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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천하의 주인-144화 (144/159)

144화

“있습니다만… 부른다고 올지 모르겠습니다. 가족들도 있고…….”

“자네가 이렇게 한자리 차지한 채 떡 하니 앉아 있는데 안 올까? 대우 잘 해주겠다고 한번 소식이라도 띄워 보는 거 어때? 내가 잡직서(雜職署)에 한 자리라도 만들겠네.”

“그렇게 되면 남송과…….”

군기감장 남궁선의 말에 현수가 답하였다.

“남송과는 볼 거 다 봤어. 남송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서 해금을 할 거고, 합하께서는 남송이 산동 동로를 공격할 거라고 보시니까 말이야. 그 전에 가능한 기술자들을 고려로 빼 올까 하네. 남송이 산동 동로를 공격하면 기술자들은 전부 국가의 귀속 되지 않나 함부로 움직일 수도 없고.”

“그렇습니다. 남송이나 고려나 같다고 보시면 됩니다.”

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되었고… 내가 말한 데로 계속 진행해주게. 나는 사천감에 들러야 할 일이 있으니.”

“예. 위위경.”

세 사람은 고개를 숙였고, 현수는 군기감 밖으로 나갔다.

* * *

현수는 사천감으로 들어섰다.

사천감에 관리들은 현수에게 속속히 다가와 인사를 하였고, 현수는 그런 그들을 지나쳤다.

“사천감장 안에 있느냐?”

“예, 위위경. 안에 계시옵니다.”

현수는 사천감 관원의 말을 듣고서 문을 열고는 안으로 들어섰다.

사천감 안에서는 사천감 관원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덜컹.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사천감장은 사람이 들어온 것도 모른 채 책에 빠져 있었다.

현수는 천천히 사천감장, 이석에게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섰음에도 인기척을 못 들었는지 요지부동(搖之不動)이었다.

이에 현수는 말없이 사천감장이 들고 있는 책을 바라보았다.

사천감장은 두 개의 천문 관련된 서책을 보고 있었다.

“하아…….”

그러다 사천감장 이석에게서 깊은 한숨이 나왔다.

“무슨 일로 그리 한숨이신가?”

현수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사천감장은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언제 오셨습니까.”

“하하, 아니… 무슨 일이 있길래 사람이 왔는지도 모르고 책을 그리 뚫어져라 보는 겐가?”

“송구합니다… 생각할 게 있어서요.”

현수는 그대로 사천감장 옆자리에 앉았다.

“앉게.”

“예. 위위경.”

“무슨 점괘라도 안 좋은 게 나왔는가?”

“아닙니다. 오래전부터 기록된 것들을 다시 살펴본다는 게… 저도 모르게 푹 빠졌습니다.”

현수가 책 내용을 슬쩍 보았지만, 도저히 뭐가 뭔지 잘 모르겠어서 시선을 돌렸다.

“나한테는 다 같아 보이네.”

“하하! 이건 인종 황제 때 만들어진 것이고, 이건 최근에 기록한 것이지요.”

“아, 그래?”

“저… 위위경.”

“왜 그러나?”

“학문에 대해 여쭙는 건데… 혹시 천문학을 어찌 보십니까?”

“천문학? 난 몰라. 천문 볼 줄도 모르는데 그걸 왜 나에게 물어?”

“성균관에서 시계(時計)를 만들고 있는 거 아십니까?”

“아, 그 수운 의상대 말하는 거구먼. 지난번에 남송에서 가져온 거 그거야 알지. 한 번씩 와서 만들고 있는 거 보라고 난리를 쳐서 말이야.”

“그래서 말입니다만… 혹시 사천감에서도 만들어도 됩니까?”

“뭘?”

“현재 천문대에서 혼천의(渾天儀)를 가지고 천문을 기록하고 있지만, 혼천의보다 더 세밀한 기구가 필요합니다. 그렇게 되면 절기에 변화까지 제대로 읽어 낼 수도 있습니다. 신라 때 천문 현상이 이백여 개가 넘는 천문 현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금 혼천의가 아니라 혼천의보다 더 세밀한 기구를 만들어낸다면…….”

“만들 수는 있어?”

“예. 지원만 해주신다면 만들 수 있습니다.”

“정확도는?”

“설계해놓은 게 있지만, 생각만 해보았지 사용한 적은 없어서…….”

“설계도 보여줘 봐.”

