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대단한 놈이구먼. 적장이 누군가?”
“거란족 가한의 아우 야율효기 라 합니다.”
“야율효기… 재미있군.”
“부상병들은 모두 흥화진으로 이동시켜라. 그리고, 가축을 잡아서 군사들에게 실컷 먹이고 우리가 가지고 왔던 탁주를 모두 개봉하여 군사들에게 실컷 먹이도록 하여라.”
“합하! 술이라니요!”
“불가합니다. 합하께서 드시는 것도 아니고. 그 모든 술을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신다는 말씀입니까! 불가합니다. 자칫하다가…….”
“술을 먹는다는 걸 알고 공격해 올 수 있겠지. 하지만 들어오지 못해.”
“어인 장담이시옵니까, 합하께서는 대 고려국의 상국이시옵니다. 명을 거두어 주시 오소서.”
“거두어 주시옵소서!”
장수들이 한결같이 말하자 이의방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여러 장수가 그리 말하니, 내 고집대로 할 수도 없으니. 허나, 오늘은 잘 먹이도록 해.”
“예, 합하!”
“그리고, 이 상장군은 전투가 벌어지기 전까지 아무 걱정 하지 말고 푹 쉬어, 최원호 상장군도 그렇고.”
“예, 합하.”
면목이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이의방은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밖으로 나갔다.
* * *
한편 박지영은 사병들을 관리하고 있는 수위군영에 들어왔다.
“갑이야, 을수야.”
“예, 장군.”
갑이와 을수는 곧장 박지영에게로 다가왔다.
“나 좀 보자.”
박지영이 군막을 젖히며 밖으로 나가자 갑이와 을수가 뒤를 따랐다.
조용한 곳으로 온 박지영은 갑이와 을수를 바라보며 말하였다.
“합하께서 너희 형제를 면천하신다 하셨다. 그리고 너희 둘을 위위경에게 보낸다 하시는구나.”
“예? 며, 면천이요?”
면천이라는 말에 침을 몇 번이나 꿀꺽 삼키는 갑이와 을수를 바라보는 박지영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 면천이다. 아마도 너희에게 벼슬도 주실 요량인 것 같구나.”
“벼, 벼슬이요!?”
을수가 깜짝 놀라 말하였다.
“하하하하, 그래, 너희들이 사병으로 온 지가 몇 해더냐. 그리고 합하께서 너희들을 이렇게 놓아두기는 아까우신 모양인가 보구나. 면천이 되고, 벼슬을 받는다면 합하의 은혜를 잊지 말고 위위경도 잘 보필해야 한다.”
“예, 장군 당연히 그렇게 해야지요.”
“합하의 은혜 잊지 않겠사옵니다!”
“그래, 그러니까… 죽지 말고 반드시 버텨라.”
“예!”
갑이와 을수가 동시에 답하였고 박지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의방에게로 향하였다.
“혀, 형. 우리가 면천된다고 했지?”
“어? 어, 며, 면천이랑 벼슬도 주신다 했어.”
노비로 살면서 우학유의 사병이 되었고 개경으로 와서 이의방의 사병이 되었다.
그렇게 사병으로 오랫동안 있으면서 실력을 키우고 사병들을 지휘하는 사병장이 되어 있었다.
“형! 우리 위위경 진짜 옆에서 모시는 거지?”
“어? 어… 그래, 위위경 옆에서 모시는 거… 겠지?”
“겠지? 그게 무슨 말이야?”
“음… 위위경께서 거절하실 수도 있지 않나 해서. 그분 옆에는 유능한 장군분들이 계시니까…….”
갑이는 애매모호하게 말하였고, 을수는 약간 실망한 눈초리였다.
“하기는. 정균 장군, 악정 장군, 천시호 장군, 양소 장군까지… 진짜 많잖아. 거기에 위위경 직속 부관이신 분들도 대부분이 중랑장 급이니까…….”
“그만 돌아가자.”
“어…….”
갑이는 동생을 이끌고서 수위군영으로 돌아갔다.
* * *
며칠 후
이의방은 군을 재정비하였다.
며칠간 전투를 치르지 않고 충분히 군사들이 쉴 수 있게 해주었다.
그리고 은성을 보고 있는 이의방은 고개를 끄덕였다.
성곽에 빼곡하게 차 있는 거란군을 본 이의방은 이영령에게 명을 내렸다.
“쇄문도차와 전호피차를 일렬로 세우고 군사들을 방어하고, 놈들이 공격해올 수 있으니 정란을 곳곳에 설치해서 거란군의 움직임과 동태를 살펴라.”
“예, 합하.”
