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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천하의 주인-136화 (136/159)

136화

며칠 후.

현수는 자리에 앉았지만, 등을 벽에 기대지도 못한 채 약만 퍼질러 먹고 있었다.

안색은 여전히 창백한 현수였다.

아직 회복되기엔 이른 것 같았다.

“좀 더 엎드리시지요.”

수안 궁주 왕씨의 말에 현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오랫동안 엎드려 있지 않았습니까.”

“너무 무모하셨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 정도까지 맞으셨다는 말입니까.”

연희 궁주 왕씨의 말에 현수는 피식 웃으며 그녀를 바라본 채로 말하였다.

“내가 시킨 일이니, 혹여나 악정 그 사람을 보면 너무 나무라지 마세요.”

현수의 말에 세 부인이 침묵을 지키자, 현수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어째서 대답들이 없으십니까. 그리고 이렇게 금방 쾌차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너무 신경들 쓰지 마세요.”

“아직 젊다고 하지만, 앞으로는 이러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김씨의 말에 현수는 답하였다.

“예. 마님.”

“놀리지 마십시오, 진심으로 걱정되어서 하는 말입니다.”

“놀리는 거 아닙니다. 더는 이런 바보 같은 짓 안 하겠습니다. 약조 드리겠습니다.”

현수가 채찍질을 맞고 부하의 등에 업혀 갔다는 소문이 퍼지자, 모든 이들이 행동을 조심하기 시작했다.

많은 이들에게 본보기가 된 셈이었다.

“아, 내가 지난번에 말씀드린 거 있지 않습니까. 어떻게 되어 가고 있습니까?”

“송구합니다. 마땅한 사람이 없네요.”

“음… 그렇군요. 그럼 부인들이 좀 고생해주셨으면 합니다.”

“아이 돌보는 일이라면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김씨의 말에 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습니다. 덕분에 양소도 한시름 놓고 일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나 대신 부인들께서 지금 짓고 있는 양소의 집을 좀 살펴주세요. 대목장이 알아서 잘하겠지만, 그래도 안 살림 책임지는 분들이 좀 더 신경을 써주면 좋을 듯합니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양소의 집은 현수의 저택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대문을 나와, 이십 보만 가면 양소가 머물 저택의 대문이 보일 만큼 가까웠다.

그곳에 집을 짓기 위해 약 다섯 채의 집들을 사서 허물었고, 기존에 있던 집 주인들에게는 좋은 값을 쳐주고 그들은 광화문 밖으로 이주시켰다.

현수가 짓고 있는 양소의 저택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 * *

석 달 후.

중방은 난리가 났다.

요동성 동경부를 거쳐, 흥화진에 금나라 사신이 당도하였다는 급보(急報)를 받아서였다.

사신은 금나라 황제의 숙부인 완안 올출이었다.

송나라 정벌의 선두주자였던 그가 고려로 오고 있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혹시 잘못된 보고가 아닌지 흥화진에서 보낸 장계(狀啓)를 몇 번이고 살피었지만, 몇 번을 읽어도 올출이라는 이름이 명확하게 쓰여 있었다.

거기에 더불어 둘이 시간을 맞추기라도 했는지 남송의 사신 이부상서 진우형이 벽란도에 상륙했다는 급보도 받았다.

“미쳐 버리겠구먼… 얘들 대체 왜 이래?”

이의방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하였다.

안 그래도 지금 할 일이 태산인데 사신이 왜 하필 이때 오는 것인지.

딱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합하, 금나라, 남송 사신 모두 홀대해서는 아니 됩니다.”

예부 상서 유응규의 말에 이의방은 고개를 끄덕였다.

“위위경과 예부 상서가 직접 마중하게.”

“예. 합하.”

벽란도에 도착한 남송 사신을 맞이하기 위해 예부 상서와 현수는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좌복야, 우복야.”

“예. 합하.”

“금나라 사신, 남송 사신 접대에 소홀함 없이 준비하시오.”

