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현수의 말에 이의방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요동 지도를 치우고 함경도 지도를 보여주었다.
상세하게 표기된 함경도 영토를 그린 지도였다.
세밀하게 작은 원이 그리고 섬이라고 적어놓은 것도 있었다.
“네가 없을 때 이렇게 진행했다. 중간중간 필요한 인원을 보내었어.”
현수가 이의방의 말에 지도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 지도의 붉은 점 표시가 어디서 많이 본 지점이었다.
다만 어디서 봤는지 기억을 잘 나지 않았다.
기억을 더듬다가 현수는 침을 꿀꺽 삼키었다.
“사군 육진?”
“사군 육진? 그게 뭐냐?”
“예!? 아, 아닙니다.”
현수의 말에 이의방은 함경도 지도를 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여기 압록강 쪽은 사군, 두만강 쪽은 육진이 맞느냐?”
“예? 아, 예… 맞습니다. 그런데 여기는…….”
“아, 거기? 공부가 말하기론 두만강 하류 쪽인데,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지역으로 보더라고.”
“농사가 가능하다고요?”
“그래. 그런데 왜?”
“그럼… 여기가 그 조산보인가?”
현수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이의방은 주의 깊게 들었다.
“너 함경도에 대해서 어찌 알고 있는 거냐?”
“예? 아, 그게 아니고… 사서를 좀 읽어 보았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합하.”
이의방은 현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별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그럼 네가 본 사서에서는 네가 말한 곳을 어떻게 부르더냐?”
현수는 붓을 들고서 기억을 더듬으며 붉은색으로 표기된 부분에 글을 적었다.
“육진의 여기는 온성, 경원, 경흥 그 아래가 조산보이옵고… 압록강 쪽 사군은 여연, 우예, 자성, 무창입니다.”
“그럼 그 이름을 따서 그렇게 부르자꾸나. 네가 지목한 곳에 백성들이 이주시키도록 하겠다. 그럼 관리를 보내야겠는데… 마땅한 관리가 없어. 아직 미완성되었고.”
“이곳에는 장수들을 보내서 군사와 행정을 맡기시지요.”
“뭐? 그러다가 개판 되는 거 아니냐? 예전에 나 때처럼 말이다.”
이의방의 말에 현수는 미소를 지었다.
“무엇이 걱정이시옵니까. 보좌해줄 관리를 함께 파견해 보내면 되지 않겠습니까. 이곳에 파견되는 장수들을 외관직 방어사, 부사, 판관, 법조를 1인씩 보내고 의학을 4명씩 파견을 하는 게 어떻습니까?”
“일리가 있구나.”
현수는 미소를 지었다.
“네가 볼 때 더 필요한 건 없겠느냐?”
“추가로 철책을 세우는 게 어떻습니까?”
“철책? 어디서 어디까지?”
이의방은 현수의 말의 본질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여기 두만강 끝에서 거란족을 몰아낸 북계 일대까지 말입니다.”
현수는 붓을 들고서 선을 그었고, 선을 그은 걸 본 이의방은 잠시 침묵을 지키었다.
“왜 그러시옵니까.”
“음… 철책을 짓는다고 하니, 어떻게 세워야 할지 잠시 생각해보았다. 머릿속에 생각이 많아지는구나. 아예 넘어가지도, 들어오지도 못하게 할 생각은 아닌 거지?”
“그렇습니다. 철책을 세우고 오가는 통로는 만들어야겠지요. 그리고 곳곳에 고려국 깃발도 세워야 합니다. 이를 관리할 사람도 필요하니, 일정한 간격으로 세워서 경계하게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현수의 말에 이의방은 고개를 끄덕이며 현수에게 물었다.
“여기 네가 말한 조산보 말이다. 여기는 어찌할 것이냐?”
“이곳은 농사짓기 좋은 곳이라 하였으니, 이곳에 4군 6진처럼 성을 쌓는 게 좋을 듯하옵니다. 그리고 여기 두만강 하류 부분에는 목책으로 군영을 구축해서 지키게 하시는 게 좋을 듯하옵니다.”
“하면 철책은 어떻게 만들면 좋겠냐?”
이의방의 말에 현수는 종이 한 장을 집어 앞에 두고는 생각이 나는 대로 그렸다.
밑바닥은 뾰족한 기둥과 철책을 받칠 만한 것을 그려냈고, 기둥과 기둥에 맞물리게 넓적한 철망을 그려내더니 이의방에게 바로 보였다.
