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용수 전 밖으로 나온 진우형은 금상 황제를 알현하였다.
“지금 이 와중에 고려로 사신으로 간다니?”
“태상황제께서 윤허하셨습니다.”
금상 황제가 눈살을 찌푸렸다.
“고려로 간다고 해봤자, 좋은 소식 같은 건 없을 것이다.”
“지금 주전파의 말에 따라 실행에 옮기려 하신다면, 작금의 고려가 가장 필요할 때이옵니다.”
“뭐라?”
“폐하께서 주전파의 말에 더 귀를 기울이고 계신다는 거 신은 알고 있사옵니다. 주화파 신료들의 말도 옳은 말이긴 하지요. 하지만 이 두 가지를 모두 채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고려가 필요하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금상 황제는 진우형의 말을 듣고 물었다.
“고려와 손을 잡으면 폐하께서 원하는 북벌 감행할 수 있을 것이며, 주화파가 원하는 방향대로도 진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는 건… 우리가 송의 영토 일부분을 확보할 수 있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지금 저희가 송의 영토를 확보한 이때, 가장 가깝고도 풍요로운 곡창지대를 얻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주화파, 주전파 만족할 만한 성과를 얻어낼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좋겠지만… 고려가 남송과 손을 잡겠느냐? 잡는다고 하더라도 이에 상응하는 대가를 요구해올 것이 아니냐.”
금상 황제의 말에 진우형은 침묵을 지켰다.
황제의 말대로 고려가 어떤 요구를 해올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는 걸 잘 아는 진우형이었다.
“그래도 물어볼 수 있게 폐하께서도 윤허해 주십시오.”
“다녀오게.”
금상 황제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자, 진우형은 읍(揖)하였다.
* * *
그날 저녁.
진우형은 자신의 저택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앉았다.
“후우…….”
끼익.
그때 방문이 조심스레 열렸다.
문 너머로 자신을 향해 아장아장 걸어오는 아이가 보이자, 진우형은 미소를 지으며 양팔을 벌리더니 아이를 끌어안아 그대로 무릎에 앉히었다.
그리고 곧 양소의 전 부인이자, 자신의 첩이 된 이가 안으로 들어섰다.
시녀들은 술과 음식들을 가지고 상위에 올려두기 시작하였다.
음식과 술이 다 올라가자, 시녀들은 허리를 숙이며 인사하고는 곧장 밖으로 나갔다.
“앉으시오. 부인.”
진우형의 말에 그녀는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일상인 것처럼 진우형의 술잔에 술을 따라 주자, 진우형은 그녀를 바라보다가 술잔을 들어 한잔 마시었다.
“효경, 얼굴이 왜 그러오?”
진우형이 부인의 이름을 부르며 얼굴이 왜 그런지 물었다.
지금 그녀의 얼굴을 한쪽이 살짝 부어 있었다.
“설마 또 손을 댄 거요?”
진우형의 물음에 그녀는 침묵을 지켰다.
탁!
진우형이 술잔을 세게 내려놓았다.
그녀의 볼에 손을 가져다 대려 하자, 부인이 손길을 피했다.
이에 진우형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내려놓았다.
부인이 다시 자연스럽게 술병을 들어 잔에 술을 따라 주자, 진우형은 한 잔 마시고는 잔을 내려놓았다.
“딸 아이까지 낳았는데 여전하군… 벌써 4년이요. 이제 잊을 때도 되지 않았소. 내가 당신을 갖기 위해 무슨 짓을 하였는지 당신도 잘 알 거 아니오. 세상 사람들은 다 나를 욕해도 나는 당신 하나를 얻어 얼마나 기뻤는지 아시오? 그런데 아직도 이런 취급이라니…….”
진우형은 더 말을 잇지 못하더니, 아이를 안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이를 위해서라도 잘 지내봅시다. 아, 곧 고려로 사신으로 갈 건데… 혹 전할 말 없소? 내 가면 전해주리다.”
“할 말 없습니다.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근황만 알고 싶네요.”
그녀의 말에 진우형은 고개를 끄덕이며 밖으로 나갔다.
* * *
며칠 후.
개경으로 돌아온 이의방, 유현수, 이경수는 중서문하성으로 들어섰다.
“중서문하성으로 싹 다 들어오라고 해.”
“예. 합하.”
중서문하성의 관원은 이의방의 말에 곧장 답하며 움직였다.
