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실록편찬이라? 그래, 내가 하지 않으면 누군가는 할 테고… 허나, 문제가 심각해지는데… 어찌해야 하나…….’
이의방은 두 눈을 질끈 감고, 손을 이마에 얹었다.
결국 결정권은 이의방에게 있다.
이의방이 하자고 하면 하는 것이다.
하지만 실록을 편찬하자고 하면 문하시랑평장사 이의민과 박존위는 죽은 목숨과 다름이 없었다.
경인년 당시 거병에 합세했던 장수들뿐만 아니라, 문신들도 목이 달아날 것이었다.
이의방은 이를 며칠간 고민하고 또 고민하였다.
하지만 결정할 수가 없었다.
“그냥 사초만 남기고, 편찬은 하지 마십시다.”
감문위 상장군 최원호가 말하였다.
“그게 무슨 말이오! 아무리 우리가 다 죽는다고 하더라도 실록은 편찬되어야만 하오!”
“우복야의 말에 일리가 있습니다.”
참지정사 조영인의 말에 지문하성사 한문준, 판추밀원사 유문후 등이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하였다.
“지금 다 같이 죽자는 거요!”
박존위가 발끈하자, 더욱더 치열하게 언쟁은 계속되었다.
이의방은 신료들의 언쟁 속에서 홀로 생각하였다.
“사관이 사초를 기록하고 그 사초를 가지고 실록을 편찬하는데… 우리의 죄가 적히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아무리 반대해도 사관이 기록한 사초가 있는 한,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오.”
“그럼 그 사초를 태워버리면 되는 거군!”
이의민의 말에 신료들이 발끈하였다.
“사초를 태운다니! 그 무슨 막말이오! 평장사!”
“어차피 이래 죽나 저래 죽나… 차라리 태워버려서 그때의 기록을 다 지워버리면 그만 아니오. 사초 따위 새로 써버리는 게 낫지 않겠소이까!”
“그건 아니 되는 소리입니다. 어찌 일국의 신하가 사초를 태우자는 소리를 하는가!”
이의민의 망언(妄言)에 한문준이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 외쳤다.
“사초를 태우고 새로 쓴다면 우리 입맛대로 바꾸자는 말이 아니오. 그럼 그건 가장 부끄러운 역사로 기록될 것이외다.”
“그게 무슨 말이오!”
“이 중서문하성에서 무슨 말이 오가는지 주위를 보면 알 것이 아니오!”
“뭐, 뭐요!?”
이의민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중서문하성에서 오고 가는 말들을 사관들이 적어서 내려고 가고 있었다.
자기 말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사관들에 의해서 적혀 내려가고 있는 걸 본 이의민은 침을 꿀꺽 삼키었다.
이의민은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너무 흥분한 나머지 사리 분간이 안 된 것이었다.
“중서문하성에서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그 이야기들을 빗대어 사초로 남기고 그 사초를 후대의 실록에 남겨지게 될 것인데 왜 그걸 모르시오. 그럼 저 사관들도 다 죽이자는 소리요!?”
이의방이 집정을 하게 되면서 중방에도 중서문하성에도 사관을 배치한 지 사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그 사관들은 중서문하성, 중방에서 신료들이 오고 가는 말들을 모두 기록하게 하였다.
“허어!”
이의민은 자리에 앉아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합하, 이번 실록편찬에 대해 말이 나온 김에 결정을 내려주시지요.”
지문하성사 한문준의 말에 이의방은 눈을 뜨고 신료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하다가 이내 무거운 표정을 지으며 말하였다.
“어차피 우리가 후대에 욕을 먹고, 역적이라고 손가락질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바요. 문극겸, 유응규, 이준의, 한문준을 춘추관에서 선황제의 실록편찬을 맡기겠소. 이 사실을 황제 폐하께 고하고, 실록편찬이 완성되면 철제로 활자를 만들어 보관토록 하시오.”
“합하!”
“이러실 수는 없습니다!”
