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여기 있잖아.”
“위위경에게 맡기겠다는 말씀이시옵니까?”
“아니, 나 없을 때 위위경이 대신하였는데 뭐가 문제인가. 오래전 위위경이 민란도 진압하지 않았는가. 왜? 문제가 되나?”
“아, 아니옵니다. 합하.”
병부상서가 고개를 숙이며 답하자, 다른 이들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이의방의 말대로 현수는 이의방이 부재중일 때 정권을 맡아 운영을 한 적이 있다.
이때 능력을 인정받아 지금의 자리에 오른 것이었다.
이의방이 부재중일 당시 문극겸과 이준의가 옆에서 현수를 보좌하였으니, 필요하면 그 둘이 다시 붙어서 보좌하면 그만이었다.
“합하, 이번에는 평장사도 와계시니… 평장사께 맡기시지요.”
평장사에게 맡기자는 말 한마디에 판추밀원사가 소리쳤다.
“불가합니다. 평장사가 아무리 재상의 반열이라지만, 평장사는 안됩니다! 성정이 포악하고 성격이 급하기에 이 나라의 조정을 맡길 수는 없습니다. 차라리 맡기려면 중서시랑평장사에게 맡기는 게 옳습니다.”
판추밀원사 유문후가 열변을 토했다.
덜컹!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
중방의 문을 열고 들어오는 건 이의민이었다.
이의민이 중방으로 들어오자마자, 판 추밀원사 유문후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유문후는 이의민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판 추밀원사, 내가 성정이 급하고 포악하다는 건 나도 알지만, 내가 듣든 안 듣든 말투 조심하게. 안 그러면 내 언제고 자네 대가리를 잘라 날려 버릴 수도 있어.”
섬뜩한 경고였다.
안 그래도 실록편찬으로 인해서 민감해진 이의민이었다.
순식간에 중방의 분위기가 싸해지자, 이의방이 말하였다.
“평장사, 어인 일로 온 건가?”
이의방의 말에 이의민은 살며시 고개를 숙이었다.
“합하, 저는 동경으로 돌아가 있을까 하오니 허락해주셨으면 하옵니다.”
“동경으로?”
“예. 합하.”
“다들 물러가 있어.”
“예. 합하.”
이의방에게 말 한마디에 모든 자리에 앉아있던 이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이의방에게 허리를 숙이며 인사하고는 중방 밖으로 나갔다.
“자리에 앉게.”
“예. 합하.”
이의민은 자리에 앉았다.
“동경으로 돌아간다? 왜? 동경에 오래 있었잖나.”
“불편해서 그러하옵니다.”
“흠… 이 사람아, 불편하다고 그렇게 쉽게 내려간다는 게 말이 되는가.”
“오랫동안 동경에 있다 보니 그러하옵니다. 합하.”
이의방이 미간을 찌푸렸다.
“자네 지금 상황이 불편하니 피하고 싶은 건 아니고? 이럴 때일수록 피하지 말고 꿋꿋하게 개경에 남아 있어야지.”
“하아…….”
이의민이 이의방의 말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신호위 상장군 박존위도 가만히 있는데 일국의 재상의 반열에 오른 자네가 동경으로 돌아가겠다니… 이런 소리를 하면 어찌하나. 그리고 내가 지난번에도 이야기하지 않았는가. 자네를 지켜줄 것이라고. 내가 죽어도, 내 뒤를 이을 자가 지켜줄 것이야. 자네 자식들도 그 후손들도 그러하니, 아무 생각하지 말고 편안하게 개경에 있어. 아니면 나와 함께 강화도에 가서 북계와 함경도를 좀 돌아보는 건 어떤가.”
“아니옵니다. 합하. 소장… 동경에 가고 싶사옵니다.”
“후우… 그래. 자네 뜻이 정 그러하다면 그렇게 하게.”
이의방은 이의민의 끈질긴 고집 끝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허락하였다.
이의민이 중방 밖으로 나가자, 이의방은 한숨을 내쉬며 상위에 놓여 있는 요동 지도를 꺼내 펼치고는 요동 일대를 살피었다.
그중에 현수가 요동에 선을 그은 부분을 보고는 이의방은 붓을 들고서 요동지역에 따라 선을 그었다.
