.
단. 이기고자 하는 상대가 <매화검수>가 아니었다면 말이다.
무협 게임에서 <매화검수> 같은 닉네임을 얻는 게 얼마나 어려운 건지 백한영은 몰랐다.
그런 희귀한 닉네임을 쓰는 애들이 과금을 얼마나 하는지도 몰랐고.
알았으면 고작 10만 원을 쓰고 <매화검수>에게 이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안 했을 거다.
창천지로에서 컨트롤로 과금력을 극복하는 게 가능하긴 했다. 가능하긴 했는데.
그것도 어느 정도가 있지.
과금액이 수억이 넘어가는 사람들 앞에선, 컨트롤 같은 건 그냥 재롱에 불과했다.
[매화검수:검신인지 검ㅂ신인지 그만 좀 와라. 안 귀찮냐?]
백한영의 캐릭터인 <검신백한영>이 <매화검수>에게 3번째로 죽었을 때 들었던 말이었다.
그리고 그게 바로 트리거였다.
변명거리는 많았다.
첫째로 백한영은 절대자였다.
써도 써도 마르지 않는 재화를 몇 년간 보유했던 백한영의 금전감각은 망가진 지 오래였던 것이다.
동생의 돈이니까, 빚이니까 참고 있었지만, 자기가 직접 돈을 벌자 결국 망가진 금전감각이 터져버린 거다.
두 번째도 마찬가지인데, 백한영은 절대자였다.
당연히 살면서 검ㅂ신 같은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이게 일반적인 욕이었다면 허허 웃으며 넘겼을 수도 있었다.
그 정도 욕이야 백한영도 많이 들어봤으니까.
하지만 백한영은 자신의 닉네임에 검신이라는 단어를 집어넣었고.
그로 인해 검ㅂ신 같은, 진짜 상상도 못 한 소리를 들어버렸다.
이상이 백한영에게 과금신이 강림한 이유였다.
“아.”
백한영은 <검신백한영>의 앞에 누운 <매화검수>를 보며 짧은 한탄을 내뱉었다.
[매화검수:검신. 인정하겠습니다.]
유령 상태의 <매화검수>가 채팅을 쳤다.
사실 고작 1억을 과금해서 매화검수를 이기는 건 말도 안 되는 짓이었다.
백한영의 컨트롤이 아니었다면, 강화가 확률보다 더 잘 붙지 않았다면 고작 1억을 과금해서 <매화검수>를 이길 수 없었겠지만.
백한영은 그 어려운 걸 해내고 말았다.
물론 지금 백한영의 눈에 그런 성과들은 들어오지 않았다.
[1053489원]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그 모든 성과를 이뤘을 때는, 이미 통장에 100만 원밖에 안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백한영은 지금도 1억 원이 아깝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돈이야 얼마든지 벌 수 있었고, 말했든 백한영의 금전감각은 어딘가 이상한 점이 있었으니까.
다만, 동생이 이 꼴을 보고 뭐라고 하는 건 두려웠다.
‘···일주일 잘 놀았으니 슬슬 일할 때도 됐지.’
<매화검수>의 친구추가 요청을 받아들인 백한영은 컴퓨터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랜만에 게이트 탐방을 나갈 시간이었다.
*
그렇게 백한영이 과금신을 강림시켜 <매화검수>를 꺾고 있을 무렵.
세상은 <여름에 피는 꽃>에 대한 이야기로 시끄러웠다.
<여름에 피는 꽃>은 방영되기 전부터 이야기가 많았던 드라마였다.
유명 작가인 권혜민이 시나리오를 쓰고 탑급 배우인 한유림이 출연하는 드라마였으니 기대가 모이는 건 어떻게 보면 당연했지만.
동시에 우려가 많은 드라마기도 했다.
<백은하 얘 뭔데 배우까지 하냐?>
심지어 바로 주연이네 ㅅㅂ
한유림 놔두고 얘를 주연으로 쓰는 게 맞냐?
각성자 수저 물고 태어났다고 사방에서 밀어주는구나
┗가수 한다고 할 때도 이 반응이었지만 현실은 어땠죠? 차트 1위 그냥 먹어버렸죠?
┗┗각성자 인기 빨 차트 1위 취급 안 해줍니다.