이미 은성의 지형은 파악해놓은 이의방이었다.
부장들과 장수들을 이끌고서 멀리서 성 주위를 미리 살피었기 때문이었다.
“상장군 이영령이 공격하였던 이 길 빼고는 나머지는 거의 산을 올라야 하는데… 문제는 지금 은성의 군사가 재배치 되었다는 거야. 거의 빈틈없이 꽉 차버렸어.”
“그럼 어찌하시려 하십니까?”
우학유가 물었다.
“어차피 늦은 마당에 조금 더 확실하게 해보자고. 지금부터 저 산을 평탄화한다.”
“예!?”
산을 평탄화한다는 말에 우학유와 주위 장수들은 깜짝 놀랐다.
“산에 있는 나무를 뽑고 흙을 갈아서 평탄화해서 석포를 배치하여 기름 항아리를 이용해서 은성을 불바다로 만들어 버려야겠다.”
“합하,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지금 날이 추워지고 있어 땅이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고 있사옵니다. 오히려 전투를 하기 전에 군사들이 지칠 수 있사옵니다.”
최원호의 말에 틀린 말은 없었다.
압록강을 넘어서부터 차근차근 공격해 왔고, 하루하루 지나면 지날수록 요동의 바람은 매우 추웠다.
특히나 밤에는 산을 거쳐 불어오는 바람은 그야말로 상상 이상이었다.
“먼저 크고 작은 나무란 나무들은 모조리 뽑아라. 그리고 그걸 장작으로 사용해서 곳곳에 불을 피워 군사들이 공역에 들어가도 추위를 못 느끼게 해.”
“예! 합하!”
장수들이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모두 나가 버리자 이의방은 지도를 다시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 * *
그날 저녁.
“대체 저놈들 뭐 하는 거야?”
성곽에서 내려다보는 거란 가한의 동생 야율효기는 인상을 찡그렸다.
그들은 공성 병기 정란을 곳곳에 세워두고 쇄문도차와 전호피차를 이용해서 거의 성벽 비스듬하게 배치시켰다.
그리고 미친 듯이 나무들을 뿌리째 뽑아내고 있었고, 뽑아낸 나무 주위로 군사들이 우르를 몰려 가 땅을 파고 있었다.
성곽에서 훤히 보이는 고려군의 상황이었다.
“저놈들 땅굴이라도 파려고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땅굴을 판다고 해서 저렇게 대놓고 판다는 게냐? 말이 안 돼.”
고려군이 대체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나무를 뽑고 땅을 파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무들이 줄줄이 뽑혀 나가면 고려군은 쇄문도차와 전호피차 그리고 정란을 밀어서는 공간을 확보하기 시작했다.
고려군은 삽질하면서 땅을 갈기 시작했다.
수많은 고려군이 쉬지 않고 일했다.
“장군, 그만 관청으로 돌아가시지요, 여기는 저희가 확인하겠습니다.”
“아니다. 내가 계속 지켜보겠다.”
야율효기는 가만히 성곽에서 고려군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지켜보면서 속내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 * *
며칠 후.
“하아압! 하압!”
사병을 군사들로 양성한 지 오래되었다.
처음 훈련시킬 때보다 실력이 많이 좋아졌다.
흉갑 대신에 경번갑을 입히고 첫 훈련을 할 당시에 병과를 나누기 위해서 각 사병을 따로 나누어 훈련을 시켰고, 팽배수, 장창수, 궁수 등으로 나누었으며 감문위의 군사들처럼 공병으로의 역할까지 확실히 할 수 있도록 훈련시키었다.
“옳지! 팽배수란 무엇이냐! 팽배수는 고려 최고의 중갑 보병이자 정예다! 너희들이 선두에 서 있기에 장창수와 궁수들이! 너희들을 믿고 움직일 수 있다!”
현수는 팽배수들을 향해 외쳤다.
점점 더 각 육위의 팽배수들처럼 정예화가 되어 가고 있었다.
“팽배수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겁을 먹어서는 안 되며! 절대 물러섬이 없어야 한다! 그게 팽배수다! 알겠느냐!”
“예! 위위경!”
팽배수들이 일제히 외쳤다.
“부장!”
“예! 위위경!”
“조금 더 훈련하고, 진영 훈련을 하도록 하라!”
“예! 위위경!”
부장은 고개를 숙이며 외쳤다.
“훈련을 계속한다!”
훈련을 계속한다는 말에 팽배수들은 다시 제 자리로 돌아와서는 방패와 병기를 휘두르며 훈련에 돌입하였다.