“이렇게 할까 하옵니다.”
“높이는?”
“20자 정도면 족할 듯합니다.”
“너무 높은 거 아니냐?”
“함부로 넘어올 수 없게끔 해야지요. 그리고 철망 위에 가시 철선을 윤형으로 만들어 철망 위에 놓아둘까 합니다. 철책은 성벽으로 둘러 쌓는 게 아니니, 빠르게 건조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시간도 절약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네가 말한 대로 성이 아니라, 목책으로 군영을 설치한다면 성을 쌓는 그것보다는 훨씬 시간을 덜 잡아먹을 테니 말이다. 네가 선을 그은 부분은 안북도호부겸 서북면병마사 조원정과 함흥에 설치한 안변도호부사로 가 있는 이거에게 서찰을 보내 알아보게 하고, 그 일대에 먼저 목책을 설치하라고 해라. 너는 군기감 장을 만나 네가 그린 이 그림을 보여주고 준비하도록 해. 나머지는 호부 상서와 의논하마.”
“예. 합하.”
“합하, 강화도에는 언제 가보실 예정이십니까?”
“말이 나온 김에 하루빨리 가봤으면 좋겠지만, 네가 말한 대로 준비를 하려면 좀 시간을 두고 움직여야지.”
“하오면… 육위 상장군들을 불러서 미리 언질을 줘놓고 움직이면 어떻겠습니까? 이곳에서도 준비해야 하니 말입니다.”
이의방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하자. 그나저나… 너 대승이랑 관계가 어때?”
“별문제 없습니다. 합하.”
“그럼 요동 가는 거 대승이도 포함해서 가라.”
“예? 대승 형님은… 응양군으로 복직하는 게 아닙니까?”
“응양군이 전투에 나가지 말라는 법은 없다.”
이의방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경대승을 포함한 응양군을 대동해서 가라는 말에 현수는 의아함을 감출 수 없었다.
“합하, 육위의 사군과 응양군을 포함해 가라는 말씀입니까?”
“그래. 현재 이군 육위의 군대가 다 합하면 이십 일만 오천이다. 지금 황성을 지키는 데 있어서 용호군만 있으면 돼. 만약 필요하면 천우위, 금오위를 황성방어에 투입시키면 그만이다. 나머지는 사병을 통해서 지키면 될 것이고, 요동 남부 연안 일대 정벌이 공표되는 즉시 전국에 비상령을 내릴 것이다.”
“예. 합하. 하옵고, 준비하려면 군기감은 물론, 삼경 팔목 도호부에서 새로이 병기와 공성 병기를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당연한 말이 아니냐. 낡은 무기를 새로 바꿔야지. 내가 보기에는 흥화진에 바로 움직일 수 있는 군사들을 집결시켜 놓는 게 좋을 듯한데 어찌 생각하느냐?”
“금나라에서 돌아온 군사들은 지칠 대로 지쳤을 것이니, 흥화진에 군사를 집결시키는 건 차후에 미루시지요.”
“음, 그래… 네 말을 들어보니 일리가 있는 말이구나. 그리고 현수야.”
“예. 합하.”
“견룡과 순검군을 잘 단속하거라.”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대부분의 견룡과 순검군은 저를 잘 따르옵니다.”
“잘 따르는 것만으로는 아니 된다. 확실하게 휘어잡으라는 말이다.”
“…무슨 일이 있으시옵니까?”
“환관 놈들과 내관 놈들의 움직임이 심상치가 않아.”
“예?”
“자세하게 알아보라 하였다만… 이놈들이 무슨 짓을 할 줄 모르는 일이니, 네가 견룡과 순검 군을 확실히 통솔해야 한다. 여차하면 그놈들을 모두 죽여버려야지.”
“예. 합하. 명을 받드옵니다.”
“그래, 이만 물러 가봐. 이야기하다 보니 벌써 날이 저물어지는구나.”
“예. 합하.”
현수가 자리에서 일어나 이의방에게 인사하고는 중방 밖으로 나가려 하자, 이의방이 현수를 다시 불러 세웠다.
“현수야.”
“예. 합하.”
이의방이 자리에서 일어나 책장에서 서첩을 하나 꺼내어 현수에게로 건넸다.
“남송에서 온 양소의 직책이다. 육위 장군으로 명하였으니, 전달해 주어라.”
“예. 합하.”
현수는 이의방에게로 다가가 서첩을 받고는 다시 중방 밖으로 나갔다.
현수는 위위시로 향하였다.
