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위위경, 노비제도 폐지는 생각도 하시면 아니 됩니다. 합하와 위위경께서 이 나라와 백성을 위해서 얼마나 큰 노력을 기울이고 계시는지 제가 다 지켜봐 왔습니다.”
“…….”
“나라의 법을 엄히 하고 억울한 백성이 없도록 나라의 땅을 모두 다 거두어들이시고, 나라의 땅으로 돌리며 개인이 사사로이 땅을 사고팔 수 없게 하셨으며, 그 땅을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어 개간을 하게 하셨사옵니다.”
“…….”
“그 개간한 땅에서 나온 작물로 세금을 거두시었고 지금의 고려는 세금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
“그뿐입니까. 상거래를 대폭 늘리시며 고려라는 나라를 천하 열국에 드높이 이름을 날리시는 이 시점에서 열국에서도 하지 않는 노비제도를 폐지한다면, 지금의 모든 것들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될 수 있사옵니다.”
“하, 하하하하하!”
현수는 천시호의 말에 크게 웃었다.
“자네 말이 맞아. 노비제도를 폐지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지. 하지만 말이야. 천하 열국에서도 하지 않는 노비제도 폐지를 고려에서 실현해서 폐지를 시킨다면 말이야. 이 고려는 만년대계를 이룰 것이라는 생각은 안 해봤나?”
“만년대계를 이룬다면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고려라는 나라는 확실한 신분 국가입니다. 그 신분 제도를 없애 버리겠다는 건 고려의 모든 이들을 적으로 돌리겠다는 말씀이 되옵니다.”
천시호는 굉장히 걱정 어린 말투로 말하였다.
노비제도 폐지라는 건 정말이지 가장 민감한 문제였다.
사병제도 폐지보다 더 민감한 상황이라 귀족들이나 황실 종친들이 어떻게 나올지 상상만 해도 끔찍할 것이다.
“그걸 내가 모르겠는가. 하지만 노비제도는 없어져야 하네. 백 년 후, 천년 후에도 이 노비제도를 없애지 못한다면 그 나라는 발전하는 나라가 아니라 망국의 길을 걷게 될 것이네.”
“광산에 관노들도 있고 노비들도 수많은 이들이 있사옵니다. 노비제도를 폐지한 후에 그들을 어떻게 관리 감독을 하려고 하십니까? 그리고 노비제도는 위위경의 말씀처럼 언젠가는 없어져야 할 제도라고 보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이 사람아, 지금 하지 않으면 언제 한다는 것인가? 노비제도를 폐지한다면 이 나라를 반석이 아니라. 우러러보는 국가가 될 것이란 말이네. 그뿐만이 아니라. 지키기 위해서라면 모든 백성이 싸울 것이네. 내 나라와 가족을 지키는 데 있어서 무엇이 중요하겠는가.”
“…….”
“그리고 그들을 관리하는 방법은 다 생각해 두었네.”
“…….”
“더불어 저 금나라가 약조한 요동과 산동반도. 그곳에 노비였던 백성들을 보내어 나라에서 땅을 주고 개간을 하거나 미리 개간된 땅을 가지고 농사를 짓게 하면 되는 것이고 농사를 지어 본 적이 없는 이들은 농사를 가르치고 농사 외에 기술을 배우고 싶다면 기술을 가르쳐 생업을 잊게 하면 되는 것이네.”
“…….”
“그중에 능력이 출중하다면 나라에서 고용해 공장에서 일을 시키면 되는 일이야. 공장뿐인가? 고려 전역에 상단이 운영하는 공방소에 보내어 일을 할 수 있도록 하면 되네.”
“위위경, 위위경의 말씀은 다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하지만, 제가 걱정하는 건 위위경의 안위입니다.”
“내 안위가 왜?”
“정주에 일을 기억 못 하십니까?”
“오래전 일이야. 지금 누가 나에게 자객을 보내겠는가.”
“모르는 일입니다. 위위경. 하옵고, 오래전에 경대승 장군과 나가셨을 당시의 얼마나 많은 위협을 당하셨습니까.”
“그건 다 정리가 되었어. 자네가 생각하는 일들 다 기우야.”
“그리고 지금 하신 말씀 합하께서도 아시는 일입니까?”
“합하께서 내게 다 맡기신다 하였어, 그리고 일을 추진하기 위해 합하께 파발을 띄워야지.”