보통의 드라마, 영화 팬들은 배우가 아닌 사람이 연기를 하는 걸 굉장히 싫어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혹은 좋아할 거 같은 작품에 쓰레기 같은 연기력이 묻는 것이 걱정됐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이유로 이제 첫 연기를 도전하는 백은하에게 많은 우려의 시선이 쏟아질 수밖에 없었는데.
이걸 해결하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바로 연기력으로 증명하는 것.
그거 외의 방법으로 이 상황을 해결하는 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게 많은 사람의 기대와 우려에도 시간은 흘러갔고.
<여름에 피는 꽃> 1화가 방영하는 날이 되었다.
<돈 많이 썼네?>
거의 영화급이네.
┗VBS에서 이 악물었다고 소문이 자자함.
시청자들의 반응은 일단 나쁘지 않았다.
돈을 쓴 게 여러모로 티가 나 화면의 때깔이 고운 덕이었다.
<여름에 피는 꽃>의 시작은 두 아역배우로 시작됐다.
남자 주인공 김신과 여자 주인공 한여름의 어린 시절 모습이 번갈아 가며 나오며 둘이 어떤 사정을 품고 있는지, 어떤 성격인지 차근차근 보여주며 스타트를 끊은 드라마에.
한 남자가 추가로 등장했다.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던 김신을 달래주고 왔다는 한여름의 머리를 쓰다듬는 그녀의 오빠, 한백호.
그가 한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지은 따뜻한 표정에 많은 시청자들이 반응했다.
<와 방금 여주인공 오빠 누구냐?>
처음 보는데 신인임?
┗ㅇㅇ 신인인 듯. 비주얼 보자마자 빠르게 찾아보고 왔는데 단역이라 그런가 신상정보는 안 나와 있더라.
┗┗단역이면 이제 안 나오겠네.
오랜만에 기대가 되는 배우의 등장에 흥분했던 게시글 작성자는 단역이라는 댓글을 보자마자 아쉬움을 달래며 드라마를 계속 시청했다.
그리고 얼마 후 다시 게시판에 글을 썼다.
<한여름 오빠 단역이라며>
왜 계속 나옴?
┗몰라 ㅋㅋ 쟤 뭐냐?
┗┗조연은커녕 주연인 김신 보다 분량이 많아 보이는데, 아까 누가 단역이라고 하지 않았냐? 저게 단역임?
여동생과 놀이공원을 가는 한백호(거기서 길을 잃은 어린 한여름은 어린 김신을 추가로 만났다).
여동생과 파티에 가는 한백호.
여동생과···아무튼 잔뜩 화면에 나오는 한백호.
단역치고 너무 많은 분량에 일부 시청자가 고개를 갸웃거린 순간이었다.
애앵—!
마치 게이트 경보음을 연상시키는 소리와 함께, 극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혈교가 준동한 것이다.
“오빠. 우리 괜찮아?”
“여름아. 잘 들어. 무슨 일이 있어도 여기에 숨어있어야 해. 알았지?”
“오빠?”
한여름을 어린아이만 들어갈 수 있는 안전한 곳에 숨기는 한백호.
본인도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기 위해 도시를 가로지르던 중 김신을 구한 한백호가 이윽고 도망칠 수 없는 순간에 이르렀을 때.
드라마의 하이라이트가 시작됐다.
한백호의 검이 화려하게 움직였다.
달려드는 혈교도를 하나씩 베어 넘긴 한백호가 이내 혈교도 부대의 대장 격으로 보이는 남자와 검을 겨루었다.
피가 튀고, 서로의 검이 격렬하게 부딪혔다.
아까까지 보여줬던 검술은 마치 장난이라는 듯 격이 다른 움직임을 보여주는 검.
결국 쓰러지는 혈교도 부대의 대장과, 힘을 다 썼는지 같이 쓰러지는 한백호.
그 모든 걸 눈에 담고 있던 어린 김신의 컷이 지나가고.
그로부터 15년이 지났다는 문구가 나타났다.
다 자란 한여름, 백은하가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아련한 표정을 지으며 한옥의 평상을 쓰다듬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드라마 1화가 끝이 났다.
<백은하 연기 미쳤네 ㅅㅂ>
진짜 아련한 느낌 미쳤음.
┗백은하는 또 증명했죠? 억까들 조용해졌죠?
┗┗그래 네가 이겼다.
<와 마지막 한백호 액션씬 뭐냐?>
롱테이크? 로 찍은 거 같은데 진짜 미쳤다.