사천감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벽장으로 가서는 종이를 꺼내어 가져와 펼쳤다.

이에 현수는 깜짝 놀랐다.

“…간의(簡儀)잖아.”

“…예?”

“어? 아, 아니야. 그래 이걸 만들겠다고?”

“예. 혼천의를 바탕으로 그린 설계도입니다.”

“뭘로 만들 거야?”

“청동으로 만들까 합니다만.”

“자네가 직접 할 거야?”

“예. 이에 관심 있는 성균관 학생들도 포함 시킬까 합니다.”

“어, 그래. 배우면 좋지. 그렇게 하게.”

“감사합니다. 위위경.”

현수는 미소를 지었다.

“아, 그리고 이것도 좋지만… 합하께서 오늘 개경을 떠나면서 자리를 하나 보라고 하시더라고. 새로운 관청을 짓는다고 하셨는데… 규모는 중서문하성, 상서성, 중추원, 어사대, 식목도감, 삼사를 한곳에 집결시키겠다고 하시대. 아마 그 관청을 통해서 모든 인사와 보고를 받으려고 하시는 거 같아. 물론 장수들이 대기하고 회의하는 관청도 만들어야겠지. 지금의 장군방처럼.”

사천감장 이석은 현수의 이야기를 듣고 물었다.

“지금 말씀하신 것들을 모두 한곳에 다 만드시겠다는 말씀이시지요?”

“그렇네. 행정처리도 해야지. 아마 규모를 크게 지어야 할 거 같아.”

“아무래도 개경 밖에 지어야겠지요?”

“아무래도 그래야겠지? 그렇게 된다면 대대적인 토목공사가 되겠군.”

사천감장은 잠시 생각을 하다 자리에서 일어나 벽장으로 가서는 지도를 이것저것 펼쳐 보았다.

그러던 중, 지도 하나를 유심히 본 다음에 가지고 자리로 돌아와서는 지도를 펼치었다.

“여기… 개경 밖 남쪽 파란색으로 표기한 부분과 송악산 서쪽 황궁의 반대편 이곳이 가장 좋은 자리입니다.”

“여기는 태조 황제의 무덤 옆이군? 그런데 표기는 왜 안 해놨어?”

“어찌 태조 황릉 옆에 표기하겠습니까.”

사천감장 이석의 말에 현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일리 있는 말이었다.

“그럼 이 자리는 배제(排除)하고… 여기 표기해둔 곳으로 하겠네.”

“예, 그럼 제가 일단 준비라도 대충 해놓겠습니다.”

“관청을 세우는 거니, 공부상서랑 어떻게 할 건지 잘 의논해서 시작해보게. 그리고 이 설계도 건은 호부상서와 이야기해 보겠네.”

“감사합니다. 위위경.”

사천감장 이석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뭐 더 필요한 게 있나?”

“지금 당장 필요한 건 없습니다. 이 설계도를 토대로 만들 수 있는 것만으로도 제 가슴이 벅찹니다.”

“아이고, 이 사람아… 아직 결정도 안 났어. 호부랑 이야기를 해봐야지.”

“예. 알겠습니다. 그럼 좋은 소식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사천감장 이석의 말에 현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 * *

며칠 후, 이의방은 역수 고개에 지었던 관문에 들어섰다.

“관문에서 쉬겠다.”

“예! 합하!”

“전군, 휴식이다! 휴식하라!”

좌우위 상장군 이영령이 외치자, 부장들이 속속히 말을 타고 뛰어다니며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탁! 탁탁!

“추웅! 합하를 뵙습니다. 역수 고개 관문 중랑장 황호열이라 하옵니다!”

“고생이 많구나.”

“아니옵니다. 합하! 서경유수께서 역수 고개로 군량미 20만 석을 보내오셨사옵니다!”

“그 정도면 육위의 군사들과 내 사병을 충분히 배부르게 먹일 수 있겠구나.”

“안으로 모시겠사옵니다!”

“음, 아니야. 여기서 군사들과 함께 있을 것이다. 그러니 가능하면 빨리 밥을 지어주는 게 좋겠는데.”

“예! 합하!”

중랑장 황호열이 고개를 숙이며 부장들에게 명령을 내리자, 이의방은 곧장 말 위에서 내렸다.

장수들 역시 말 위에서 내렸다.

“합하, 일단 관아로 들어가시는 게 어떠하시옵니까.”

