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수아야, 오늘은 동생이랑 함께 자도록 하거라.”
“예. 아버님.”
수아는 양복의 손을 부여잡고서 몸채 옆 건물인 방으로 향하였다.
현수는 아이들이 다 들어갈 때까지 가만히 지켜보다가 문이 열렸다 닫히는 걸 보고는 계단을 올라가 신을 벗고는 마루 위에 올랐다.
그리고 어느 방으로 갈지 고민하였다.
수안 궁주 왕씨, 아니면 연희 궁주 왕씨.
또 아니면 황태비의 조카, 김씨의 처소로 들어갈지 말이다.
현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냅다 김씨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덜컹.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 현수는 안에서 곤히 자는 김씨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천천히 다가가 살며시 침상에 앉아 김씨를 깨웠다.
“부인.”
깊게 잠든 김씨였다.
현수는 다시 김씨를 살며시 흔들어 깨웠다.
“부인…….”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눈을 뜬 김씨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이불로 몸을 감쌌다.
“어쩐 일로…….”
“하하, 어찌한 일이긴요. 방에 지아비가 들어오는 게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아, 아직 혼례도…….”
“어때서요? 이제 부인은 내 것인데.”
현수는 그렇게 말을 하며 겉옷을 벗고 쇄자갑의 끈을 풀었다.
어두워서 보이지는 않지만, 쇄자갑을 고이 벗어서 한쪽에 두고는 김씨를 품으며 침상에 누워 하룻밤을 보내었다.
* * *
다음날, 동이 트며 평소보다 늦게 자리에서 일어난 현수는 김씨가 챙겨준 꿀물을 마시었다.
“하아, 시원합니다.”
“식사하셔야지요. 미리 준비해두었습니다.”
“그나저나 부인 언제 일어나신 겁니까?”
“일찍 일어났습니다.”
“어제 내가…….”
“그 일은 괜찮습니다.”
얼굴이 발그레해지는 김씨의 표정에 현수는 미소를 지었다.
“아, 그리고 부인.”
“예.”
“지난번에 말하였던 그 일 말이오. 어찌 되었소? 아직도 그런 일을 당하고 계십니까?”
“아닙니다. 이 저택으로 들어온 뒤로는 그런 일은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김씨의 말에 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지요. 안 그러면 내가 어떤 놈인지 찾아내서 머리를 박살 내버릴 것입니다.”
섬뜩한 현수의 말에 김씨는 침을 꿀꺽 삼키었다.
현수가 그릇을 김씨에게 건네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인도 아직 식전이시지요?”
“예. 모시려고 왔습니다.”
“같이 가서 식사나 합시다.”
현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김씨와 함께 자신의 방으로 향하였다.
방문을 열고 들어오자, 미리 자리에 앉아있는 연희 궁주 왕씨와 수안 궁주 왕씨.
현수가 이 둘을 보고는 아무 말 없이 자리로 가서는 자리에 앉았다.
“애들은요?”
“먼저 먹였습니다. 다들 정원에서 놀고 있습니다.”
수안 궁주 왕씨의 말에 현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저를 들어 먼저 동치미 국물을 한입 떠먹었다.
“음, 시원하니 맛있네요. 다들 식사하시지요.”
“어제… 좋으셨습니까?”
연희 궁주 왕씨의 돌직구 질문의 현수는 밥 한술 뜨려다가 숟가락을 놓고 연희 궁주를 바라보았다.
“솔직하게 말씀을 드릴까요? 아니면 돌려 말씀드릴까요?”
“소, 솔직히…….”
“하하, 그럼 솔직하게 말씀드리지요. 가장 행복한 날이었습니다.”
현수의 말에 김씨는 얼굴이 붉어졌다.
수안 궁주 왕씨와 연희 궁주 왕씨 역시 얼굴이 붉어졌다.
“자, 배고프니 이제들 먹도록 합시다.”
현수는 그렇게 말하며 수저를 다시 들었다.
* * *
“아이고, 오래 기다리셨지요.”
문이 열리며 공부상서 박육화와 공부시랑이 안으로 들어왔다.
“아닙니다. 차 한잔 느긋하게 마시었습니다.”
“앉으십시오.”
“예.”
공부상서의 말에 현수는 자리에 앉았다.
