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말도 마라. 아주 난리다, 난리야.”
“요즘 형님이랑 평장사랑 아직도 으르렁대요?”
“이제는 그냥 신경을 안 쓰려고 한다.”
경대승의 말에 현수는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았다.
“왜 그리 보느냐?”
“이야… 그 대쪽같던 형님이 이런 말을 할 줄도 아시고. 하하하!”
“흠흠…….”
헛기침 몇 번 하며 시선을 돌리는 경대승이었다.
“아무튼 혼례를 치르셨으니, 허튼 생각 하지 마십시오.”
“허튼 생각이라니?”
“왜? 옛날부터 형님이 하던 그 생각 말입니다.”
현수가 조용히 말하며 걱정스러운 눈빛을 경대승에게 보내자, 경대승은 아주 밝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어떻게 된 게 형님이 제일 늦게 갑니다?”
“…응?”
“우민이 형은 진작 가서 애가 셋인데… 형님은 아직 애도 없고, 너무 늦었습니다. 내가 애가 셋이고, 큰 애가 이제 열 살인데 말입니다.”
“야, 너 애 둘이잖아.”
“새 장가도 장가입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제일 늦네.”
“하하하하!”
현수는 웃었다.
“형님, 저 그나저나… 도방 어떻게 할 거예요?”
“…….”
“도방 운영하는 일이 쉬운 거 아니지 않습니까. 형님, 유수 녹봉 갖다가 그 도방 사병들 다 먹여 살릴 수 있어요? 도방 애들 훈련하네, 뭐네 하면서 먹어 재끼는 것만 해도 얼마입니까. 거기에 급여는 안줍니까? 먹고 살려면 줘야지요. 아무리 의기(意氣)로 모인 놈들이라지만… 줄 건 줘야 하지 않습니까. 거기 다가 왈패들 몰아낸 건 좋은데… 그거 상인들 코 묻은 돈으로 운영이나 됩니까?”
술 잘 먹다가 심장 후벼 파는 말을 하는 현수였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경대승도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지금 도방이 운영되는 건 경대승의 아우, 경우민 덕분이었다.
“현수야.”
“예.”
“그래서 말이다…….”
“돈 달라고요?”
현수가 피식 웃자, 경대승은 눈을 딱 감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변할 수 있나.”
“지금 약 올리냐?”
“아니, 그 대쪽같던 형님이 이러니까… 형님이 맞나 싶어서요.”
“그만 놀려라. 서경에 있으면서 나도 많은 생각 했다.”
경대승의 말에 현수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이 변해도 너무 변한 게 적응이 살짝 되지 않았지만, 어찌 되었든 이렇게 웃으면서 만날 수 있으니 현수는 기분이 좋았다.
“내가 며칠 내로 사람 시켜서 은병 보낼 테니, 그걸로 일단 경비 쓰시고 부족하면 말해요. 남의 집 일도 아니고 형님의 집안일인데… 내가 나서야지요.”
“고맙다.”
“예.”
현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경대승이 밖으로 나가다 멈춰 현수에게 곧 다시 말하였다.
“저기… 내가 서경에 있을 때 금나라 상인들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는데.”
“아, 예.”
“몽골 부족들의 강세인가 봐. 그… 이름이 뭐더라… 테, 테…….”
“테무진이요?”
“어, 그래. 너도 아느냐?”
“예. 남송에 있을 때 들어보았습니다.”
“그 테무진이라는 자가 약관(弱冠)의 나이로 그 드넓은 초원지대를 집어삼키고 있다는 거야. 거기에 자기 아버지 복수한다고 무슨 부족하나를 그냥 완전히 짓밟아 놓아버리고, 금나라 국경 지대를 죄다 약탈을 한다는구나.”
“음…….”
“게다가 약탈을 한 번 하면 아무것도 남겨 놓지도 않는다고 하고. 말도 못 할 정도로 잔인하다네. 그나마 금나라 태원수 올출이 버티고 있다는 모양인데… 그 양반 나이가 나이라, 얼마나 버틸지는 모르겠구나.”
“형님, 금나라 소식 더 있습니까?”
“너도 알겠지만, 지금 금나라 내부사정이 너무 안 좋은 듯하다. 금나라 땅이 워낙 크다 보니 금 황제의 명이 제대로 통하지 않는다더라. 즉, 금나라 영역을 벗어난 여진족들이 서로 싸우고 난리를 치고 있다는 거지. 요동 땅은 거란족들이 규합해서 나라를 세우려고 하고 있고.”
“합하께서도 아십니까?”