덜컹.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 세 사람은 자리에 먼저 앉았다.
얼마 후, 신료들이 제각각 들어서며 이의방에게 고개를 숙이며 자리하기 시작했고, 중서문하성 자리는 빈자리 없이 이내 꽉 차버렸다.
이의방은 빈자리가 없는지 모두 확인하더니, 말문을 열었다.
“다름 아니라, 거란족이 차지하는 요동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고 불렀소.”
“요동이라니요…? 합하.”
우복야 문극겸의 물음에 이의방은 문극겸을 보며 말하였다.
“요동 정벌을 감행할까 하오.”
“합하, 요동이라니요? 그렇게 되면 거란족이 문제가 아니라, 북조와 전쟁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요동 정벌을 감행하기에 앞서 경들을 부른 것이오. 요동 정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경들의 생각을 이야기해 보시오.”
“좌복야의 말대로 요동 정벌을 감행하게 된다면 북조와 전쟁은 불가피(不可避)할 것입니다. 그리고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확인할 수 없는 상황에서 정벌은 불가능합니다.”
“예. 우복야, 좌복야의 말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합하.”
좌우위 상장군 이영령이 말하자, 신호위 상장군 박존위까지 거들며 불가하다고 말하였다.
“지금 함경도 일로도 골치 아픈 일이 한두 개가 아니옵니다. 여진족이 언제 규합해서 다시 함경도로 밀고 내려올지 모르는 상황에 요동 정벌은 불가합니다.”
대부분의 신료가 불가하다는 소리를 하였다.
“현재의 거란족은 금나라의 바짝 엎드려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 거란족이 요동을 저희가 넘는다면 가만히 있겠습니까? 북조로 가서 군사를 청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현재 북조의 상황이 좋지 않다고는 하지만, 북조의 국력은 저희 고려보다 훨씬 더 강하옵니다.”
“아니, 붙어보지도 않고 어떻게 강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흥위위 상장군 돈장이 발끈하였다.
“북조가 국경을 완강하게 막아내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들이 마음만 먹는다면 백만대군을 일으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 왜 지금 일으키지 않는 겁니까. 경의 말대로라면 북조에서 진작 백만대군을 일으켜 저 몽고를 공격해야 하는 게 맞지 않습니까.”
“송과의 전쟁을 한번 치르고 나서는 금나라의 내부 사정이 좋지 않은 거 같습니다. 몽고가 그 틈을 노린 건 확실한데… 금나라가 제대로 된 군을 정비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는 듯합니다.”
“군을 재정비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요.”
“예. 정벌 준비를 하려면 지금 호부에서 가지고 있는 재정으로는 장담조차 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함경도에 준비하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요동 정벌까지 한다니요? 백성들에게 짐을 지워 주는 꼴밖에는 안됩니다.”
현수가 신료들의 이야기를 곰곰이 생각했다.
그때 문뜩 떠오르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우연히 본 역사책에서 청나라 9년에 민란을 진압하는데 2억 냥이 들었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물론 전쟁과는 상관없을 만한 내용이었지만, 왜인지 북조가 요동 정벌에 반하여 군을 일으키면 어마어마한 예산이 들어갈 것으로 생각이 들었다.
“예. 지금 금나라의 군사 상황조차 제대로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대부분 국경으로 밀집되어 있다고 하지만, 금나라가 바보도 아니고서야 요동 정벌을 하는 데 있어 가만히 있겠습니까?”
“금나라의 현 황제는 성군이라고 칭송받는 자입니다. 그런 금나라의 황제가 군을 우리 고려로 돌리면 감당을 어떻게 합니까.”
“예. 북조로 군을 파견한 지가 얼마나 되었습니까. 그런 상황에 요동을 정벌한다는 것은 지금 불가능한 일이옵니다.”
“그놈의 북조가 무서워서 가만히 있자는 겁니까? 합하께서 다 생각이 있으셔서 요동 정벌을 하자고 하는 게 아닙니까. 어차피 금까지 갔다 온 마당에 요동 정벌을 못 할게 뭐가 있소!”
서경 유수 조위총이 한마디 거들었다.
“생각해보세요! 남송에 금나라가 밀렸다고 하지만, 금나라는 금나라입니다! 금나라에서 고려가 요동을 공격하였다는 걸 알았을 경우 금나라가 백만대군 아니 수십만의 대군을 고려로 돌리면 어찌하려고 하시는 겁니까!”