“그리하겠사옵니다. 합하.”

“나는 폐하께 이 사실을 알리러 가겠소. 그리고 금오위 상장군.”

“예. 합하.”

금오위 상장군 우학유가 답하였다.

“개경뿐만이 아니라, 그 일대까지 경계를 강화하시오. 흥위위 상장군은 직접 2령의 군을 이끌고 북조의 사신을 정중하게 모셔오게.”

“예. 합하.”

이의방은 그렇게 명령을 내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곧장 황궁으로 향하였고, 신료들 역시 중방 회의가 끝나자마자 각자 자리로 돌아갔다.

* * *

한편, 현수와 예부 상서 유응규는 남문을 나와 벽란도로 향하고 있었다.

형식상 오는 관례도 아닌 터라, 급하게 역관을 대동한 채로 두 사람이 남송 사신단을 맞이하기 위해 출발한 것이다.

“위위경, 북조와 남조의 사신이 오는 이유가 뭐라고 보십니까?”

“글쎄요… 저도 갈피가 잡히지 않습니다.”

예부 상서 유응규도 현수도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이들이 무슨 연유로 사신을 파견하였는지 쉬이 예측할 수 없었다.

“저들이 왜 왔는지는 이야기 들어보면 알겠지요. 일단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시지요.”

“예. 맞는 말씀입니다. 지금 만나러 가는 입장인데, 힘을 빼서 뭐하겠습니까. 하하하!”

“그나저나… 북조에서 완안 올출이 직접 올 줄 생각도 못 하였습니다.”

“아는 자입니까?”

현수의 물음에 예부 상서가 답하였다.

“송나라 정벌에서 선봉을 선 이가 완안 올출입니다. 금 태조의 다섯째이지요. 지금 팔순이 다 되었는지, 팔순을 넘었는지 나이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듣기로는 모든 전쟁에서 단 두 번 패했다 합니다. 남송의 한세충과 악비에게요.”

“하하, 그렇습니까?”

현수는 크게 웃었다.

“그런 명장이 고려에 올 줄은 생각도 못 했습니다.”

“사묘아리에 버금가는 명장이지요.”

“사묘아리? 아… 그 사묘아리 말입니까?”

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묘아리를 모를 수가 없었다.

금나라의 전설적인 인간이자, 무패(無敗)의 장수인 사묘아리를 말이다.

“위위경께서도 올출의 명성을 들어보셨다면 익히 아실 겁니다. 송의 수도인 개봉을 함락시키고 휘종, 흠종 더불어 황족들을 모두 금나라 태종에게 포로로 데려간 자이기도 하지요.”

예부 상서 유응규의 말에 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현수 역시 완안 올출이 얼마나 명장(名將)인지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한참을 벽란도 쪽으로 말을 움직이자, 저 멀리서 남송의 깃발이 보였다.

낯이 익은 얼굴이 현수의 눈에 들어왔다.

이부상서 진우형과 예부 상서 증효운이었다.

점점 더 가까워지자, 그들의 모습이 명확하게 보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위위경.”

증효운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예부 상서… 공께서도 오셨군요.”

진우형이 살며시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자, 예부 상서 유응규와 현수 역시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였다.

“고려에 오신 것을 환영하는 바입니다. 저희가 길을 안내할 테니, 개경으로 가시지요.”

예부 상서 유응규와 현수가 사신 양옆으로 가며 다시 개경 쪽으로 방향을 옮기었다.

“그나저나 어쩐 일로 이 먼 고려까지 오셨습니까?”

현수가 증효운에게 묻자, 증효운은 쉽게 답하지 못했다.

그러자 이상하다는 얼굴로 이제 시선을 돌려 진우형을 바라보았다.

시선을 느낀 진우형은 미소를 지으며 현수에게 말하였다.

“폐하의 명을 받고 온 것이라고 하십니다. 먼저 고려의 황제 폐하를 알현하고, 상국 합하와 이야기를 나누겠다고 하시네요.”

