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해봐.”
“…예?”
“원하는 대로 해보라고. 철로 삶아 먹든, 구워 먹든 알아서 하라고. 재물은 충분하니까 말이야. 형부 상서가 사찰 정리해서 조사해온 것들까지 하면 넘쳐. 그러니 양소에게 필요하면 얼마든지 가져다 쓰라고 해. 호부 상서에게는 내가 따로 일러두마.”
“감사하옵니다. 합하.”
현수는 고개를 숙이었다.
형부 상서 이린에게 조사하라 하였을 때, 어사대까지 동원해서 전국을 들쑤셔 놔버린 탓에 물증이 없었던 십 년 이상 묵었던 사건들을 모두 정리할 수 있었다.
그중에는 남녀 아이들 한 쌍씩을 기둥 모퉁이에 묻어 놓은 염호도 있었는데 평민 집은 물론 귀족 집에도 있었다.
집집마다 한 무더기의 해골들이 발견되었고,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어마어마한 숫자의 희생자들이 나왔다.
이의방은 연루된 자들의 가산(家産)을 모두 몰수(沒收)하고, 동참하던 자들까지 찾아내 개경으로 압송시켰다.
그들은 왼쪽 다리 힘줄을 끊어 내버리는 형벌을 내리고 억지로 치료한 뒤 물과 소금 외에 아무것도 주지 않고서 개경 남대가 입구에 사흘간 매달아 놓았다.
딱 죽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그 후로는 함경도 공역 장과 교주도 철광산으로 보내 버렸다.
처형을 시키라는 말도 많았지만, 당장 처형해 버리기에는 아깝다고 생각한 이의방의 선택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지난번 항거(抗拒)하던 승려들 역시 교주도 철광으로 보내 버렸고 그 사찰의 자산들만 모두 몰수하였다.
이 사실을 자세히 알지 못하는 현수는 이의방의 말에 웃으며 밖으로 나갔다.
* * *
저택으로 돌아온 현수는 사랑(舍廊)으로 들어왔다.
상위에 무언가 놓여 있자, 현수는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그림이었다.
그것도 아주 어설픈 그림이었다.
현수는 그림을 보자, 웃음이 나왔다.
이번에도 뭘 그린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런 그림을 한두 번 받아본 것도 아녔다.
현수가 그림을 고이 접어서 작은 함 속에 넣어 두고는 의자에 기대 눈을 감고 생각에 빠지었다.
“아버지!”
수아의 목소리가 들리자 현수가 눈을 번쩍 떴다.
“들어오거라.”
덜컹.
방문이 열리면서 수아가 복이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오자, 현수는 미소를 지었다.
“어쩐 일이냐?”
“아버지, 부탁이 있어서 왔습니다.”
“부탁…? 하하, 그래. 무슨 부탁이냐?”
“염료(染料) 좀 사주실 수…….”
“염료? 아니, 못살 일이…….”
“수아야!”
김씨가 따라 들어와 수아를 매우 다그치기 시작했다.
“아버님이 사랑에 계실 때는 들어가는 거 아니라고 하지 않았니!”
“하하, 부인. 괜찮습니다. 놔두세요.”
현수가 혼내려고 하는 김씨를 말리며 수아를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수아는 좋다는 듯 가까이 다가왔다.
“그래. 어떤 염료를 말하는 게냐?”
“파란색 염료인데요… 엄청 비싸대요.”
“비싸?”
현수는 피식 웃었다.
“안료가 얼마나 한다고. 하하하!”
“저… 그 안료가…….”
김씨가 말을 하다가 말문을 닫았다.
“무엇인데 그러합니까?”
“그게… 처, 청금석으로 만드는 염료라…….”
“청금석이요? 그게 얼마나 한다고. 이 아비가 구해주마. 그러니 아무 걱정 하지 마.”
“헤헤, 고맙습니다!”
수아가 덥석 현수를 끌어안자, 현수는 수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송구합니다.”
“송구할 일이 아닙니다. 아이가 그림 그리고 싶어서 하는데 그걸 말리면 쓰겠습니까.”
“그림입니까. 낙서지.”
“하하하!”
김씨도 수아의 그림 실력을 아는지 낙서라는 삐죽거렸다.
이에 현수는 크게 웃었다.
“수아야, 남대가나 갈까?”
현수가 수아를 보며 말하자, 수아는 좋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현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쉬지 않으셔도 되시는지요… 아이 때문에 그러시는 거면…….”