“아니야. 군사들이 이 바닥에서 쉬었다가 밥 먹고 바로 서경으로 출발할 것인데 무엇이 걱정인가. 중랑장은 그만 가서 일을 보라.”

“예! 합하!”

중랑장 황호열은 결국 고개를 숙이며 몸을 돌려 자리로 돌아갔다.

“하, 일단 육포나 좀 뜯고 있자고.”

“예! 합하.”

“상석(上席)을 가져오라!”

“예! 상장군!”

흥위위 상장군 돈장의 명에 부장이 곧 움직였다.

곧이어 상석 의자를 가지고 이의방 앞에 놓자, 이의방은 의자에 앉았다.

툭!

오물거리며 육포를 씹는 이의방과 휘하 장수들이었다.

“그나저나… 위위경 말이야. 진짜 생각지도 못한 발상을 했어.”

“무엇이 말이옵니까?”

“주먹밥 말이야. 그 비싼 참기름에 밥을 비빌 줄 누가 알았겠나. 게다가 목이 메지 않게 뭇국도 끓이라고 했지.”

“하하하!”

“주먹밥을 먹으니 옛날 생각나는구먼… 그 맛대가리 없던 주먹밥도 주먹밥이라고… 하하하!”

“육포도 마찬가지입니다. 육포를 구워 먹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 덕에 군사들 훈련할 때 아주 입이 호강합니다.”

“위위경 덕에 그 비싼 참기름도 지금은 쉽게 구할 수 있지 않사옵니까. 그뿐만이 아니라, 감자 덕에 군사들의 사기가 복 돋아 오르고 있사옵니다.”

“그래, 그래야지… 군사들에게 먹이고 입히는 건 아끼면 안 돼. 아무리 정예군사라 하더라도 보급이 없고 먹지를 못하면 무슨 소용인가.”

“그렇습니다. 합하.”

이의방은 장수들의 말에 흡족하게 미소를 지으며 다시 육포를 뜯었다.

“간이 잘 배어서 아주 맛나.”

“하하, 이번에 또 무얼 가지고 올지 궁금하기까지 합니다.”

“듣기로는 지과라고 하던 거 같은데… 그게 아주 맛나다고 하더군요.”

“하하하하!”

이의방과 장수들은 먹는 걸로 이야기를 하다가 주위를 쭉 둘러보았다.

“왜 그러시옵니까?”

신호위 상장군 박존위가 물었다.

“아니야. 그냥 이 관문 잘 지었다고 생각이 나서. 아, 압록강을 넘으면 만나는 첫 번째 성이 박작성이지?”

“그러하옵니다. 박작성은 금의 성입니다.”

“태원수와 이야기는 다 해놨어. 박작성 지나가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을 거야. 오골성도 마찬가지고.”

“요동지도 펼쳐봐.”

“예. 합하.”

신호위 상장군 박존위가 품속에서 요동지도를 꺼내어 펼치었다.

“신호위, 천우위는 이 해안길을 따라 내려가면서 점령해 들어가고, 직접 적인 전투 지휘는 박존위가 해. 후방지원 및 추가 증원은 최숙청이 맡고.”

“예. 합하!”

두 사람은 힘차게 답하였다.

떠나기 전 미리 다 어떻게 움직일지 중방에서 장수들과 결론을 내렸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기에 이의방은 각 장수에게 한 번씩 되새겨 주었다.

“좌우위 상장군 이영령, 감문위 상장군 최원호 두 사람은 군을 이끌고 건안성이 있는 곳으로 선출전(先出戰)하여 본대가 건안성까지 갈 수 있도록 철두철미(徹頭徹尾)하게 준비하도록 해.”

“예. 합하.”

“알겠사옵니다. 합하.”

이의방은 장수들과 의논을 하고 있었는데, 그들 앞으로 중랑장 황호열이 다가왔다.

“합하, 모든 군사가 먹을 수 있도록 준비했습니다.”

“음, 그래. 가자!”

이의방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황호열은 고개를 숙이며 길을 안내하였다.

관문 중앙에 수많은 주먹밥이 쌓여 있었고, 수십여 개의 솥에는 뭇국이 펄펄 끓고 있었다.

“배부르게 먹이도록 해. 먹고 잠시 쉬었다가 서경으로 향한다.”

“예! 합하!”

박지영은 옆으로 가서는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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