“참 이상합니다. 시간을 딱 맞춰서 금나라 사신과 함께 오시다니요.”

“…예?”

증효운은 금나라 사신이라는 말에 화들짝 놀라며 진우형에게 곧장 조용히 전했다.

진우형 역시 깜짝 놀라며 현수에게 물었다.

“금나라 사신이 언제 왔냐고 여쭙습니다.”

“흥화진에서 장계(狀啓)를 보내어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었으니… 금나라 사신은 현재 서경에 당도하였을 겁니다.”

서경이라는 말을 들은 진우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가 보내드린 기술자는 잘 있습니까?”

진우형의 물음에 역관이 통역하였다.

“당연히 잘 있지요, 귀국에서 보배 같은 자를 보내주셨는데 어찌 소홀히 대하겠습니까. 양소 역시 이 고려 생활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진우형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두 시진 후, 남송의 사신들이 개경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곧 황궁으로 들어가 황제를 알현하였다.

“황제 폐하, 아국(我國)의 상 황제 폐하와 금상 황제 폐하를 대신하여 하례(賀禮) 드리옵니다.”

예부 상서 증효운이 대표로 말하였다.

“어서 오시오. 고려말이 유창하시구려.”

“황공하옵니다. 폐하.”

“귀국의 두 황제들께서는 강녕하시오?”

“예. 폐하.”

“이렇게 먼 길을 오셨는데, 성대하게 준비하지 못한 점 이해하길 바라오.”

“아니옵니다. 소식도 없이 이렇게 왔는데 환대라고 해주시어 감사할 따름이옵니다. 폐하.”

“하하, 곧 사신들을 위한 연회를 마련할 것이니 그때까지 객관에서 푹 쉬시구려.”

“감사하옵니다. 폐하.”

증효운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이었다.

“이 상국, 두 사신분을 잘 접대해주시구려.”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폐하.”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황제가 사라지자, 사신들은 따로 이의방을 만났다.

이의방 주위에는 수많은 문, 무의 신료들이 자리하였다.

이의방은 좌정(坐定)하라며 손짓하였고, 진우형은 이의방에게 최대한 예를 차리며 자리에 앉았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남송의 사신분들께서 여기 고려까지는 어인 일러 오시었소?”

이의방은 고려 땅에 온 이유나 빨리 말하라는 듯 재촉했다.

“상국 합하, 아국의 황제 폐하께서 고려와 손을 잡고 싶어 하시옵니다.”

남송의 예부 상서 증효운이 미소를 지으며 말하였다.

“고려말이 유창하시군요.”

“감사하옵니다. 상국 합하.”

“남송 황제께서 고려와 손을 잡으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이오?”

진우형의 뒤에 있는 역관이 함께 통역해주었다.

“금을 치기 위함입니다.”

진우형은 이의방을 바라보며 말하였고, 이의방의 뒤에 있던 역관이 통역해주자 이의방이 피식 웃었다.

“어이가 없구먼. 남송은 전쟁을 원하지 않는 거 아니었소? 지난 금상 황제께서 직접 나갔다가 임안에서 보급을 보내주지 않아서 전쟁이 끝난 거로 아는 데.”

“그건 맞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사정은 다릅니다.”

“사정이 다르다? 무엇이 말이오?”

“지난번에는 남송의 사정이 여의치 않았사옵니다. 더군다나 금나라가 고려에 도움을 요청하였고, 고려가 금의 청을 들어주었기 때문에 전쟁의 어려움이 있으리라 판단하여 임안에서 전쟁을 끝을 내려 한 것이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이 기회에 고려와 남송이 손을 잡고 금을 친다면 반드시 좋은 결과가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진우형의 말을 들은 이의방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남송에서는 금나라를 어떻게 보고 계시오?”

“이제 그 끝이 다했다고 볼 수 있지요.”

“끝이 다하였다? 그건 너무 이른 말 아닌가?”

“직접 공격해보시면 제 말이 무슨 말인지 아실 것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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