“물론 아시지. 개경에 들어서자마자 말씀드렸다. 내가 들은 걸 전해드렸더니, 생각이 어느 때보다 깊어지셨어.”
경대승의 말에 상석에 앉아서 신료들과 즐겁게 웃으면서 술을 마시고 있는 이의방을 바라보았다.
“하아…….”
깊은 한숨이 내쉬어졌다.
“난 이만 가보마. 나중에 자세히 이야기하자.”
“예. 형님.”
경대승이 자리로 돌아가자, 현수는 자리에 앉아서 술병을 들고 잔에 술을 채우고 마셨다.
연회장에 있는 현수의 생각은 깊어지기만 하였다.
* * *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황궁의 연회가 마쳐졌다.
황궁에서 많이 마신 현수는 정균, 천시호, 악정, 양소 거기에 한때 추밀원에서 근무하던 이들까지 모두 이끌고서 고려 제일의 기방(妓房)으로 들어섰다.
시끌벅적하게 많은 이들이 기녀를 끼고 술을 마시고 있었고, 기방 곳곳에서 노랫가락과 주악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현수가 왔다는 말에 기방 행수가 곧장 뛰어와 현수와 일행들을 반기었다.
“위위경, 어서 오시옵소서!”
허리를 굽히며 인사하는 행수였다.
“이렇게 갑자기 오실 줄 생각도 못 하였습니다.”
“하하, 이 사람아! 오늘 제일가는 기생들 싹 다 불러오게!”
“예. 준비해서 대령하겠습니다. 위위경!”
“아, 그리고 말이야…….”
현수가 행수에게 다가가서 귓속에 말하였다.
“오늘 밤, 초야 치를 아이들 있으면 두 명만 준비시키도록 하게.”
“위위경께서…….”
“아니, 나 말고. 저기 지금 해롱해롱해서 넘어갈 듯 말 듯 한 자 있지?”
현수는 양소를 가리켰다.
“저 친구한테 밀어 넣어주고, 금액은 얼마가 되었든 간에 벽란도 내가 운영하는 상단으로 사람 보내서 청구하게.”
“예, 위위경. 그렇게 하겠습니다.”
기방 행수는 미소를 지으며 답하였다.
“아, 그리고 말이네. 혹시 저 친구가 혼자 기방을 찾아온다면 말이야… 돈 받지 말고, 그거 나중에 다 나한테 청구해.”
“아, 예… 위위경.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역시 행수야! 하하하하!”
“자, 큰 채로 모시겠습니다!”
행수가 앞장서서 일행들을 안내하며 다른 기녀에게 말을 전하자, 기녀는 곧장 다른 곳으로 움직였다.
현수는 양소 옆으로 가서는 양소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오늘 기깔나게 놀아보자고!”
현수는 양소를 데리고 앞장서 행수의 뒤를 따랐다.
큰 채로 들어서자마자, 현수가 상석에 앉았다.
큰 채로 들어선 이들은 제각기 편한 자리에 앉았고, 곧이어 간단한 안주들이 상위에 술과 함께 차려지자 시끌시끌 벅적하게 이야기가 오갔다.
“양공, 한잔 받으시게!”
현수가 술병을 들자, 양소는 술잔을 들어 올리었다.
술양소는 술잔을 코로 가져가 술 향기를 맡으며 바라보았다.
붉은색을 띠는 술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곧장 입안에 털었다.
“…어떠신가?”
현수의 물음에 악정이 통역하였다.
“향과 맛이 일품이라 합니다. 위위경.”
“하하하, 안목이 있구먼. 진도라는 섬에서 올라오는 술이네.”
현수의 말을 악정이 통역해주자, 양소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이었다.
현수는 다시 술병을 들어 양소의 잔에 술을 채워 주었다.
“위위경, 들어가도 되겠사옵니까?”
밖에서 행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오게!”
방문이 열리며 행수가 기녀들을 이끌고 안으로 들어왔다.
시끌벅적하던 방안은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모두 기녀들에게 눈이 가 있었다.
“역시 행수야! 하하하!”
정균이 크게 웃었다.
어디 비할 데 없는 기녀들의 자태에 만족한 정균이었다.
특히 눈에 딱 트이는 기녀 둘이 있었다.
대부분 그 두 기녀에 눈이 가 있었다.
하지만 이미 짝이 정해진 두 기녀였다.
“너희들이 앉고 싶은 대로 가서 앉아라.”
현수의 말 한마디에 기녀들이 쭉 자리로 가서는 자리하였다.
