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악비의 아들이라니요?”
“아, 다 죽은 줄 알았는데 그 자식이 멀쩡히 고려에서 살고 있더군요. 자세한 건 짐도 모르는 일입니다. 숙부님은 궁금하지 않습니까?”
금나라 황제가 미소를 지으며 올출을 바라보았다.
“하! 살아있다니… 참으로 다행이군요.”
올출이 피식 웃자, 금나라 황제 역시 미소를 지었다.
“숙부님, 혹시나 남송의 사신을 만나시면 말입니다. 그냥 인사만 하시고, 상대하지 마세요. 오로지 고려의 조정 신료들만 상대하셔야 합니다.”
“예. 폐하.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남송이 무슨 조건을 내걸든 간에 절대 고려가 손해 보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 가지고 있는 산동 반도 일대를 고려에 내어준다고 하십시오.”
“예!?”
올출은 깜짝 놀랐다.
반도의 일대를 내어준다는 건 금나라 영토를 내어준다는 것과 다름없었다.
특히 그곳은 많은 곡물을 수확하는 금나라의 거대한 곡창지대였다.
그곳에서 나오는 해산물 또한 더욱더 말할 게 없었다.
그런 땅을 내어준다는 황제의 말에 완안 올출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폐하, 그건 아니 됩니다. 그 땅이 얼마나 풍요로운 땅인지는 폐하께서 더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런 영토를 고려에 떡을 주듯 내어주신다니요!”
“지금 고려가 있어서 후방이 그나마 안전한 겁니다. 산동뿐만 아니라, 저들이 더 원한다면 요동까지 내어줄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폐하!”
“지금 타 부족은 물론이고, 거란족도 우리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나마 요동을 지킬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을 회유하고 있어서지요. 이 부분에는 숙부도 아실 거 아닙니까.”
“폐하, 명만 내리시옵소서. 금의 명을 받지 않는 부족과 거란족 모두 신이 처리하겠사옵니다.”
올출은 호언장담(豪言壯談)을 하였다.
하지만 금나라 황제는 고개를 저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강제로라도 따르게 할 수 있지만, 때가 되면 머리를 다시 치켜세울 거란족이요. 지금은 때가 아닙니다. 지금 저들은 관리하고 감시할 수 있는 건 고려입니다. 더군다나 내가 왜 저 고려에게 요동을 내어 줄 거라는 생각을 한 지 아십니까?”
“어째서… 입니까?”
“저들이 확실한 명분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들이 마음을 먹고, 명분을 치켜세운 채 요동으로 밀고 들어온다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엄청난 피해를 봐야 할 것입니다.”
“폐하, 명분이라니요…? 저 고려가 명분을 가지고 있다는 건 무슨 말입니까?”
이해하지 못하는 올출이었다.
“저들의 국호가 왜 고려겠습니까. 요나라가 멸망시킨 국가가 어떤 국가입니까.”
올출은 금나라 황제의 말에 눈이 번쩍 뜨였다.
지금 말한 게 무슨 뜻인지 알았기 때문이었다.
“허면… 저들이 요동을 점령해야 할 명분을 내세운다면…….”
“막기 어려울 겁니다. 고려라는 국호가 고구려를 계승하였다는 뜻에서 건국된 나라입니다. 그런 고려가 지금 군사력을 증강시키고 있다는 건 요동을 노리고 있다는 거로 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다른 꿍꿍이가 있을지도 모르고요.”
“폐하,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폐하의 뜻에 따라 고려에 다녀오겠습니다. 그런데 궁금한 게 한가지 있습니다.”
“예. 말씀하세요.”
“어째서 고려가 원하는 만큼 내어주실 생각을 하신 겁니까?”
“고려의 힘을 좀 보고 싶었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또 재물이라는 게 들어오면 나가고 나가면 들어 오는 거 아닙니까.”
“예.”
“더불어 숙부에게 황제의 권한을 드릴 테니, 고려와 함께 나아갈 수 있는 방향을 가지고 와주시길 바랍니다.”
금 황제의 말에 완안 올출은 허리를 굽히며 천천히 뒤로 물러나 밖으로 나갔다.
“하아…….”
올출이 밖으로 나가자, 금 황제는 한숨을 내리 쉬었다.
지금껏 밖의 일을 유심히 살피며 내정을 완벽하게 이루었다.