* * *
“위위경을 뵙사옵니다! 소장, 견룡행수 오숙비이옵니다!”
“아, 자네가 견룡지유 강선유의 친우라지?”
“그렇사옵니다. 위위경.”
현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견룡행수 오숙비는 현수가 보기에 만족할 정도로 늠름해 보이는 장수였다.
“그래. 위위시는 어인 일인가?”
“소경들께 견룡과 순검군의 훈련 보고를 하러 들렀사옵니다!”
“아, 그래? 하하하!”
현수는 크게 웃으며 맞이하였다.
“그래. 이리 가져오게.”
견룡행수 오숙비는 서첩을 가지고 현수에게 건넸다.
현수는 서첩을 펼쳐 살펴보았다.
만족할만한 성과를 보여주고 있었다.
특히나 팽배수들의 실력은 최상위였고, 응양, 용호군의 정예병들 못지않은 정예병이 되어있었다.
거기에 새롭게 들어온 신병들의 훈련상태도 중하위권까지 올라온 듯 보였다.
“내 그동안 오래 자리를 비웠는데 견룡행수가 이 정도까지 훈련성과를 끌어 올렸다니… 대단하구먼.”
“감사하옵니다! 위위경!”
“그래. 훈련은 끝났으니, 훈련장에서 넉넉하게 먹고 마시게. 돈은 모두 내가 낼 것이니, 동이 나도록 마셔도 되네. 넉넉하게 가져가게.”
“예. 위위경!”
“견룡행수.”
“예. 위위경.”
“황궁의 환관들, 내관들은 물론이고… 황궁에서 일하는 궁비(宮婢)들의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을 모두 파악하여 보고하게.”
“…예?”
“그냥 내 말대로 해주었으면 하네.”
“예. 위위경. 명을 받으옵니다!”
견룡행수 오숙비는 고개를 숙이더니, 위위시 밖으로 나갔다.
“역시 통 하나는 커.”
정균의 말에 현수는 미소를 지었다.
“열심히 훈련했으면 배부르게 먹여야지요. 그게 제가 할 일이 아닙니까. 먹을 수 있을 때 잘 먹여 놔야지요.”
“그게 무슨 말인가? 먹일 수 있을 때 잘 먹인다니?”
“중방에서 합하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의방과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말에 악정, 천시호, 정균은 귀를 기울였다.
양소 역시 알아듣지는 못하였지만, 현수를 바라보았다.
“위위경, 한데… 환관들과 내관들, 하다못해 궁비들까지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하라니… 무슨 일 있으십니까?”
“합하께서 직접 말씀하신 거야. 알려고 하지 말게.”
천시호의 물음에 현수가 답해 주었다.
그리고 곧 말을 이어 나갔다.
“그리고 지금 이 이야기는 당분간 우리끼리만 알고 있자고. 곧 거란족의 주둔지라 할 수 있는 요동 남부 연안 일대를 모두 정벌하기로 이야기가 나올 것이네.”
“요동이라 하셨습니까?”
천시호가 깜짝 놀라 현수에게 재차 물었다.
“그래. 악정 장군과 양소 두 사람은 개경에 남아서 위위시 일을 보며 양소를 돕게.”
현수가 가지고 있던 서첩을 양소에게 건네자, 양소는 두 손으로 서첩을 받았다.
“자네에게 내리는 직첩이니, 펼쳐 보게나.”
악정은 현수에게 말을 통역해주었다.
이에 양소가 살며시 고개를 숙이며 서첩을 펼치었다.
[계묘년 8월 15일.
안산 양씨 소에게 정4품 육위 장군 직책을 내린다.
또한 나라의 녹봉제에 따라 미곡 200석, 해동통보 500냥 80전 60푼을 내린다.]
서첩에는 그렇게 적혀있었다.
서첩 끝에는 이의방의 수결(手決)과 관인(官印)이 찍혀있었다.
양소에게는 감격 그 자체였다.
남송에 있을 당시에도 받아보지 못한 거액을 받을 줄 누가 알았을까.
양소는 현수에게 고개를 다시 한번 더 숙이고는 서첩 안에 있던 종이를 들어 악정에게 물었다.
“이게 뭐요?”
“아, 녹패인데 호부에 가져다주면 거기에 적힌 대로 매년 녹봉(祿俸)을 지급할 것이네. 근데 그거 가지고 부족할 거야.”
악정이 미소를 지으며 말하였다.
양소는 부족할 거라는 말에도 불구하고 행복한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