“아니 됩니다. 합하께서도 반대하실 것이옵니다.”
“어찌 자네는 그렇게 안 좋게만 생각하는 것이야! 이 나라를 반석 위에 올리고 위로는 황실을 받들고 아래로는 백성을 살피는 게 뭐가 잘못된 일이라고.”
“…….”
“노비들도 사람이야. 가축이 아니야. 아직도 곳곳에서 노비들을 가축 대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나. 아무리 세상이 바뀌어 간다고 하더라도. 절대 변하지 않는 게 사람의 습성이야.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괜히 있겠나.”
그렇게 소리친 현수는 천시호를 바라보며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위위경의 뜻을 모르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라는 겁니다.”
천시호의 말 한마디에 현수는 인상을 찡그렸다.
“좋게 봐. 좋게. 아니라는 걸 할 수 있을 때가 지금이야. 미루고 미루다 보면 언제 할 수 있겠는가.”
“송구하옵니다. 위위경. 제가 위위경의 심기를 어지럽혔습니다.”
천시호는 고개를 숙였다.
“아니야, 자네도 내 걱정이 되어서 이런 말을 하는 거 내가 잘 아네. 하지만 내가 진행한다면 누구보다 자네가 나를 지지해주었으면 좋겠어. 그리 해주겠는가?”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당연히 위위경의 뜻에 따를 것입니다.”
“하하하하하! 고맙네! 고마워.”
“위위경.”
밖에서 김 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요.”
“술상을 좀 봐왔습니다.”
“들이세요.”
이야기를 하다 보니 시간이 오래 지났다.
덜컹.
방문이 열리면서 안으로 술상이 들어왔다.
거하지도 않은 조촐한 술상이었다.
“부인, 감사드립니다.”
“아닙니다. 이야기가 오래되시었는데 미리 준비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니옵니다.”
천시호는 고개를 숙이며 답하였다.
술 두 병이 상위에 놓였다.
“더 필요한 게 있으시면 말씀하십시오.”
“고맙습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니 그만 나가보세요.”
“아, 예…….”
김 씨는 살며시 고개를 숙이며 들어온 비들과 함께 밖으로 나갔고, 현수는 술병을 들고 천시호 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서로 술을 주고받으며 몇 잔을 마시었다.
“위위경, 못 보던 것 같습니다.”
천시호가 벽 쪽에 진열된 걸 보고 물었다.
“아, 저 봉 말이야?”
“예, 위위경.”
“오래전에 만들어 달라고 한 건데 한동안 꺼내도 보지 않았던 걸 이번에 꺼내 놓은 거야.”
현수는 쉽게 말하였지만 천시호 눈에는 일반 봉이 아니었다.
위쪽 부분에는 육각형으로 만들어진 뭉툭한 게 달려있었고, 철로 만들어진 봉에 은 판박으로 화려한 장식이 들어간 봉이었다.
“왜? 저걸로 대가리 맞으면 한 방에 갈 거 같아서?”
현수는 술잔을 들고 씨익 웃었다.
“역시 위위경은 때려죽이는 쪽이십니다.”
“흐흐하하하하! 사람하고는! 하하하하! 자! 마시세!”
“예, 위위경.”
현수는 천시호와 잔을 부딪치며 술을 마시었다.
“천 장군.”
“예, 위위경.”
“우리가 한 이야기 누구한테도 하지 말게.”
“정 장군도 포함입니까?”
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 장군이 알면 아마 내 집을 군사로 채워버릴 수 있어.”
“하긴, 그럴 분이시지요.”
천시호는 미소를 지었다.
“견룡군과 순검군을 좀 더 보강해야겠네.”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새로이 관청 짓고 있는 그곳 말이야. 그 관청에 합하께서도 계셔야 하니. 사병제도를 폐지하고 난 후에 관청을 지키고 합하를 지킬 군사들을 순검군으로 대체할 생각이야. 순검군 지휘는 위위시에서 맡을 것이고.”
“견룡은?”
“그래서 보강하자는 게 아닌가. 견룡은 당연히 황실을 보위해야 하지.”
“그렇게 되면 위위경의 일이 더 많아지십니다.”
“일이 많아지면 어때. 바쁘고 좋은 거 아닌가.”
현수는 그렇게 말을 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되는 것이옵니까.”
“그리되어야지.”