“아니에요. 마침 심심하던 차였어요. 애들 데리고 저녁이나 들고 들어오겠습니다.”
“예.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수아야, 아버지에게 너무 조르면 안 된다.”
“예. 어머니.”
수아의 말을 들은 김씨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현수는 수아와 복이를 데리고서 밖으로 나갔다.
대문 앞에선 현수는 최 집사를 마주하였다.
“최 집사, 정주에 대행수(大行首) 좀 들어오라 하게. 들어오면서 청금석으로 만든 염료랑 색상별로 염료를 열 근씩 사서 오라고 인편을 보내 전하게.”
“예. 위위경. 그렇게 하겠습니다.”
최 집사는 허리를 굽히며 답하였고, 현수는 아이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 남대가로 향하였다.
* * *
얼마 후, 남대가 초입으로 들어섰다.
역시 신기한 것들이 많이 들어와 있어 수아와 복이는 눈을 이곳저곳 두기 시작하였다.
“떡 먹을래?”
“떡이요!”
“떡!”
눈이 초롱초롱해진 아이들에 현수는 아이들을 데리고서 떡집으로 갔다.
“시루떡 두 개만 주게.”
“아이고, 위위경! 오셨습니까!”
자신을 알아보는 상인의 인사에 현수는 웃으며 상인의 인사를 받아 주었다.
“장사 잘되는가?”
“물론입니다!”
“따로 싸주게. 애들이 먹을 거라.”
“예! 위위경!
떡집 주인은 종이에 시루떡을 하나씩 싸주면서 두 손으로 건넸다.
현수는 떡을 받으며 소 은병 하나를 쥐여주었다.
“아이고, 위위경! 안 주셔도 되는데…….”
현수가 아무 소리 말라며 손짓하고는 떡을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는 다른 곳으로 이동하면서 천천히 구경하였다.
남대가를 이리저리 돌며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먹으면서 아이들과 재미있게 남대가를 구경하였다.
열심히 돌아다닌 탓에 녹초가 된 현수는 다원에 들어서 앉아 녹차를 마시고 잠시 쉬었다.
아이들은 다원에서 파는 만두와 다과를 맛있게 먹고 있었다.
수아는 먹다가 복이의 입술에 묻은 것들을 직접 닦아 주었다.
아이들이 우걱우걱 먹는 모습이 예뻐 현수는 미소를 지으며 수아의 입술에 묻은 것들을 닦아 주었다.
“천천히 먹거라. 체할라.”
“예. 아버지.”
“네.”
현수는 두 아이를 바라보며 말하고는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내려놓고서 밖을 보았다.
수많은 인파가 몰려 가격 흥정을 하며 물건을 사고파는 모습을 보다가 문뜩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런 활기찬 모습들이 사라지고 전쟁으로 암흑기를 맞이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하고 말이다.
지금 두 앞에 있는 아이들의 미래도 쉬이 예상되지 않았다.
그런 생각이 드니, 순간 눈앞이 캄캄하였다.
현수는 머릿속에서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을 잠시 되새겨 보았다.
‘하, 이럴 줄 알았으면 게임 하지 말고 공부만 미친 듯이 할 걸… 그것도 아니면 이것저것 만드는 법이나 배울 걸 그랬나?’
후회감이 밀려 들어왔다.
이에 아이들을 다시 바라보며 현수는 말하였다.
“얘들아, 너희들은 공부 열심히 해라…….”
“네? 네!”
둘이 볼에 음식을 머금은 채 대답하는 게 영락없이 귀여웠지만, 무슨 의미로 공부하라고 하는지 알일 없는 아이들은 그저 먹기만 바빴다.
“위위경.”
옆에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현수는 시선을 돌렸다.
예부 상서 유응규와 진우형, 증효운이 함께 있었다.
현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는 어인 일이십니까?”
“개경 구경을 좀 하고 싶다고 하셔서 제가 안내하는 길입니다. 그나저나 위위경께선 지금 위위시에 있을 시간 아닙니까?”
“아, 아이들 데리고 좀 나왔습니다. 위위시는 아랫사람들에게 맡기고요.”
“아, 예…….”
유응규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우형은 먹고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다가 눈에 유독 들어오는 한 아이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복이와 눈이 마주치자, 복이는 먹다가 살며시 고개를 숙이었다.