저 배우 그래서 누구임? 아는 사람 없음?
┗백은하 친오빠라는 썰이 잠깐 돌긴 했는데 확실하진 않음.
┗┗친오빠면 최근에 깨어났다고 하지 않았어? 그럼 아니지 않아?
시청자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오랜만에 볼만한 드라마가 나와서 좋다는 반응이 절반, 나머지 절반은 한백호, 즉 백한영에 대한 반응이었다.
그만큼 한백호의 마지막 전투씬은 충격적이었다.
<근데 한백호 죽었으면 더는 안 나오는 거임?>
이건 아니잖아.
┗진짜 에바임. 무조건 살려야 함.
┗┗살리겠냐. 캐릭터가 이미 완성이 됐는데 여기서 살리면 뇌절임.
<한백호 죽는 게 깔끔한 건 모르겠고>
그냥 살리라고.
9999만 국민이 원하고 있다니까?
┗ㄹㅇㅋㅋㅋㅋ
한백호를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시청자들이 아우성을 치고 있을 때.
“됐다! 됐다고!”
이상준 감독은 스태프들과 얼싸안고 환호성을 질렀다.
평균 시청률 15.2%, 순간 시청률 18.4%
요즘 같은 시대에 저런 시청률이 찍힌 게 무엇을 의미하는 지는 뻔했다.
대박이 났다는 소리다.
“근데 백한영 씨 이제 없는데, 괜찮을까요?”
“2화부터는 한유림 씨 나오잖아! 어떻게든 되겠지!”
오늘은 마시고 죽자, 라고 외치며 이상준 감독이 자신의 잔에 술을 가득 따랐다.
자신의 커리어가 장밋빛으로 빛나는 상상을 하며 말이다.
*
경기도 모처의 거대한 단독주택 내부.
지하 훈련실에서 올라온 천진혁은 땀에 전 몸을 씻은 후 소파에 앉아 티비를 켰다.
요즘 세상이 돌아가는 꼴을 간만에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음?’
뉴스를 보기 위해 채널을 돌리던 천진혁이 한 채널에서 리모콘을 내려놨다.
바로 VBS에서.
천진혁에겐 취미가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엄격한 아버지 아래에서 무(武)를 수련해 온 천진혁에게 취미란 사치였으니까.
오직 무를 단련하는 것.
그것이 천진혁의 삶이자 가치관이었는데.
그런 천진혁의 시선을 한 드라마가 사로잡았다.
‘저건.’
천진혁이 한 배우를, 정확히는 그 배우가 펼치는 검술을 집중해서 살펴봤다.
아름다웠다.
검술이 펼치는 화려한 궤적도 물론 아름다웠지만, 그것보다는 거기에 담긴 내용물이 천진혁의 마음을 흔들었다.
자신의 검로와 상대의 검로를 완전히 장악해야만 나올 수 있는 간결한 움직임. 천진혁은 자기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드라마가 끝나고 배너 광고가 나올 때까지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던 천진혁은 이내 지하 훈련실로 내려갔다.
지하 훈련실 중앙에 앉은 천진혁이 눈을 감았다.
조금 전 봤던 검술이 머릿속에 아른거렸다.
결국 중요한 건 자신이 가진 모든 걸 완벽히 장악하는 것.
거기서 모든 게 시작됐다.
후우. 낮게 숨을 쉰 천진혁이 명상에 들어갔다.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밤이 깊어지다 못해 아침 해가 뜨고, 해가 가장 높은 곳으로 이동할 때까지 자리에 앉아 있던 천진혁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
번쩍.
천진혁의 눈에서 빛이 새어 나왔다.
천진혁은 앉은 자세 그대로 훈련장에 걸려 있던 자신의 검에 손을 뻗었다.
후웅.
허공을 가르고 날아오는 검을 잡아든 천진혁이 천천히 마나를 끌어 올렸다.
우웅―!
검기(劍氣), 검강(劍罡)을 넘어 아예 강기(罡氣)로 된 검을 만들어 낸 천진혁이 강기검을 잡고, 가볍게 휘둘렀다.
콰아아아앙!
강기다발을 맞고 무너지는 지하 훈련실 벽.
그걸 본 천진혁은 지상으로 올라가며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협회에 말해. 외부활동 시작하겠다고.”
검신 천진혁.
폐관수련 종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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