반대편에서는 궁수들이 계속 화살을 쏘며 훈련하였고 장창수들은 긴 창을 가지고서 찌르기 위주로 훈련을 하다가 장창을 버리고 허리에 패용한 칼을 빼서 짚단과 대나무를 베는 훈련을 하기 시작했다.
“위위경. 훈련장에서 숙직하신 지 오래되셨습니다. 이만하고 저택으로 가셔서 쉬시지요.”
악정의 말에 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자네들도 저택으로 돌아가게. 정 장군.”
“예, 위위경.”
“군기감 장을 만나서 새로운 군사들에게 지급할 쇠뇌를 만들라고 전달하고 저택으로 돌아가게.”
“예, 그리 하겠습니다.”
현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자 육위 훈련장 단상에서 내려갔다.
* * *
“어서 오십시오,”
저택에 도착하자 집사가 나와서 허리를 숙이며 인사하였다.
“진지는 드셨사옵니까.”
“동치미 국물에 국수나 좀 말아다 주게나.”
“예, 위위경 찬 간에 말해두겠사옵니다. 저, 갑옷에… 피가.”
“응?”
집사의 말에 자신의 갑옷을 보았다.
기름으로 다 닦아내었다고 생각하였지만, 경번갑 사슬 속에 굳은 피는 지워지지 않았다.
“갑옷도 손질해놓으라고 하겠습니다.”
“그래, 고맙네.”
현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곤 안채로 들어갔다.
안채로 들어오자 문 앞에서 복이와 놀고 있는 수아가 눈에 들어왔다.
오늘도 바닥에 그림을 그리고 있는 수아, 그리고 물끄러미 그림을 지켜보는 복이었다.
“아가! 하하하!”
현수가 활짝 웃자 수아와 복이도 활짝 웃으면서 뛰어왔으나 경번갑에 혹시 모를 피냄새가 날까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였다.
“그림 그리고 있었느냐?”
“네!”
“복이는?”
“그냥, 그림 봤어요.”
또박또박 말하며 웃는 복이의 말에 현수는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복이는 하고 싶은 게 없느냐?”
현수의 물음에 고개를 가로젓는 복이었다.
“그래, 하고 싶은 게 있으면 언제든지 이야기하거라.”
“네!”
현수는 그렇게 말하며 안으로 들어가면서 바닥에 그린 그림을 보다가 피식 미소를 지었다.
“많이 늘었네. 수아야.”
“네!”
수아가 현수에게로 뛰어왔다.
“아비가 구해준 안료들은 안 쓰느냐?”
“아까워서요. 제가 그린 그림은 이상해요.”
“하하하하!”
현수는 크게 웃었다.
“안료는 쓰라고 있는 것이니 바닥에 그만 그리고 종이에 그려봐, 모자라면 이야기하고 알겠니?”
“네…….”
덜컹.
방문이 열리자 안에서 세 사람이 나왔다.
“오셨습니까.”
“아, 예…….”
현수는 수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세 부인들과 안으로 들어와서는 방패와 철퇴를 한곳에 나열하고 경번갑을 벗기 시작했다.
툭, 툭.
완갑을 벗고 다리에 찬 경갑은 수안궁주 왕 씨가 벗겨 주었다.
“부인, 수아 말입니다.”
“예…….”
“그림 선생 하나 알아봐 줘요. 그렇게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인데 제대로 된 선생 하나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수아랑 복이 글 선생도 좀 알아보고요. 아! 옥화와 선화에게 애들 좀 가르치라 하세요.”
“예? 그 둘에게 무얼 배우라는 말씀이십니까?”
“뭐긴요, 그 둘이 잘하는 거지. 고려 안팎이 안정적이라고는 해도 사람 일이라는 건 모르는 거예요, 사내만 칼을 익히라는 법이 있습니까. 자기 몸 하나 지킬 줄 알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리하겠습니다.”
김 씨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였다.
“위위경께서 구하시면 금방 구하실 거 아닙니까. 실력이 좋은 사람들로.”
연희궁주 왕 씨가 말하였다.
“관청의 일이 바쁘고 이것저것 신경을 써야 하다 보니 애들 일에 신경을 쓰지 못해 그럽니다.”
“송구합니다. 거기까지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말하였습니다.”
“음, 아니에요… 부인의 마음 잘 압니다. 부인의 말처럼 내가 구하면 바로 구할 수 있지요… 관청에서 일하는 관리들을 내 마음대로 내 자식 잘되고자 데려다 쓰는 건 아니니까요.”
현수는 그렇게 말을 하며 갑옷을 다 벗자 갑옷들 들고서는 밖으로 다시 나가 마루에 갑옷을 내려놓았다.
이렇게 하면 알아서 가져가서 손질해서 갖고 오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