“이 정도면 되겠지.”
지도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이의방은 건안성에서 신성까지 선을 그었다.
잠시 이를 살피다가 신성에서 아래로 국내성까지 선을 그은 부분을 바라보며 만족하는 듯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 * *
“그러니까 이렇게 만들라는 말씀이시군요.”
“예. 그렇습니다. 함경도와 북계에 설치할 철책입니다. 웬만한 거로 잘려나가서는 안 됩니다. 그 위로는 함부로 넘어올 수 없도록 뾰족하게 다듬은 윤형 철사를 위에 설치할 겁니다. 그러면 쉽게 올라올 수 없을 겁니다. 그리고 이건 받침대입니다. 역시나 땅에 박아서 철책을 받쳐 주는 것이지요.”
군기감 장은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어떻게 철책을 설치할지 생각하면서 말이다.
“흠, 이걸 설치한다고 하더라도… 땅을 파서 넘어올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군기감장의 말에 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미처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군요. 땅을 파고 넘어온다라…….”
“흠, 그럼 위위경께서 말씀하신 높이보다 좀 더 길고 크게 만들어야 할 거 같습니다.”
“무얼 말입니까?”
“이 철망 말입니다. 이 기둥 양 사이로 홈을 파서 철망을 위에서부터 내려 끼운 다음 굵은 철사로 꼼꼼히 묶고 마무리로 줄을 이용한다면 튼튼할 겁니다. 말씀하신 뾰족하게 다듬은 윤형 철사 역시 땅을 깊게 파서 함부로 넘어올 수 없게끔 해야지요. 아니, 넘어온다고 하더라도 시간을 소비하게끔 만들어야겠지요.”
군기감 장의 말에 현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곧 병부상서가 말하였다.
“이럴 게 아니라, 이중으로 설치하는 게 어떻습니까? 군영이 있는 곳에 문을 만들고 그 철책과 철책 사이로 들어가서 철책을 항시 확인하며 점검해야 하니 말입니다.”
병부상서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위위경, 위위경께서 말씀하신 군영을 설치하는 곳에 군사 얼마를 두실 생각입니까?”
“각 군영에 800 군사에 지휘관은 중랑장 정도면 충분할 거 같다고 생각합니다.”
병부상서가 현수의 말을 종이에 적어 내려가다가 현수에게 다시 물었다.
“중랑장 1인에 랑장 3인, 별장 5인, 산원 10인, 교위 20인, 대정 40이면… 지휘관급들은 충분할까요?”
“아이고, 그 정도면 충분하고도 남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하면 수월할 듯합니다.”
병부상서 이문저는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하여 종이에 적어 내려갔다.
군영을 지도를 바라보며 군영을 설치해볼 만한 곳을 보았다.
하지만 함경도를 가보지 않은 탓에 어디가 어떤 지형인지 알 수가 없어 그냥 붓을 내려놓은 병부상서 이문저였다.
“왜 그러십니까?”
“이번에 합하를 따라 북계와 함경도를 다녀 와봐야 할 듯합니다. 그렇게 해서 직접 봐야 철책을 세우든지 하지요.”
“그럼 그렇게 하시지요. 어차피 시간은 아직 많이 남아 있습니다. 먼저 시작한다면… 북계부터 시작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북계는 안정적이니 시작할만하지요. 서경 유수가 와있으니, 북계에 철책과 군영을 의논하여 준비해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좋습니다. 일리가 있군요.”
“예. 저도 일리가 있다 보옵니다. 함경도는 아직 미숙한 지형이니, 북계부터 천천히 시작해서 함경도까지 철책을 세우는 게 좋다고 생각됩니다.”
대부분 북계 쪽부터 작업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현수는 군말 없이 이들의 말을 따르기로 하였다.
“그렇게 하시지요. 군기감장, 철책을 만드는 데 있어서 철광이 많이 필요할 겁니다.”
“예. 무슨 말인지 압니다.”
“철광은 공부에서 책임지고 공수(供水)하겠습니다.”
공부상서 박육화가 말하였다.
