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두두두두!
한쪽에서 말이 내달리는 소리가 들리자 장교들이 시선을 돌렸다.
조잡한 성을 지키던 거란장수들이 모두 도망가기 시작했고, 그 뒤를 이어 최대한 도망갈 수 있는 거란군 역시 도망치기 시작했다.
“대열을 갖추어라! 전투는 끝났다!”
손쉽게 이겨버린 전투에 피해도 그렇게 크지 않았다.
장수들의 외침 속에 속히 군사들이 대열을 갖추었다.
다그닥, 다그닥.
말소리가 들리면서 유유히 성문으로 들어서는 박존위와 최숙청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다시 요동지도를 펼치었다.
“우리가 여기쯤 있으니, 성 몇 개만 지나면 비사성입니다.”
“오늘은 여기서 쉬는 게 어떻습니까?”
“그래야지요, 지친 군사들이니…….”
박존위에게는 보였다.
비록 짧은 전투라고 하지만, 군사들은 대개 지쳐 있었다.
“전군! 이곳에서 오늘 밤 묵고 내일 해가 뜨는 데로 출정한다!”
“예! 장군!”
신호위 대장군 정충선이 장수들에게 명령을 내렸고, 장수들은 지휘관들에게 명령을 내리자 군사들은 빠르게 주위를 정리하기 시작하였다.
“파발을 띄어라.”
“예, 장군.”
파발이라는 말에 부장이 시선을 돌려 파발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자 파발은 곧장 말머리를 돌려서는 말을 타고 내달렸다.
* * *
그날 저녁.
동경부에서 가만히 앉아 고려와 거란 상태를 들어보는 이는 다름 아닌 완안형 이었다.
완안 올출이 돌아가면서 완안형을 동경부에 대기 시킨 것이다.
아버지인 완안 올출에게 이유를 물었지만. 그냥 이곳에서 전황을 살펴보라는 말뿐이었다.
“장군, 태원수께서 오셨습니다.”
태원수가 왔다는 말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덜컹.
방문이 열리며 태원수 완안 올출이 들어왔다.
“아버님, 오셨습니까. 대도에서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태원수는 완안형의 질문을 받자 환하게 웃음을 지었다.
“잘 되었어, 폐하께서도 동의하셨고.”
“허면…….”
“다시 고려로 가야지. 고려로 가서 직은 받고 수결을 받아야지. 그래야 맞는 게 아니겠냐.”
“대신들이, 가만히 있었습니까?”
“내가 폐하의 명을 받아왔고, 내가 모든 결정을 하였다. 그런데 누가 반대를 하겠느냐. 오히려 좋다고 난리더구나. 후방은 걱정이 없다고.”
“정말… 입니까?”
완안 올출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 걱정 없어, 그리고… 태학의 학생 일천 명을 데려왔다.”
“예?”
완안형은 깜짝 놀랐다.
“고려 국자감과 성균관에 넣어보려고. 지난번에 이 아비가 한 말을 잊었더냐???”
“아닙니다.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럼 되었다. 갔다 오는 김에 상단도 대거 이끌고 왔다. 그나저나 요동 남부 일대는 어떠하냐?”
“듣기로는, 상국이 파죽지세로 거란을 밀어붙이는 듯합니다.”
완안 올출은 고개를 끄덕였다.
“상국이 지금 어디쯤인지 아느냐?”
“석성과 은성에서 접전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석성과 은성? 중앙군만으로… 석성과 은성을 친다?”
완안 올출은 피식 웃었다.
“왜 그러십니까?”
“석성과 은성이라? 치열하겠구먼. 그 두 성을 치고 몇 개의 작은 성을 거치면 건안성이다. 거란족 가한 야율유가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어떻게든 고려를 몰아내려고 하겠지.”
완안 올출은 앞으로의 전투가 어떻게 펼쳐질지 짐작하고 있었다.
“그럼, 저희가 도와야… 하는 겁니까?”
“음, 무슨 소리. 고려는 우리가 돕겠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도움을 받지 않을 것이다.”
“왜요? 확고한 동맹을 맺으려고 하는 마당에 무엇 때문에 도움을 받지 않으려고 한다는 겁니까?”
“확고한 동맹이라고 하더라도, 군사문제 있어서는 조금 그럴 거야.”
“아!”
완안형은 무슨 말인지 바로 이해하였다.
“아버님, 몽고는 어찌 되었습니까?”