참지정사 조영인이 크게 소리쳤다.
“지금 금나라의 내부 사정이 좋은지 나쁜지 정확하게 알지도 못하는 이때 섣불리 군을 요동으로 보냈다가는 전쟁이 크게 벌어질 게 분명한 거 아닙니까. 게다가 금의 오경 중 하나가 저 요동성인데 그 성은 어찌할 것입니까! 이건 무리한 정벌입니다!”
“예. 참지정사의 말씀에 저도 동감하는 바입니다. 금의 사정이 지금은 좋지 않다고 하지만, 북조는 북조입니다. 특히나 성군이라고 불리는 금의 황제를 백성들이 믿고 따른 지 오래인데… 지금 요동 정벌을 하는 건 부적격합니다.”
중서시랑평장사 윤인첨까지 반대를 하는 입장이었다.
“현재 여진족들에게 금 황제의 명이 제대로 통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금나라를 지금 자극해서는 아니 됩니다. 참지정사의 말씀이 옳습니다.”
제각기 생각이 다 다른 신료들의 말을 듣고 있자니, 전부 옳은 소리뿐이었다.
이의방은 너무 선뜻 정벌 이야기를 한 게 아닌가 싶어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경청만 하였다.
“예. 그렇습니다. 세 분의 말씀처럼 요동 정벌은 지금은 어렵습니다. 고려의 군세가 아무리 커졌다고 해서 요동을 친다는 건 어불성설(語不成說)입니다. 가더라도 때를 보고 가야지요.”
형부상서 이린의 말에 이의방은 물었다.
“형부상서가 보기에는 그때가 언제라고 보는가?”
“송구하지만, 제가 선뜻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합하.”
“괜찮아. 그냥 이야기만 들어보고 싶을 뿐이야. 그래서 언제가 좋겠는데?”
“앞으로 십 년 후일 수도 있고, 삼십 년 후일 수도 있겠지요…….”
“삼십 년…? 그럼 불가능하다는 소리구먼.”
이의방은 헛웃음이 나왔다.
요동 정벌이 긴 세월이 흘러야 가능하다는 이린의 말에 말이다.
“합하, 요동 정벌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으니 일단 함경도 일부터 끝내시는 게 좋을 듯하옵니다.”
금오위 상장군 우학유가 말하였다.
“하하하, 요동 정벌을 준비하는데 최소 3년에서 최대 5년이면 족할 거로 생각했는데 반대하는 자들이 이렇게 많이 나올 줄이야… 경대승 상장군, 두경승 상장군도 신료들과 같은 입장인가?”
“예. 소장의 뜻도 반대입니다.”
두경승의 말에 이의방은 고개를 끄덕였다.
“금나라, 남송의 내부 사정을 정확하고, 명확히 알아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경대승의 뜻밖의 말에 이의방은 귀를 기울였다.
“자세히 이야기해봐.”
“요동으로 가시고자 하시오면, 말 그대로 상인들이 오가는 이야기보다는 황궁 안팎에 사정을 자세히 알아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그래, 그렇지. 그럼 그 내부의 사정을 정확하고 면밀하게 알아보려면 어찌해야겠는가?”
“예를 들어 말씀 드리우자면… 국자감, 성균관의 학생들을 국비(國費)로 유학을 보내시는 게 좋은 방법일 듯싶습니다.”
짝!
“옳지! 바로 그거야! 하하하!”
이의방이 경대승의 말에 손뼉을 치더니, 흡족해하면서 크게 웃었다.
“그래… 경대승 상장군의 말에 일리가 있어! 하하하!”
경대승의 말 한마디에 기뻐하던 이의방이 호부 상서를 바라보았다.
“예부 상서, 유학을 가보고 싶어 하는 학생들이 있다면 누구라도 좋으니 명단을 받게.”
“예. 합하.”
예부 상서 유응규가 답하며 고개를 숙이었다.
“그래. 뭐, 틀린 말들이 없어. 우리 뜻대로 다 이뤄지면 얼마나 좋겠는가. 자네들 말에도 일리들이 있는 말이야. 그럼 요동 정벌은 미루는 거로 하고 함경도에만 집중하세.”
“예. 합하.”
“아, 그리고 모이게. 보여줄 것이 있네.”
“예.”
이경수가 품속에서 새로 만들 군선의 설계도를 상 위에 놓았다.
새로 건조할 군선을 본 신료들은 서로 쑥덕거리기만 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