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매복해도 아무런 효과를 제대로 보이지 못하는 거란군의 장수들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자, 장군.”
“퇴, 퇴각을.”
“퇴각은 없다! 밀어붙여라! 놈들이 건안성으로 향하지 못하게 이곳에서 끝을 봐야 한다!”
말이 끝을 봐야 한다고 했지 정작 거란군에겐 불리한 싸움이었다.
매복 공격이 막히고 뚫리지 않는 고려군의 방어에 공격이 주춤거리면서 뒤로 도망치려는 거란군도 속출하였다.
뒤로 도망치려고 하는 거란군을 거란군 장수가 스스로 군사들의 목을 베어 버리며 공격을 지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실수였다.
잔뜩 겁을 먹은 거란군은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오히려 군사를 베어버린 거란군 장수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뭐, 뭐 하는 짓이야! 이노오…….”
푸욱! 푸푸푹!
거란군은 장수들을 베면서 다시 산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궁수! 놈들을 쏴라!”
거란군 궁수들이 장수를 살해하고 산으로 올라오려는 아군을 향해 화살을 쏘기 시작했다.
도망갈 수도 돌아갈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거란군이었다.
“미친놈들…….”
현재 상황을 본 우학유는 눈살을 찌푸렸다.
거란군이 서로 죽이고 있었다.
고려군은 자기 위치를 지키며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명령이 떨어질 때까지.
“우 상장군! 지금 움직입시다! 이때가 기회요!”
돈장의 외침에 우학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군! 빠르게 움직여라! 이곳을 벗어난다!”
우학유는 소리치자 부장들은 군사들을 빠르게 명령을 내렸고, 군사들은 천천히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기들끼리 싸우든 말든 고려군은 그저 거란군의 움직임만 살피면서 진형을 유지한 채로 위치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티티팅!
거란군의 화살들이 고려군에게도 날아왔다.
하지만 방패에 가로막히다 보니 고려군의 피해는 거의 없었다.
장창병과 궁수들은 몸을 모두 낮추면서 빠르게 이동하였다.
거기에 보급품을 실은 수레들은 속도에 뒤처지다 보니 군사들이 빠르게 보급품들을 그 자리에 버리고 대열에 합류하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보급은 신경 쓰지 마라! 다시 보급을 청하면 된다! 걱정하지 마라!”
돈장은 소리치며 군사들을 다독이면서 사기에 문제가 생기지 않게 움직였다.
돈장, 우학유와 부장들은 모두 말에서 내려 방패로 몸을 가리고 말을 이끌고서 천천히 군사들을 데리고서 나아갔다.
한편 이의방은 기병들을 정렬시키고서 훤히 드러나는 요동벌판을 바라보았다.
“하~! 기가 막히는구만…….”
요동벌판을 보는 이의방은 그저 바라만 볼 뿐이었다.
이 넓은 요동벌판을 말을 타고 내달려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하지만, 지금 이곳은 적진이었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만 하였다.
또 어디서 어떻게 공격을 해올지 모르기에 이의방은 그저 눈으로 요동벌판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박 장군.”
“예, 합하.”
“이곳에 군영을 치겠다.”
“조금만 더 가면… 건안성이옵니다만.”
“아까 거기서 매복을 당하였는데. 이곳에 군영을 설치하고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야 하지 않겠느냐.”
“아, 예! 합하.”
“이곳에 기병 2령, 사병 1만을 놓겠다. 그리고 아까 매복 당한 그곳에 사병 5천을 두어라.”
“알겠사옵니다. 합하.”
박지영은 각 사병장 들에 명령을 내렸다.
“박 장군.”
“예, 합하.”
“돈장, 우학유가 오는 즉시. 석성, 은성에 파발을 띄워서 최소의 보급을 보내라 하고. 흥화진으로 파발을 보내 보급을 다시 조달해 올 수 있도록 하도록 하게.”
“예, 합하.”
박지영은 고개를 숙이며 답하였다.
그때 뭔가를 느낀 이의방은 눈살을 찌푸리고는 시선을 아래로 두었다.
“응?”
자신만이 느낀 게 아닌지 박지영 역시 시선을 땅에 두었다.
두두두두두두!
땅의 격한 떨림이 느껴지고 바닥에 보이는 모래알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하, 합하!”
박지영은 소리쳤다.
저 멀리서 자욱한 먼지가 피어오르는 게 눈에 들어왔다.
“전군! 방진 대형으로!”