“예부상서가 일을 잘 처리한 듯하구나. 그리고. 테무진과 지금 사이가 틀어진 자무카가 그를 구르 칸이라는 칸의 지휘를 주었고, 금나라의 벼슬인 병부시랑(兵部侍郎) 직을 주었다.”
“그럼, 앞으로는…….”
“자무카가 있으니, 이제 테무진 그놈은 우리의 국경을 쉽게 넘보지 못할 것이다. 더불어… 자무카가 원한다면, 금나라와 무역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 하였고, 군사가 필요하면 내어주겠다고 하였다.”
“너무 과한 거 아닙니까?”
“차라리 그게 나아.”
완안 올출의 말에 완안형은 고개를 숙였다.
“내일 고려로 출발하겠다. 일 다 처리되면… 가능한 모든 성을 비워준다.”
“알겠습니다. 아버님.”
완안 올출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밖으로 나가려 하다 잠시 멈추어 서서는 완안형에게 다가가 귀에다 속삭였다.
완안형은 순간 깜짝 놀랐다.
“정말입니까?”
“그래.”
완안 올출이 미소를 지으며 밖으로 다시 나가자 완안형은 피식 웃으며 다시 자리에 앉아서는 가만히 지도를 보고 있었다.
* * *
“흠…….”
이의방은 심기가 매우 불편했다.
거란군의 저항이 너무 완강하기 때문이다.
“이러면 곤란한데…….”
이의방의 짧은 말에 장수들은 신경이 곤두서있었다.
이유는 해군과 합류가 늦으면 늦을수록 상황이 좋지 않게 되기 때문이었다.
좌우위(左右衛) 상장군 이영령, 감문위(監門衛) 상장군 최원호는 은성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흠, 하루빨리 한곳이라도 끝내야 하는데…….”
“합하, 소장에게 다시 한번 더 기회를 주시옵소서!”
“소장에게 기회를 주시옵소서!”
금오위(金吾衛) 상장군 우학유와 흥위위(興威衛) 상장군 돈장의 말에 이의방은 피식 웃었다.
“자네들 꼴을 봐, 내 꼴도 말이 아니야… 좀 쉬었다가 그리고 생각 좀 해보세. 어떻게 하면 될까 하고…….”
석성(石城)을 넘기 위해서 몇 가지 방법을 써보았다.
하지만, 문제는 거란군이 완강하게 방어에 집중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잘 공격하였지만, 가면 갈수록 적들의 공격이 완강하였다.
이 중에 공성 병기를 몇 개를 날려 먹었다.
거기에 개량한 석포(石砲)를 사용하는 데 있어서 문제였다.
평지가 아니고 석성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은성도 마찬가지. 건안성은 달랐다.
운제와 정란을 쓰기에는 군사들의 체력 소모가 너무 심했다.
이를 보완하기에 훈련을 거듭해서 정예병으로 만들었지만, 그래도 산악지형이다 보니 매우 힘든 전투였다.
“성벽을 타야 하나?”
이의방은 작게 읊조렸다.
성벽을 탄다? 오래전 현수와 만났던 때가 생각났다.
그 가파른 절벽을 오르내렸다는 이야기를 들은 이의방의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삼엄한 경비를 어떻게 뚫느냐는 것이었다.
“자네들, 특히 우 상장군.”
“예, 합하.”
“십수 년 전 현수를 만났던 그때를 기억하나?”
“예? 아, 당연히 기억합니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옵니다. 합하.”
“그런데, 그게 왜?”
“성벽을 기어오른다면? 어떨까? 현수가 절벽을 올랐던 때처럼, 저 성벽이 절벽이라는 가정하에 오를 수 있다면, 성문을 열 수 있을까?”
“합하, 해볼 만한 시도이옵니다. 위위경은 그때 약초를 캐려고 올라갔다 하였사옵니다.”
“그래, 그렇지? 그럼 절벽 잘 타는 군사들 좀 섭외를 해봐야겠구먼. 그럼, 저 삼엄한 성곽의 군사들의 시선을 돌려줘야지 가능성이 있을 거야.”
“군사를 찾는 건 소장이 하겠사옵니다.”
“합하, 최대한 군사를 한쪽으로 밀집을 시키는 게 어떻겠사옵니까?”
“그건 안 됩니다. 놈들이 오히려 더 이상하게 생각하면 합하께서 지금 계획하고 있는 게 모두 물거품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럼 어찌하겠다는 거요? 좋은 생각이라도 있는 거요?”
돈장이 우학유에게 물었다.
