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악 장군, 자네가 내일 같이 가주게.”
“여부가 있겠습니까. 위위경.”
“그걸로는 노비들 먹이고 재우고 하는 데 있어 턱없이 부족할 테니, 호부에 가는 대로 농토 신청하는 것도 도와주게.”
“예. 위위경.”
작금(昨今)의 고려에서 녹봉만 가지고 산다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다 보니, 대부분의 관리가 국고로 환속(還屬)된 농토를 호부에 따로 신청해서 노비를 이용해 농사를 짓고 있었다.
또는 상단에 돈을 넣어 재물을 벌어들였다.
상단에 돈을 넣는 건 쉽게 잃을 수도 있지만, 한번 몫 제대로 잡는다면 떼돈을 버는 수준이었다.
이 두 가지 방법 외에도 관리는 다원(茶園)을 일구거나, 주점(酒店)을 열어 돈을 벌어 드리고 있었다.
“위위경, 대체 요동을 정벌한다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모두 합하의 뜻입니다. 그리고 요동 전체를 정벌하는 게 아니라, 요동 남부 일대… 연안 일대를 모두 정벌할 겁니다.”
“아니, 요동 전체도 아니고 요동 남부만 정벌한다니. 더더욱 이해가 되지 않는구먼.”
정균의 말에 현수는 미소를 지었다.
“형님, 이 드넓은 영토를 가진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번창을 시키겠습니까. 무너진 성을 어떻게 쌓을 겁니까. 그걸 다 계산하고 따지면 상상도 못 할 예산이 들어갈 텐데 차라리 지금 거점으로 삼아 활동하고 있는 요동 남부 연안 일대를 모두 고려의 영토로 삼는 게 낫습니다. 연안 일대는 농토뿐만 아니라, 바다가 근접해서 먹고 살길은 아무 걱정 없는 곳입니다.”
“그럼 남은 요동 땅은 어찌할 계획인가?”
“거란족에게 줘버려야죠.”
“거란족에게?”
“예. 거란족에게 주고, 그 거란족이 절대 우리를 버리지 못하도록 원조(援助) 좀 해주어서 알아서 기게 만들어야죠.”
“에휴… 그래. 뭐, 남송에서도 미친 짓을 계획했는데… 거란족이라고 못할까.”
정균은 이제 현수가 무슨 생각을 하든 상관치 않기로 하였다.
“그리고 또 있습니다. 함경도에서부터 북계에 이르기까지 철책을 세우고 곳곳에 군영을 설치할 겁니다. 이에 대한 자세한 건 중방에서 직접 이야기를 들으면 될 것입니다.”
현수의 말에 정균과 악정, 천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악 장군.”
“예. 위위경.”
“다시 한번 말하지만, 자네하고 양소 장군 둘이서 화약과 화포의 관련해서 맡아 봐. 조만간 상서들과 군기감에 가서 이야기할 것이니, 그렇게 알고 있게.”
“예. 위위경.”
악정이 양소에게 현수가 한 말을 전해주자, 양소 또한 고개를 숙이었다.
“저… 지난번에 남송에서 보여드린 도안 말고도 많은 도안을 보여드리고 싶은데 언제쯤 보여드리면 좋겠습니까?”
양소의 말을 악정이 통역을 해주었다.
“아, 그거? 확인은 해봐야 하는데… 고려에 오고 나니, 시간이 나지를 않아. 일단 내가 시간이 나는 대로 그때 한번 보세. 그리고 악 장군. 양소 장군과 함께 다니면서 양소 장군에게 한글이랑 고려말 좀 가르쳐봐.”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위위경.”
악정이 다시 양소에게 말하자, 양소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 이만들 퇴청들 하세.”
“예. 위위경.”
현수와 다른 이들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위위시 밖으로 나갔다.
* * *
“어서 오십시오. 위위경.”
현수와 양소가 집안으로 들어서자, 최 집사가 맞이하였다.
“그래. 집안에는 아무 일 없지?”
현수가 최집사를 바라보며 물었다.
“저… 그게…….”