“합하, 다시 고려해주십시오!”
“합하! 이건 무신뿐만 아니라, 문신들에게도 문제가 되는 일이옵니다!”
“어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 하는가!”
답답하다 못한 문극겸이 반대하는 자들에게 소리쳤다.
“우리가 반대한다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우리가 다 죽고 난 뒤에 누군가가 실록을 편찬할 것이오. 결국에 우리는 비겁한 겁쟁이라는 낙인까지 찍히게 될 것입니다. 차라리 후대에 후손들에게까지 낙인이 찍힐 바에 지금 우리가 먼저 찍히는 게 나을 것이오.”
문극겸에 말에 몇몇은 수긍하는 듯 보였지만, 이의민은 부들부들하며 문극겸을 당장 죽일 듯이 노려보다가 시선을 돌리었다.
“그럼 실록편찬을 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짓겠네. 다들 동의하는가?”
“예! 합하…….”
대답하는 신료들과 대답하지 않는 신료들이 있었다.
“그럼 그렇게들 알고 나는 이만 나가보겠네.”
이의방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자, 다른 신료들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사초를 기록하는 사관들도 밖으로 나가자, 이의민은 문극겸을 노려보며 말하였다.
“우복야, 내 언젠가 네놈을 산채로 목뼈를 뽑아낼 것이다…….”
이의민은 주먹을 불끈 쥐며 중서문하성 밖으로 나가버렸다.
“하아…….”
문극겸은 한숨을 내리 쉬었다.
“정말 괜찮겠습니까?”
유응규는 걱정의 눈초리로 문극겸을 바라보았다.
“어쩔 수가 없소. 이 일은 벼르고 벼르던 일이 아니오. 나라가 안정되어 갈 때 실록을 편찬하는 것이 신하의 도리 아니겠소이까.”
“나는 신하의 도리보다 평장사가 무슨 짓을 할지가 걱정되오.”
“그게 무슨 말입니까?”
“평장사의 성격을 아직도 모르겠소? 그토록 잔인한 성격을 가진 평장사가 실록편찬이 시작되면 무슨 짓을 할지 누가 알겠소.”
한문준은 걱정스러운 소리를 하였다.
“허면… 실록편찬을 반대하시는 것입니까?”
“반대하는 게 아니라, 편찬에 있어서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걱정이 되는 것이지.”
“걱정이라니요?”
“평장사가 사관들에게 협박이라도 해보게. 그럼 사관들은 어떻게 하겠나?”
“합하께서 직접 명을 내리신 일인데… 평장사가 사관들에게 허튼짓은 하지 못할 것입니다.”
유응규의 말에 한문준은 고개를 저었다.
“모르는 일이지. 차라리 편찬하면서 방책을 하나 만들어야지.”
“…방책이라니요?”
한문준은 문극겸을 바라보며 말하였다.
“삼국지 알지?”
“알지요. 삼국지를 왜 거론하십니까?”
“삼국지에 보면 누가 어떤 일을 하였고, 누가 어떤 짓을 하였으며 누가 어떤 선행을 베풀었고, 얼마나 그가 한 분야에 있어서 출중하였는지. 자세하게 나오는 대목이 있다는 거 잘 아실 거네. 그걸 바탕으로 해서 한 사람당 한 권 아니, 수십 권이 되었든 역적이라 하더라도 그 이름을 올려 후세에 알리는 게지.”
한문준은 지금 하나의 안전장치를 거론하였다.
“열전을 쓰자는 말씀이십니까?”
“바로 보았네. 이 열전이야말로… 지금의 실록편찬을 할 때 가장 좋은 안전책이야. 고려사 태조 성조부터 개국 공신을 시작으로 하여 열전을 써 내려간다면 또 하나의 역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한문준의 말에 탁월하다고 생각한 문극겸은 고개를 끄덕였다.
“많은 인력이 필요할 것이니, 국자감에 학생들을 동원해서라도 꼭 열전을 완성해야 하네.”