이의방이 소리치며 진형구축 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기병들이 일제히 움직이며 방진을 짜나갔다.
넓게 기병이 펼쳐진 진형이 이루어지고 앞에는 기병이 3열을 치고 전투 준비에 돌입하였고 4, 5열에 기병들은 창을 바닥에 꽂고 안장에서 활을 들고 시위를 당기었다.
순식간에 기병으로 펼쳐진 방진 안에는 이의방과 박지영이 자리를 잡았다.
방진에 보병이 빠져 있지만, 문제가 될 건 없었다.
군사들의 훈련에 몰두시키면서 전투에 있어서 어떤 변칙들이 있을지 장수들과 의논하며 훈련에 임해 왔다.
그리고. 지금이 그 예였다.
부장들이 전, 후, 좌·우로 자리를 잡았다.
사슬 형태로 이어서 만든 말 갑옷을 입힌 중갑기병들 뒤로 경기병들이 모든 준비가 다 되었다.
아직 정면에서 오는 군대가 아군인지 적군인지 알 수 없는 상황 속에 화살 공격을 내릴 수가 없었다.
박존위가 파발을 띄워 보내지 않았다면 이의방은 공격령을 내렸을 것이다.
“합하! 명령을 내려 주소서!”
박지영이 다급하게 이의방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기다려라. 아군일 수도 있다.”
“합하, 아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강하게 다가오고 있사옵니다!”
이의방은 말고삐를 꽉 쥐었다.
퍼퍼퍼퍽!
순식간에 수십여 발의 화살이 땅에 꽂혔고 정면에서 다가오는 군사들은 더 이상 진격하지 않았다.
슬슬 먼지가 거두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의방은 눈살을 찌푸렸다.
거란 기병들이었다.
“나는! 거란의 장수! 야율손이다! 너희 고려는 어찌 남의 영토를 침범하였는가!”
쩌렁쩌렁하게 요동벌판에 울려 퍼지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알아들을 수 없었다.
“뭔 개소리야. 너희들 중 거란족 말할 줄 아는 사람없느냐!?”
있을 리가 만무했다.
“거란의 야율손! 장군께서! 고려는 어찌 거란의 영토를 침략하였는가! 라고 물으시오~!”
이어 쩌렁쩌렁하게 고려말이 울려 퍼지자 이의방은 반응을 보였다.
“나는~! 대 고려국의 상국 이의방이다! 너희들이 지금 점거하고 있는! 영토는! 고구려의 영토! 즉 고려의 영토이니라~! 마땅히! 고구려의 영토였으면! 고려가! 되찾으러 오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더냐~!”
이의방은 또박또박 말하며 저들에게까지 들릴 수 있게 큰 목소리를 내었다.
“와아아~!”
수만의 고려군이 이의방에게 말에 일제히 호응하기 시작하자 이의방은 피식 웃었다.
예상못한 함성 소리였으니 말이다.
“빌어먹을, 고려놈들…….”
주먹을 불끈 쥐는 야율손이었다.
“장군, 공격 명령을 내리십시오! 아니, 애초에 멈추지 말고 밀어버려야 했습니다!”
거란족 장수가 말하였다.
하지만 야율손은 함부로 들이댈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단순에 밀어버리려고 하였지만 야율손은 그럴 수 없었다.
금나라 철기병 못지않은 중갑기병을 보자마자 생각을 고쳐먹은 것이다.
거기에 지난 고려군과 접전을 통해서 금나라와 같은 철기병은 보이지 않고 보병과 경기병만 보였다는 이야기만 듣고서 달려온 게 화근이었다.
비사성에서 쫓겨난 야율손은 건안성으로 돌아오자마자 야율유가에게 자신의 힘을 제대로 보여주겠다는 각오를 하고 기병을 이끌고 나왔다.
하지만, 지금의 고려군을 당해낼 수가 없다는 걸 느껴버렸다.
그들과의 힘의 차이를.
더군다나 상국 이의방이라는 자가 명분 있는 대답을 해버리니 도저히 뭐라고 대꾸할 말이 없었다.
“듣거라~! 요동은! 고구려의 맥을 이은! 고려의 영토이니! 어찌하여 너희들이! 지금 고려의 영토에 살면서! 너희들의 땅이라고 우기는 것이냐~! 말을 해보라~! 어서~!”
저 멀리서 상국이라는 자의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지고 고려말을 할 줄 아는 장수가 통역을 해주었다.