최 집사는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하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 있는가? 일이 있으면 편하게 이야기를 하게. 그래야 내가 알고 처리를 할 게 아닌가.”
“큰 아기씨… 일입니다.”
“큰애가 왜? 어디 아파?”
“그건 아니옵고, 그게… 제가 아기씨께 들은 이야기이온데…….”
“아니, 뜸 들이지 말고 얼른 이야기를 해봐.”
“몸체에 계신 부인께옵서 오래 머무르지 않으셨사옵니까… 그 일이 안 좋게 소문이 나서 큰 아기씨께서 안 좋은 일이 있으셨습니다.”
안 좋은 이라는 말에 현수는 깊게 한숨을 내쉬더니, 조용히 최 집사의 말을 경청했다.
“큰 아기씨의 부인께서… 위위경의 첩으로 들어갔다며 같이 놀아주지 않는다고 하옵니다.”
“뭐! 첩!?”
현수는 인상을 찡그리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하아…….”
현수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오랫동안 혼사를 미루기는 하였지. 그래, 큰아이는 방에 있는가?”
“예. 위위경.”
현수가 양소에게 먼저 가보라고 손짓을 하자, 양소는 고개를 숙이며 먼저 객방으로 향하였다.
현수는 수아가 있는 방으로 향하였다.
밖에서 방을 보니, 혼자 불을 켜고 자리에 앉아있는 그림자가 보였다.
현수가 계단을 올라갔다.
“수아야, 아비다!”
덜컹.
방문을 열며 안으로 들어갔다.
현수가 들어서자마자, 수아가 곧 뛰어와서는 덥석 안기며 얼굴을 묻은 채 울기 시작하였다.
이에 현수는 아무 말 없이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가만히 있었다.
한참 동안 울던 수아가 현수를 바라보자, 현수는 미소를 지으며 한쪽 무릎을 굽히었다.
“그래, 시원하게 다 울었느냐?”
“…송구하옵니다.”
“송구하기는… 이 아비가 미안할 뿐이지. 얼마나 가슴이 아팠겠냐…….”
수아는 현수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고, 현수는 눈물 자국을 손으로 닦아 주었다.
“너를 놀린 애들이 누구냐?”
현수가 수아에게 정색하며 묻자, 수아는 식겁한 눈으로 입을 꾹 닫았다.
“괜찮다. 아비가 그 아이들에게 아무런 짓도 하지 않을 것이야. 네 친구에게 아무런 원한도 없느니라. 그냥 그 부모를 찾아가서 조용히 이야기만 하려고 하는 게다.”
현수가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하자, 수아는 현수에 귀에 속닥거렸다.
이에 현수는 눈썹이 조용히 꿈틀거렸다.
다 속닥인 수아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현수를 바라보았고 현수는 미소를 지었다.
“내일 낮에 이 아비와 함께 장이나 구경하자꾸나. 남대가에 갔다가 정주에 들러 벽란도도 가고, 벽란도에서 하루 묵고 강화도도 구경하러 가자꾸나.”
“강화도요?!”
“그래, 강화도. 거기에 염전이라고 하는 곳을 만들라고 하였는데… 그 염전이라는 곳이 소금을 만드는 곳이거든. 이 아비와 함께 가서 어떻게 돌아가는지 보자꾸나. 어떠하냐?”
“좋사옵니다!”
환하게 미소를 짓는 수아를 보며 크게 웃었다.
“하하하!”
현수는 수아를 꼭 끌어안아 주며 다독여 주었다.
“내일 보자꾸나. 이제 편안하게 자거라.”
“예. 아버님.”
현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수아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방 밖으로 나갔다.
현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면서 천천히 계단을 내려왔다.
“위위경.”
몇 발치에서 현수를 부르는 목소리에 시선을 돌리자 김씨가 서 있었다.
현수는 그녀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부인, 나오시었습니까.”
현수는 김씨에게로 다가갔다.
“송구합니다… 걱정을 끼칠 일이 아니온데.”
“송구할 거 없습니다. 송구해야 할 건 바로 저입니다.”
“…아닙니다.”