“저. 위위경. 합하의 뒤를 이어 위위경께서 상국의 자리에 오르시면 위위시는 누구에게 맡기실 것입니까?”
“하, 이 사람 갑자기 그건 왜? 자네가 맡고 싶은가?”
“그런 건 아닙니다. 지금까지 쭉 위위경께서 맡아오셨지 않습니까.”
“글쎄, 아직 생각은 해본 적이 없네. 이번에, 사병들이 전부 개경에 모이고 나면 군사 개편을 해볼 생각이야. 물론 이 문제도 합하께 말씀을 드려야겠지.”
“군사 개편이라니요?”
“이 나라는 8할 이상이 산지야, 그 산지를 잘만 이용한다면 이 나라를 지키는 데 있어서 가장 유용한 군사 말이야.”
“군의 이름까지 생각해 둔 것이옵니까?”
천시호는 현수의 말의 의미를 알고 묻자 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군의 이름은 삼별초라 할까 하네. 주로, 유격전을 하고, 적들이 요동을 돌파해서 흥화진을 넘는 순간 유격 전술로 적을 괴롭히면서 지치게 만들어 버릴까 하네. 이 고려 산천을 자유롭게 다니며 산성을 방도 하고 산성에 자리를 튼 산민들을 보호하는 군대 말이네.”
“…….”
“더불어 호환을 당하면 그 호환 토벌까지 한다면 그야말로 정예 중의 정예가 아니겠나. 필요하다면 산성에서 지원을 청하면 지원을 나가고 보급이 필요하면 산성에서 보급을 정비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그럼 본거지도 생각해 두셨사옵니까?”
“금강산. 금강산을 본거지로 하여 그 산에 산성을 쌓을까 하네. 그곳을 본거지로 하고 전국에 있는 산 몇 군데에도 내가 창설할 삼별초 군을 둘까 해.”
“어디를 보고 계시옵니까.”
“전라도는… 내장산, 경상도는 지리산, 양광도는 계룡산, 서해도는 구월산, 북계는 대자산, 함경도 백두산을 생각하네.”
“위위경 지금 말씀하신 곳은 험하고 너무 험한 산들입니다.”
현수가 말한 산은 진짜 험하디 험한 산이었다.
사냥꾼 약초꾼도 쉽게 가지 않는 산을 지목하니 걱정이 되었다.
“산에서 평생 훈련을 받고 살아야 하는 이들이 될 것이고 전국에 산천을 돌면서 훈련을 시킬 것인데 그 정도는 험해야 하지 않겠는가.”
“듣고 보니 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곳에 산성을 쌓기에는 너무 위험부담이 크지 않겠습니까. 그 산들을 가지 않으려고 하는 백성들이 수두룩하지 않습니까.”
“처음에는 사냥하며 길을 열어나가야겠지. 어느 정도 길이 확보되고 안정성을 갖추면 시작할까 하네.”
“그럼, 그들을 이끌 장수들은 생각하신 분이 있으십니까?”
“악정을 생각하는데.”
“악정 장군이요?”
“그래, 악정은 함경도에서 여진족들과 생활하였고. 그곳은 온통 산지 아닌가. 더불어 악정은 그들과 생활하면서 함경도 일대를 그 누구보다 잘 알 것이고. 그곳에 산 지형도 누구보다 잘 알 테지.”
천시호는 현수의 말을 듣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이십니다. 그럼 훈련은…….”
“일단 충분히 삼군의 군을 정비하고. 시작해야겠지.”
“그렇사옵니다. 위위경.”
“나는 내가 말한 곳에 산성을 짓는다면 큰 봉수대를 설치할까 해.”
“봉수대. 만약 그런 산에 봉수대가 설치된다면 신호를 주고받는데 있어서 아주 유용할 거라 봅니다.”
천시호의 말에 현수는 미소를 지었다.
“자, 드세.”
현수는 술병을 들고서 천시호의 잔에 술을 채워주며 서로 술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현수가 자리에서 일어나 수납장으로 향하여 수납함을 열었다.
수납장에는 수많은 두루마리들이 있었다.
그중에 작은 종이로 쓰여진 글들을 보다가 하나를 꺼내고 서랍을 열어서 패 하나를 가지고 자리로 돌아와 천시호에게 건네었다.
“이게 무엇입니까?”
“펼쳐 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