“장군, 결정을 내려 주십시오!”
야율손은 침을 꿀꺽 삼키었다.
건안성에서 큰소리치고 군사를 이끌고 나왔다.
어떻게든 선택을 해야 하였다.
장렬하게 돌격하느냐, 아니면 목숨을 아껴 퇴각하느냐 선택의 갈림길에 야율손은 서 있었다.
“장군!”
야율손은 안장에서 칼을 빼 들었다.
두꺼운 곡선의 칼이었다.
“전군~! 공격하라~!”
야율손은 공격을 선택하였고 맹렬하게 선두로 고려군에게로 달려나갔다.
멀리서 다시 공격해오는 거란군을 보며 이의방은 피식 웃었다.
거란군이 내달리면서 다시 먼지를 일으켰다.
“발사~!”
“화살을 쏴라아~!”
“쏴라~!”
이의방이 큰소리로 외치자 곳곳에서 장수들의 외침이 들렸고, 시위를 당기고 있던 경기병들이 일제히 시위를 놓았다.
수만 발의 화살이 거란 기병들을 향해서 날아갔다.
“좌군! 돌격하라~!”
“좌군은! 돌격하라~!”
돌격하라는 명이 떨어졌다.
중갑기병들은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면서 추진력을 키웠고 뒤에 있던 경기병들은 사거리에 다다를 때까지 계속 화살을 날렸다.
좌군의 자리가 베어지자 전, 후군의 중갑기병들이 좌군 기병의 자리를 채웠다.
“이 전쟁은 이제 끝났어.”
이의방은 확신하였다.
거란군과 계속해서 싸워보면서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형세는 고려의 대승을 직감했다.
고려와 거란의 힘의 차이를 석성에서부터 느꼈기 때문이었다.
고려의 중갑기병들 점점 더 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두두두두두!
육중한 중갑기병의 속도가 완전히 붙었고, 거란군 역시 화살을 쏘며 공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런 효과가 나오지 않았다.
고려 중갑기병들은 허리를 살짝 숙이며 날아오는 화살들을 다 받아치고 있었고, 중갑으로 무장된 말들 역시도 쉽게 쓰러지지 않았다.
일정 거리 안까지 들어서자 슬슬 화살 공격 때문에 넘어지거나 쓰러지는 중갑기병들이 이의방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극소수의 피해였다.
티티팅!
화살이 갑옷에 튕겨 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히이잉~!
퍼억!
육중한 소리가 이의방의 귓가를 때렸다.
거란군과 고려군이 붙었다는 소리였다.
먼지 때문에 앞의 상황이 제대로 보이지 않지만, 이의방은 소리를 듣고서 어떻게 되어가는지 대충 판단만 하고 있었다.
먼지 속에서 울려 퍼지는 비명들 그리고 육중한 소리를 내며 내달리는 소리가 들렸고, 이의방의 입가에는 미소가 지어졌다.
“경기병을 투입해라!”
“예, 합하.”
박지영은 곧장 소리치며 명령을 내렸다.
“경기병! 출진하라~!”
“경기병! 출진하라~!”
장수들이 소리쳤고 전, 후군의 중기병들이 움직이며 경기병들이 나아갈 수 있게 길을 열어주었다.
활을 들고 있던 경기병들은 활을 다시 안장에 집어넣으며 땅에 박아놓은 창을 들고서는 곧장 적진으로 달려나갔다.
두두두두~!
“거란은 끝났다.”
이의방은 짧게 말하며 그저 잘 보이지 않는 앞을 주시하였다.
거란족의 소리가 들렸다.
무어라 말을 하고 있었는지만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병장기들이 부딪히는 소리와 말과 말이 부딪히는 소리가 맹렬하게 들려왔다.
“으아아아~!”
비명소리가 다시 들렸다.
“경기병.”
이의방은 짤막하게 조용히 대답하였다.
요동벌판의 먼지가 더욱더 심하게 주위에 퍼지기 시작했다.
“소라, 가지고 있지?”
“예, 합하.”
“소라 불어.”
이의방의 말에 박지영은 말안장 가방에서 소라를 꺼내어 들고서 힘차게 그 자리에서 불었다.
부우우우~!
소라 소리가 주위에 퍼지고 주위에서도 소라를 불었다.
천천히 먼지가 가라앉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주변을 정리하는 경기병들이 눈에 들어왔다.
전사한 고려군도 보였지만 거란군의 피해는 막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