“너희들은 저분 자리로 가거라.”
행수가 대놓고 두 기녀에게 양소를 가리키며 말하자, 두 기녀가 양소에게로 향하였다.
“이보게, 행수. 저 두 사람은 위위경의 시중을 들 아이들 같은데 어찌…….”
추밀원 관리가 말하자, 현수가 답하였다.
“내가 그리로 보내라고 미리 말해놓았어.”
“아, 송구합니다. 위위경.”
관리는 고개를 숙이며 말하였다.
“하하, 아니네.”
“자, 행수. 이제 시작하게.”
“예. 위위경.”
짝짝!
박수 두 번에 악공들과 무희들이 안으로 들어와 인사를 하며 악공들이 자리하였다.
주악이 곧바로 울리자, 무희들이 춤을 추기 시작하였다.
“너희 둘, 오늘 밤 너희가 모셔야 할 분들을 잘 모셔야 하느니라.”
“예. 위위경.”
“아이고, 양공은 좋겠네. 미녀들이 둘씩이나 있어서! 하하하!”
“부러우십니까!?”
“하하하!”
천시호는 악저의 말에 크게 웃었다.
곧이어 시끌벅적하게 웃음꽃이 피어나며 술자리가 이어졌다.
현수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슬쩍 양소를 보았다.
양소는 두 미녀에게 술과 안주를 잘 받아먹고 있었고, 영 싫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래. 그동안 외로웠을 테니… 즐기라고, 즐겨.’
현수는 미소를 짓더니, 양소 옆에 있는 기녀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너희들 이름이 무엇이냐?”
“자운선이라 하옵니다. 위위경.”
“연화라 하옵니다.”
“자운선과 연화라? 하하, 이름이 곱구나. 하나는 연꽃이요, 또 하나는 자색 구름의 선녀라? 너희들 금일 너희들의 낭군이 될 분을 잘 모셔야 한다. 알겠느냐?”
“예. 위위경.”
두 기녀가 답하자, 현수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위위경, 한잔 드시지요.”
“오냐오냐.”
현수가 옆에 앉은 기녀의 말에 술잔을 들자, 기녀는 술을 따랐다.
현수는 한잔 마시고는 분위기에 취해 주위 사람들과 어울리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어 갔다.
* * *
저녁이 깊어졌다.
기방은 아직도 시끌벅적했다.
큰 채에서 먹고, 마시며 즐기던 이들은 대부분 취해서 자리에 누워 버리거나 기녀를 따라 각기 방으로 들어간 이들이 많았다.
그중에 양소가 먼저 취해서 기녀들이 데리고 방으로 향하였다.
반면, 현수는 마차 안에서 저택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하아…….”
깊은 한숨을 내쉬면서 경대승이 했던 말을 다시 되새겨 보았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정확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하였다.
물론 혼자서 결정할 일이 아니었지만, 어떻게든 이의방에게 건의하여 밀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몰아쳐 왔다.
“위위경, 자택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래. 고생하였다.”
마부가 곧장 마차 문을 열고 간이계단을 세우자, 현수는 천천히 마차에서 내려왔다.
그때 눈에 들어온 건 다름 아닌 수아와 복이었다.
“하하, 이 녀석들아! 자지 않고 여기서 뭐 하느냐?”
늦은 시간까지 꿋꿋하게 있던 아이들이었다.
“위위경, 오셨사옵니까.”
“아니, 최 집사. 아이들이 안 자고 여기 왜 있는 건가?”
“위위경께서 오실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하여…….”
“허허, 자네가 고생이 많네. 애들은 내가 데리고 갈 테니 자네 먼저 들어가게.”
“예. 위위경.”
최 집사는 허리를 숙이며 인사하더니, 안으로 들어갔다.
현수는 수아와 양복의 손을 꼭 쥐었다.
“이 아비가 보고 싶었냐?”
“예. 아버지. 소녀, 아버지께서 오실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사옵니다.”
“하하하!”
수아의 말에 절로 웃음이 지어졌다.
“오냐. 이렇게 늦었으니, 이만 들어가서 자자.”
현수가 둘을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려고 하자, 빼꼼히 문 쪽을 바라보는 양복의 행동에 현수는 한쪽 무릎을 굽히었다.
“오늘은 아버지가 바빠서 오지 못하고, 내일 아침에나 오실 거다. 그러니 오늘은 언니와 함께 자도록 하여라. 응?”
알아듣지는 못하였지만, 양복은 물끄러미 현수를 바라보다가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현수는 둘을 데리고 몸채로 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