“철광이 부족하면 수입이라도 해올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호부 상서 임극정의 말에 현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는 이만 일어나 볼 테니… 악 장군, 양 장군과 화약과 화포 관련된 의논을 좀 더 해볼 게 있으면 해보시지요.”
“아, 예. 알겠습니다.”
자리에 함께 있던 이들은 인사를 하더니 자리를 떠났다.
현수는 양소를 바라보며 말하였다.
“양복이, 내 큰 아이와 함께 정주 강화도를 들렀다 올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악 장군이 이야기 좀 해주게.”
현수의 말에 악정이 통역하자, 양소가 자리에서 일어나 잘 부탁한다는 듯 현수에게 읍(揖)하였다.
현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밖으로 나갔다.
* * *
저택으로 돌아온 현수는 몸채에서 관복을 벗고 옷을 갈아입었다.
“황태비 마마께서 연통(煙筒)을 보내오셨습니다.”
“혼사 일 때문에요?”
“예. 날이 잡혔다고 사람을 보내서 연통을 주셨습니다.”
수안 궁주 왕씨의 말에 현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혼사 때까지 차질 없이 준비해놓겠으니, 잘 다녀오십시오.”
“그렇게 하겠습니다. 집안일에 든든한 세분이 있는데 뭐가 걱정입니까. 하하하!”
현수의 말에 세 부인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부인, 그나저나 족보 때문에 그런데… 수아의 성을 그대로 적어야 할지 아니면 내 성을 따라 적어야 할지 모르겠군요.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위위경의 뜻대로 하십시오.”
김씨의 말에 현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 이제 다되었습니다.”
연희 궁주 왕씨의 말에 현수는 진열된 장검 하나를 들어서 허리에 패용(佩用)하며 방 밖으로 나갔다.
마당으로 나가니,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는 수아와 복이가 눈에 들어왔다.
“최 집사.”
“예. 위위경.”
“대승 형님 집으로 소은병 세관만 보내게.”
“예. 알겠습니다.”
“아, 부인. 부탁이 있어 그런데… 어디 혹시 마음씨 곱고 착한 과부 있습니까?”
뜬금없이 과부 타령하는 현수에 화들짝 놀라는 부인들이었다.
그리고는 이내 현수를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보자, 현수는 손을 저었다.
“어허, 이상한 놈 취급하지 마세요! 내가 아니라 양소 장군 혼사나 치러주려고 합니다. 이제 조정에서 일도 해야 하는 사람인데… 아이를 혼자 어떻게 돌보겠습니까.”
“…아!”
“제가 한번 알아볼까요?”
김씨가 나서서 말하자, 현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주시면 고맙지요, 잘 부탁드립니다! 하하하하!”
현수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준비는 다 하였느냐?”
“네!”
해맑게 웃음을 짓자, 현수는 수아에게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는 수아와 복이의 손을 잡으며 남대가로 향하였다.
손을 잡으며 시끌벅적한 남대가를 걷다가 펄펄 끓고 있는 거대한 솥을 보았다.
솥을 빤히 쳐다보는 수아를 보며 현수가 물었다.
“먹어 보고 싶으냐?”
“예!”
현수는 수아와 복이를 데리고서 주막 안으로 들어갔다.
“아이고! 위위경 아니십니까!”
주모가 주막에 들어온 현수를 보며 곧장 달려와서 허리를 숙였다.
“하하하, 장사가 잘되는구먼!”
“예. 덕분에 장사가 잘됩니다. 위위경.”
“내 덕이 아니라 합하의 덕이지. 하하하!”
“그런데… 여기까지 어인 일로 오셨습니까?”
주모의 물음에 현수는 미소를 지었다.
“이 사람아, 주막에 왜 왔겠나. 밥 먹으러 왔지.”
“예!? 아이고, 드시기에는 입맛에 안 맞으실 텐데…….”
“밥 먹는 데 있어 그런 게 어딨나. 세 그릇 주게. 아니, 두 그릇 주고 탁주 한 병 주게나. 접시도 주고,”
“예.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음, 아니야, 여기 앉지, 뭐.”
현수가 가까운 자리에 앉자, 아이들도 현수를 따라 자리에 앉았다.
“곧 준비해 올리겠습니다.”
주모는 고개를 숙이며 곧장 부엌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