“우리가 지금 있는 곳은 여기 동문, 우리가 공격하는 문은 동문과 남문 그리고 북문입니다. 북문과 남문은, 길이 가파르오. 장창수가 움직이기에는 불편하지만, 팽배수는 늦어도 최대한 안전하게 올라갈 수 있는 곳이지요.”
“…….”
“지금 있는 이 동문보다 팽배수를 북문과 남문에 군사를 더 보충해서 공격을 가하고 합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성벽을 오르는 곳은 서문으로 하지요. 특히나 서문은 오르기가 더 가파른 곳이니 제가 말한 데로 한다면 정신없는 틈을 타서 성벽을 오르면 될 것입니다.”
우학유의 말을 들은 이의방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돈장 자네가 성벽을 탈 수 있는 군사를 준비하고, 우학유 자네가 말한 대로 한번 해보자고.”
“예, 합하.”
장수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자 이의방은 술병을 들고서 사발에 술을 따르고는 벌컥벌컥 마셨다.
“크~!”
목이 축축하게 적셔지자 사발을 내려놓은 이의방은 천천히 침상으로 가서는 누워 버렸다.
당장 거란군이 공격해올 일이 없으니 말이다.
그날 저녁.
저녁이 되어서야 일어난 이의방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술병을 다시 들었다.
술이 어느 정도 들어 있는걸 확인한 후에 사발에 다시 술을 따라 목을 축였다.
“밖에 부장있느냐!”
“예! 합하!”
군막을 젖히며 안으로 들어온 박지영이 고개를 숙이었다.
“준비는 어찌 되어가느냐?”
“상장군들께서 모든 준비를 마치었습니다. 합하의 명을 기다리는 중이옵니다.”
“그래? 하아~ 나도 늙었어… 이제는 지치는구나.”
“하, 합하.”
박지영은 이의방에게 말에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합하, 거란족과 전투가 끝나고 난 후 개경으로 바로 돌아가심이 어떠하시옵니까?”
걱정스러운 박지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니야, 피곤만 하지 아직 멀쩡해. 함경도까지는 문제없어. 박 장군.”
“예, 합하.”
이의방이 자리에 앉았다.
“자네가 내 옆에 있는지, 스무 해 되었나?”
“예, 스무 해가 조금 넘사옵니다.”
“그래, 벌써 그리되었구먼… 전쟁이 끝나고 나면, 팔관회나 한번 열든지 해야겠어. 팔관회도 안 연지 오래잖아?”
“예, 그렇사옵니다.”
“개경에는 팔관회, 남경에는 연등회가 있었고, 서경과 동경에는… 산천에 제를 지냈었고. 정주에서는 사해제를 지내었던가?”
하도 오래돼서 기억이 가물 가물가물한 이의방이었다.
“정확하시옵니다. 합하.”
박지영의 말에 이의방은 미소를 지었다.
“박 장군.”
“예, 합하.”
“우학유가, 노비이자… 사병으로 넣은 갑이랑 그 아이의 아우 을수가 있지?”
“그러하옵니다.”
“그 녀석들이 전투가 끝나면, 면천시키고 현수에게로 보낼 것이니. 자네가 그 두 애들에게 이야기해놔. 그래야 살기 위해서 싸우려 들겠지.”
“합하, 왜 그러시옵니까?”
박지영은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 이의방이 두려웠다.
마치 이제 세상 떠나갈 사람인 것 마냥. 하는 말이 영 적응이 안 되었다.
“오늘, 반드시 석성을 넘어야 한다.”
“예! 합하!”
이의방은 그렇게 말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박지영과 함께 나갔다.
밖으로 나오자 횃불을 들고 있는 군사들이 보였다.
이의방은 말을 타고 천천히 군사들 사이를 지나갔다.
“합하! 준비를 모두 마치었사옵니다!”
“여러 장수들은 위치로 가라!”
“예! 합하!”
지휘장수들이 곧장 자리로 이동하였다.
수많은 군사 그리고 서문으로 이동한 군사들은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장수들이 움직이는 걸 본 이의방은 크게 소리쳤다.
“전군! 공격하라!”
공격하라는 소리와 함께 북소리가 울렸다.
두웅~! 두웅~! 둥~!
부우우우우~!
나팔 소리가 함께 울리자 장수들이 소리치며 군사들을 지휘하였고 군사들은 전력을 다해 석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동문에 주둔한 군사들은 공성 장비를 이끌고 앞으로 나가고 팽배수들은 항상 선두에 서서 나아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