이제야 차츰 나라가 안정되었는데, 이제는 국방에 힘을 써야 했다.
예상 못 한 일들이 한두 개가 아녔다.
위로는 몽고, 아래로는 남송, 거기다가 국력이 거세지는 고려까지.
특히 고려는 반드시 손을 잡고 나아가야 할 국가 중 하나였다.
만약 고려를 적으로 두게 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생각조차도 하기 싫었다.
앞 뒤로 적이 껴있는 형국(形局)에서 금나라의 미래는 쉬이 예상할 수가 없었다.
“밖에 있느냐.”
“예. 폐하.”
문이 열리면서 호위장이 안으로 들어섰다.
“폐하!”
호위장이 손을 가슴에 두고 인사하였다.
“예부 상서를 불러오라.”
“예. 폐하.”
호위장은 고개를 숙이며 금세 밖으로 나갔다.
예부 상서를 통해서 몽고의 테무진과 숙적인 자무카에게 사신을 보내기 위함이었다.
* * *
“뭣이! 감히 제 놈들끼리 편을 갈라!”
쾅!
견룡행수 오숙비의 보고를 들은 현수가 상을 내려치며 말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것처럼 보였다.
“제가 몇 번 경고하였습니다만…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진행이 되어 위위경께 고하옵니다.”
과거를 치른 견룡군 장교들과 과거를 치르지 않은 지휘관들 간에 문제가 생겼다.
과거를 치르고 당당히 관직에 오른 장교들이 과거를 치르지 않고, 음서나 추천을 받은 장교들의 명령을 따르지 않겠다고 선전포고(宣戰布告)를 했다고 전했다.
처음에는 오숙비도 이러다가 말겠지 싶어 장교들에게 주의만 주고 넘어갔다.
하지만 갑자기 일이 이렇게 불거진 바람에 현수에게 보고하러 온 것이었다.
“먼저 시작한 놈이 누구야?”
“그게…….”
“뻔하지. 과거 치른 놈들이 먼저 시작했을 거야. 견룡행수.”
“예. 위위경.”
“싹 다 위위시로 불러들여. 내가 정리할 테니까.”
“예! 위위경!”
견룡행수 오숙비가 고개를 숙이며 곧장 위위시 밖으로 나갔고, 현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위위경, 어찌하려고 하십니까?”
천시호가 물었다.
“어찌하기는 잡아 놔야지.”
“설마 또… 참형(斬刑)에 처하려고 하십니까?”
악정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어오자, 현수는 피식 웃었다.
“참형? 아니, 참형보다 더 아픈 벌을 내릴 생각이네. 아예 그냥 몸에 새겨줘야지. 악 장군, 위위시 앞에 형틀을 들이게.”
“예…? 아, 예… 위위경.”
악정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설마 몽둥이로 패려고 하는 건가?”
정균의 물음에 현수는 고개를 저었다.
“채찍질 좀 해주려고요. 그래야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새기지 않겠습니까. 끝까지 가기 전에 미리 정리해야겠지요. 이참에 이런 짓들 못하게 본보기를 보여야 합니다.”
“때려죽이겠단 말인가?”
정균이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형님, 목을 베는 게 나을까요? 다리 힘줄을 끊어내고, 파직(罷職)을 시키는 게 나을까요?”
안색이 싹 바뀌는 현수의 표정을 본 정균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였다.
천시호 역시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저리 놔두면 나라의 분란만 일으키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이참에 그런 생각을 가지지 못하도록 단단히 정리해야지요.”
현수는 주먹을 꽉 쥐었다.
“혹여나 하는 말이네만… 훈련소를 설치하면 똑같은 상황이 벌어지지 않겠는가? 훈련소 출신이다, 비(非)훈련소 출신이다… 이런 이야기가 나올까…….”
“해보라고 하세요. 그때는 온몸에 돌을 매달아 예성강이나 서해에 던져 버릴 테니.”
현수는 씨익 입꼬리를 올리었고, 정균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아…….”
천시호가 크게 한숨을 내쉬더니, 현수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위위경, 어째서 점점 잔인해져 가십니까. 이런 말씀 할 때 다들 말은 안 해도 살 떨려 하는 거 아십니까? 학생들을 때려죽이는 분은 위위경밖에 없습니다. 진압하는 것도 아니고 때려죽이고, 이제는 뭘 어떻게 하신다고요?”