“많이 바쁘신 모양입니다.”
“아, 예… 전라도에 문제가 생겨서요.”
“전라도요?”
“예. 그 예전에 향, 소, 부곡 자리인데 위위경께서도 아시다시피 지금은 향, 소, 부곡으로 통칭하여 부르지 않고 있지 않습니까.”
“알지요.”
“그쪽의 전주목 관리 하나가 조정의 명을 참칭(僭稱)하고 재물을 수탈(收奪)하였다고 합니다. 익명으로 관청의 직인이 찍힌 장개가 올라왔습니다. 그 일로 어사대에서 사람이 내려갔다가 보고가 올라와 재물 조사를 다시 하고 오느라 늦었습니다.”
“이런… 대가리를 깨버릴 놈이 있나.”
“하하하, 다행히 어사대에서 발 빠르게 처리하였습니다.”
“그 피해 규모는요?”
“피해 규모는 상당합니다만, 어사대와 호부에서 착복(着服)한 자산들을 모두 조사하고 계산하여 백성들에게 돌려주었습니다.”
“다행입니다. 그럼 착복한 관리는 어찌 되었습니까?”
현수의 물음에 공부상서 박육화는 고개를 저었다.
“그것 때문에 난리가 한번 더 났지요.”
“…예?”
“어사대에서 파견한 관리가 그 사실을 알고 즉결처형을 해버렸습니다.”
“즉결처형이요? 그럼 지금 전주목에 있는 지사는… 별개의 인물이라는 말씀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어사대에서 파견한 관리에게 처음에는 조사한 후에 보고하라고 하였지만, 어사대 관리가 관리를 즉참(卽斬)하고 선참후보(先斬後報)하였지 뭡니까.”
“그래서요?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어떻게 되긴요. 난리가 났지요. 특히 어사대부 흥위위 대장군 홍중방 장군이 난리가 났습니다. 파직을 시키느니 마느니 하다가 말입니다. 그 어사도 성격이 대단하더군요. 아주 그냥 대들고 난리가 아니었습니다.”
“크하하하! 그럼 그자는 파직이 되었습니까?”
“아니요. 장 삼십 대를 치고 마무리를 지었습니다. 그놈도 대단하지요. 삼십 대를 맞고도 똑같은 일이 있어도 자기는 반드시 똑같이 처리할 거라고 말하며 당당하게 어사대를 나갔습니다. 그 일이 있고 나서부터 육부에서는 그놈을 곽 또라이라고 부릅니다.”
“곽 또라이? 크하하하하!”
현수가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얼마나 미친놈이면 육부에서 그렇게 부를까 싶었다.
“그럼 익명으로 장개를 보낸 자는 누굽니까?”
“전주목의 사성훈이라는 자입니다. 익명으로 장개를 올려 고발하였기에 병부에서 그를 전주목 중랑장으로 승차(陞差)시켰습니다.”
“음, 잘한 일이네요. 그럼 지금 전주목 지사는 문제가 없는 것이지요?”
“예. 딱히 문제가 될만한 이는 아닙니다. 그리고 전주목 방어사로 이경훈이라는 자 또한 함께 내려보냈습니다.”
정4품 외관직 장군까지 내려보냈다는 말에 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기존의 장수는요?”
“역시나 문제가 되어 참수형에 처했습니다.”
“그럼 곽 또라이라고 불린 어사가 한 번에 골로 보냈다는 거군요?”
“예. 그렇습니다.”
“하하하!”
현수는 공부상서 박육화의 말에 더 크게 웃었다.
그리고 잠시 잊고 있던 이야기를 꺼내었다.
“아, 공부 상서께 말씀드리고 공부에서 꼭 해주었으면 하는 일이 있어 이렇게 부르게 되었습니다.”
“예. 무엇입니까?”
앞에 놓은 함을 공부상서에 내밀었다.
“이게 무엇입니까?”
“남송 황실에서 키우는 목화라고 합니다. 양모(羊毛)를 피우는 식물이라고도 하지요.”
“예? 아니, 이런 귀한걸… 어떻게.”
“칼 한번 맞고 태상황제한테 좀 내놓으라고 하였습니다.”
“대단하십니다!”
현수의 말에 감탄하는 공부상서였다.