“오랜만이구나, 아가.”
진우형이 인사를 건네자, 복이는 아무런 대답 없이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후다닥 현수에게로 다가와서는 뒤로 숨어버렸다.
미세하게 떨리는 작은 손으로 옷깃을 꼭 부여잡았다.
“아이가 무서워하네요. 수아야, 동생 데리고 저번에 간 주막에서 기다리고 있거라.”
“네. 아버지.”
수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복이에게로 다가가 손을 잡고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현수가 호위들에 손짓하자, 호위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들을 따라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앉으시겠습니까?”
예부 상서 증효운을 바라보며 묻자, 진우형은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들이 앉았던 자리에 좌정하였다.
현수는 그릇들을 한쪽으로 치워주며 찻잔을 세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는 찻물을 찻잔에 따랐다.
“개경 구경은 어떠십니까?”
“하하, 재미있게 구경하였습니다. 임안의 저자보다 훨씬 더 활기차네요.”
증효운이 미소를 지으며 말하였다.
“위위경.”
“예. 예부 상서.”
“지난번에 말씀하셨던 실학(實學)이란 학문은 어떻게 잘 되어 가는지요?”
“잘되어갑니다. 각기 성향에 맞고 원하는 학문을 찾아서 배우는데 당연히 잘 되어 가지요. 공자와 맹자 말을 좋아하고, 예문에 관련된 것들을 좋아하는 학생들은 대부분 국자감으로 갔습니다. 다른 학문을 원하는 이들은 성균관(成均館)이라는 곳으로 갔고요.”
“아, 그렇군요. 하면… 그 학문을 통해서 어떤 걸 이루고자 하십니까?”
“이 나라에 수많은 인재를 키우기 위한 발판이지요. 학문이라는 게 뭐 별거 있습니까. 누구나 똑같이 배우고, 그 배움을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중요하지요.”
“하하, 옳으신 말씀인 듯합니다. 이곳저곳 돌아다녀 보니, 고려에는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아이들이 많더군요.”
“개경뿐만이 아니라, 다른 곳곳에도 많을 겁니다.”
“위위경께서는 이 나라의 학문에 있어서 많은 걸 이루려고 하시는 듯 보입니다. 여기 예부 상서께서 말씀하시길 성균관도 위위경께서 생각하신 거라면서요?”
“예. 그렇습니다. 학문도 여러 가지인데 한 가지만 치우쳐 있어서는 안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현수와 남송 예부 상서 증효운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위위경, 위위경께서 힘 좀 실어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힘을 실어달라니까요?”
“…모른 척하시는 겁니까?”
“무슨 의미인지?”
“고려는 지금쯤이면 화포를 개발하고 있겠지요. 화약(火藥)도 필요하시겠네요. 남송에서 해금령(海禁令)을 걸면 어떻게 거래하시려고 합니까?”
“하!”
진우형의 말에 현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지금 협박하는 거요? 이 고려에서… 감히 나를?”
현수의 눈빛이 바뀌었다.
이에 진우형은 침을 꿀꺽 삼키었다.
본인이 말을 잘못했다간 현수는 지금 이 자리에서도 허리에 패용(佩用)한 검을 뽑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숨을 가다듬은 진우형은 말하였다.
“물론 금지한다고 해도 남송 조정에서 반대하겠지요. 하지만 금나라에 화약과 화포에 대해 일절 거래를 하지 않겠다고 하신 약조는 잊지 않으셨겠지요?”
“…하게 된다면?”
“남송도 조치를 취할 겁니다. 양소 하나 없어도 화포를 개발할 자는 남송에 넘치게 있습니다.”
양소의 실력을 잘 아는 진우형의 말을 예부 상서 증효운 입을 통해 듣자, 현수는 인상을 찡그렸다.
“고려를 공격하겠다는 소리로 들리는군.”
“어떻게 들리시든 저는 반드시 해금령(海禁令)을 건의할 겁니다.”
“금나라를 통해서 거래하면 그만이오. 해금령? 하고 싶다면 마음대로 하시구려.”
현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예부 상서 유응규 역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위위경, 감정적으로 대하지 마시고…….”
“감정적이요? 제가 감정적입니까?”
“위위경, 일단 말을 끝까지 들어보시지요.”
예부 상서 유응규의 말에 현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다.
어차피 진우형과 한 이야기들은 예부 상서가 이의방에게 반드시 보고할 것이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