“부인 잘못이 아니에요. 다 내 잘못이지요. 그리고 걱정하지 마세요, 내가 수아만큼은 남부럽지 않게 키울 겁니다. 자, 이만 들어갑시다.”
현수는 김 씨를 대동하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 * *
다음 날 아침.
현수는 마중 나온 집사에게 말하였다.
“최 집사.”
“예. 위위경.”
“내 집 근처 가까운 곳에 이 사람이 머무를 곳 좀 알아보게나.”
“크기는 얼마면 되겠사옵니까?”
“음… 한 네 식구 살면 될 것 같네. 노비 일가는 한두 일가면 될 것이니, 자네가 보고 진행해주게. 없으면 지난번처럼 땅을 사버리게. 새로 지을 거야.”
“아, 예! 위위경.”
최 집사는 미소를 지으며 답하였다.
“아버지!”
환하게 웃으면서 달려오는 수아가 눈에 들어오자, 현수는 손을 흔들었다.
“그래. 어제 한 말 잊지 말아라.”
“예! 아버지! 아, 혹시 복이도 데려가도 됩니까?”
“복이? 그럼! 데리고 가자. 하하하!”
현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부인들을 바라보았다.
“수아와 복이를 데리고 다녀올 테니, 준비 좀 해주세요.”
“예. 위위경.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현수는 부인들에게 인사를 받으며 양소와 함께 집 밖으로 나갔다.
황성 병부로 들어선 현수가 양소를 대동하고 지나가는 녹사를 불러 세웠다.
“병부 시랑은 어딨느냐?”
“예. 위위경. 병부 집무실에 계시옵니다.”
“오냐!”
현수는 인상을 찡그리며 병부 집무실로 향하였다.
쾅!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 현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수많은 병부 관원들이 현수를 바라보았다.
현수는 병부 시랑이 있는 곳으로 향하였다.
병부상서와 병부시랑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위위경, 어인 일입니까?”
“아, 병부상서. 그 일로 인해서 왔는데… 조금 있다가 연통을 넣을 테니 그때 뵙는 게 어떻습니까?”
“아, 그렇게 하지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병부상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자, 현수는 병부시랑을 바라보았다.
“병부 시랑.”
“예. 위위경.”
“잠시 나 좀 보세.”
“아, 예.”
현수는 양소를 데리고 밖으로 다시 나갔다.
병부시랑이 그 뒤를 따라 나갔다.
밖으로 나온 현수는 한적한 장소에 도착하자, 병부시랑을 바라보았다.
“위위경, 여기는 어찌…….”
영문을 모르는 병부 시랑이었다.
현수는 병부시랑을 바라보며 말하였다.
“자네 자식 때문에 보자고 하였네.”
“예? 제, 제 자식에게…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자신의 자식 문제에 대해 거론하자, 병부시랑은 침을 꿀꺽 삼키었다.
“내 황태비 마마의 조카분과 혼례를 곧 올리는데 말이야. 자네 자식이 내 집에 있는 안사람을 첩이네 뭐네 하면서 내 딸 아이를 울렸어. 그거 잘 알지도 못하면 그런 이야기는 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위, 위위경…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그래. 자네가 앞으로 그런 소리 못하도록 잘 일러주게. 두 번은 내 안 참겠네.”
병부시랑은 벌벌 떨며 고개를 숙이었다.
“소, 송구합니다. 위위경.”
“비록 오랫동안 혼사를 미루기는 하였지만, 남송에 사신으로 다녀왔는데 이런 소문이 퍼지는 건 좋지 않다고 보네. 곧 혼사를 올릴 거야. 그때 자네 자식도 데려오게. 알겠나?”
“예? 아, 예… 위위경.”
“그리고 그 안… 안 뭐더라…….”
“안준성 말씀이시옵니까?”
“어, 그래. 병부에 있다고 이야기를 들었는데, 일은 잘하고 있나?”
“예. 위위경. 이번에 함경도로 올라갔습니다.”
“그렇구먼… 함경도라… 알겠네. 그럼 나중에 다시 보세.”
현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양소와 함께 병부를 나갔다.
병부시랑은 눈을 질끔 감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