“그런데 이건 어떻게 키워야 하는 겁니까?”
“아, 듣기로는 천축이 원산지니, 고려에서 기후에 맞는 곳에서 키우면 될 겁니다. 이걸로 옷을 해 입을 수 있으니, 잘만하면 고려는 옷감 걱정은 덜해도 될 겁니다. 이 목화가 피어올라 실로 만들고, 그 실로 피륙을 짜서 옷을 해 입는다면… 이번 겨울은 거뜬하게 지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군요. 그나저나 기후가 맞는 곳이라… 허어, 좀 어렵습니다.”
“뭐가요?”
“기후가 맞는 곳이라고 말씀을 하시니, 이런 건 처음 접해보아서…….”
“저도 잘 모르니 공부에 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공부상서 박육화는 이마를 긁적이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함을 공부시랑에게 건네었다.
“이걸… 왜?”
“자네가 키워.”
“예? 공부상서, 저도 이건…….”
“키워.”
“아니, 저도 키워본 적이 없는 걸 어떻게 키웁니까!”
공부시랑이 버럭 화를 내었다.
“와, 이제 대든다?”
“아, 아니… 대드는 게 아니고… 제가 이걸 어떻게 키웁니까! 제가 무슨 만능농사꾼도 아니고! 거기다가 이게 어떤 건지 설명은 제대로 해주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공부시랑은 꽤 억울한지 열변을 토하였다.
“하하, 이 사람아. 내가 키우는 법 알려줄 테니, 그냥 키우기만 하면 돼. 남송에 있을 때 키우는 방법까지 들어서 익히 알고 있지.”
“아, 그럼… 제가 키우도록 하겠습니다.”
현수의 말에 공부시랑은 바로 꼬리를 내렸다.
“일단 이 목화씨를 남송에서 주로 키우고 있으니, 날이 따뜻한 곳에서 키워야 하네. 파종 시기는 4월에서 5월… 그리고 수확 시기는 9월에서 11월이라고 하더군. 그리고 그걸 수확할 때 양모처럼 하얀 게 목화라고 하는 것인데 그 솜 안에 씨앗이 있어. 그걸 다 빼서 나누어서 심을 때 다시 심어야 하네.”
공부시랑은 현수의 말을 듣고는 붓을 들고 종이에 적어 내려갔다.
“이게 다입니까?”
“그게 다야. 나도 거기까지만 들었고 나머지는 자네가 알아서 해야지.”
“아, 그럼 제가 전라도로 직접 내려가서 시험 삼아 4월에 심고, 5월에도 심어 키워보겠습니다. 어느 때에 목화가 잘 자라고 볼 수 있는지 확인한 후 본격적으로 키워야지요.”
“굳이 전주목으로 가려고 하는 이유가 뭔가? 다른데도 많은데.”
“일단 거기에 기술자들이 많지 않습니까. 거기에 모시풀, 아마, 삼도 재배하고 있으니 이 목화를 재배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닐 거 같아 그렇습니다. 그리고 인구도 전주목이 전라도에 비해 많습니다. 전주목에서 제대로 재배에 성공한다면 곳곳에 늘려서 키워야지요.”
“저도 공부시랑의 말에 공감하는 바입니다. 전라도가 곡창지대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전라도에서 웬만한 수공품들을 만들고 재배하기까지 하니, 기술자들이 많은 전라도에서 키우는 게 더 효율적일 겁니다.”
공부상서의 말에 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라도에서 개경까지 이틀이면 도착하고 바람이 좋으면 하루 반나절이면 벽란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물론 육로 이동까지 생각한다면 최대 열흘이면 도착할 수 있는 곳이 전라도였다.
그만큼 고려의 전라도는 고려의 현 공업 도시나 다름없었다.
전주, 무안, 나주의 철광에서 생산한 철로 만든 농기구나, 무기는 개경 못지않게 빼어났기에 개경에서는 전주 목에서 만든 농기구라면 비싼 값에도 팔리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보성, 진산에서 나오는 금 공예품은 남송에서도 인정받는 공예품이기에 남송 상인들이 많이 찾는 공예품이었으며 전주 목에서 세공일을 하였다고 하면 데려가려고 하는 상인들이 많았을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