천시호가 발끈하자, 현수는 가만히 천시호를 바라보았다.
“다리의 힘줄을 끊고, 바다에 던져 버리신다고요? 너무 하신 거 아닙니까? 그들이 나라의 반역을 저질렀습니까, 아니면 폭동을 일으켰습니까. 명을 따르지 않았다고 해서 그렇게 모질게 구시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이 사람아, 그만해!”
정균이 급하게 천시호를 말렸지만, 천시호는 마저 할 말을 다 했다.
양소는 분위기가 험악해지는 걸 느꼈는지 현수와 천시호의 표정을 번갈아 보았다.
“뭘 그만하라는 것입니까? 차라리 곤장(棍杖)을 치십시오. 잘해줄 때는 그렇게 잘해주시다가 갑자기 이와 같은 상황이 한 번씩 터지면 왜 그렇게 무섭게 변하십니까.”
천시호의 말을 듣던 현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자네의 말도 맞네. 그런데 이건 엄연한 항명(抗命)이고, 분란(紛亂)이네.”
“그저 혈기왕성한 장교들입니다. 그런 장교들을 고작 그런 이유로 본보기로 목을 치고 매를 치신다면 누가 이 견룡에 남아 있겠사옵니까!”
“지금 자네가 나를 가르치려는 건가?!”
“…….”
“훗날 이 나라가 전시(戰時) 상태에 빠지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나! 나는 지금 그 시발점(始發點)점을 잡아 끝내려고 하는 것이야. 자네, 이런 나하고 그냥 같이 있기 싫으면 언제든지 말하게 다른 곳으로 발령 내줄 테니.”
“위위경… 그런 뜻이 아닙니다.”
“형님도 말씀만 하세요. 응양군이든 용호군이든 보내 드릴 테니.”
현수는 더 이상 천시호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었다.
“위위경께서 말씀하신 장교들과 지휘관들이 모두 들었사옵니다!”
한참 동안을 이야기하다가 밖에서 견룡행수 오숙비의 말이 들려오자, 현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정균과 천시호, 양소도 현수의 뒤를 따르며 밖으로 나갔다.
덜컹!
방문이 열리며 안에서 현수가 나오자, 장교와 지휘관들은 소리쳤다.
“추웅!”
“충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현수는 조용히 혼잣말하였다.
그들이 모인 자리에는 현수의 명령대로 가져다 놓은 형틀이 놓여 있었다.
형틀 뒤에 서있는 악정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아무래도 가지고 들어오려고 하다가 안에서 들린 소리 때문에 그냥 밖에 있던 모양이었다.
현수가 천천히 신을 신고서는 앞으로 나아가 장교들과 지휘관들을 쭉 훑어보고는 외쳤다.
“견룡행수에게 이야기를 다 들었다. 어느 놈이 먼저 시작한 것이냐. 견룡행수에게 명을 해 끌어내기 전에 먼저 나오라.”
현수의 말은 나긋나긋했지만, 위엄(威嚴)이 있었다.
현수의 말에 지휘관들과 장교들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나오지 않는구나. 그럼 친히 끌어내겠다. 견룡행수.”
“예! 위위경!”
“주동자들을 끌어내라!”
“예!”
견룡행수 오숙비가 큰소리로 호명(呼名)하였다.
“상준서, 우종현, 박대성, 홍지석, 주성숙은 앞으로 나와라!”
호명되자마자 몇몇 이들이 움찔하더니,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왔다.
“꿇어라.”
이들은 현수의 명에 모두 무릎을 꿇었고, 현수는 호명된 이들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지휘관들의 명을 따르지 않은 죄를 묵과(默過)할 수 없다. 나는 오늘 이 자리를 빌려, 다시는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이들을 엄하게 벌할 것이다. 부장들은 들어라!”
“예! 위위경!”
“호명되어 앞으로 나온 이들을 참수(斬首)하여 모든 이들이 볼 수 있도록 죄명을 적어 저자에 효수(梟首)하고, 이를 묵과(默過)한 장교들은 곤장 팔십 대에 처하도록 하라.”
“위위경! 살려 주십시오!”
“살려주십시오! 위위경!”
호명된 이들은 살려달라며 싹싹 빌기 시작했다.
지휘관들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서로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이들도 웃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