“하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개국 공신부터 써 내려간다고 하더라도… 어떤 인물을 쓰고 어떤 인물을 배제할 것인지도 마땅히 생각해야 할 게 아닙니까.”
좌복야 이준의의 말에 한문준은 말하였다.
“충신과 간신, 역신을 연도별대로 찾아서 기록하는 걸로 하십시다. 그들 역시 자세하게 세부적으로 써 내려가야 하오.”
“허면… 합하의 기록 역시나 세부적으로 쓰자는 말이군요?”
“합하의 기록은 실록편찬에 옮기게 될 것이고, 그 편찬한 것을 토대로 열전에 적어 내리다가 합하의 치세와 공을 적어 내려가면 그 누구도 합하의 문제 제의를 쉽게 하지는 못할 것이네. 현 태자비께서도 아무 탈 없을 것이야.”
이준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평장사는 어찌 되는 겁니까?”
“실록이 편찬되고, 고려사 열전이 작성되면… 평장사는 가망이 없는 거지. 차라리 평장사 하나로 끝을 내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일 수도 있네. 평장사가 나라에 큰일을 하고 있으니, 그걸 적어 넣는다면 평장사에게도 새로운 기회가 생길 수도 있지. 그렇게 되면 평장사 이의민에게 어떤 죄도 물을 수 없을 것이네.”
“그렇게 되면 다행이지만, 만약 큰 공을 세우지 못한다면… 자식 세대에서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새로운 기회가 생기더라도, 선황제를 시해(弑害)했다는 오명은 벗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거기에 평장사가 반란이라도 일으키려 든다면.”
“합하께서 계시는데 그럴 일은 없을 거야. 아무리 평장사라 하더라도 합하께서 계시는 한, 반란은 어려울 것이네.”
한문준의 말에 편찬을 맡게 된 이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실록편찬을 하며 고려사 열전을 써 내려가는 걸로 결론을 지으면 되겠습니까?”
문극겸의 물음에 실록편찬을 맡게 된 이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로써 선황제의 실록편찬과 그 안전장치인 고려사 열전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 * *
그날 저녁.
천동택에 자리를 마련하여 이의민을 위로하고 있었다.
“합하, 저를 정녕 버리려 하시는 것입니까?”
“버리다니… 그 무슨 말인가. 내 절대 자네를 버리지 않을 것이니, 걱정하지 말게. 누군가 자네를 벌하라고 하는 소리가 있다면 내 그놈의 목부터 잘라 버릴 것이네.”
이의방은 그렇게 이야기하며 이의민과 술잔을 부딪치고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는 술병을 들어 이의민에 빈 잔에 술을 채워 주었다.
“자네 자식들도 걱정할 거 없어. 내가 있으니 말이네. 또한 내 뒤를 이을 자가 자네 아들과 자네를 지켜줄 것이야.”
“합하, 후계를 미리 정하신 것이옵니까?”
“누구겠어.”
이의방은 피식 웃으며 다시 술을 마시었다.
“합하, 정말 믿어도 되는 것이지요?”
이의민은 다시 한번 더 물었다.
“이 사람, 속고만 살았나? 내가 언제 자네에게 거짓말을 한 적이 있던가.”
“합하, 합하께서 황제가 되시면 아니 되겠습니까?”
“뭐, 뭐야?”
이의민의 말에 이의방은 당황했다.
“솔직히 합하께서 황제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습니까. 현재 이 나라가 왕씨의 나라라고 하더라도 이 고려라는 천하가 합하의 손아귀에 있는데 합하께서 황제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황제가 되시면 제가 이런 걱정도 하지 않아도 되는 거 아닙니까.”
“이 사람, 취하였구먼… 내 아니 들은 거로 할 테니, 오늘은 여기서 쉬고 내일 집으로 돌아가게. 내가 다시 말하지만, 자네는 내가 있는 한 절대 자네를 건드릴 수 있는 자는 없을 것이네. 내가 약조하고 그다음 내 자리를 이을 자 또한 자네를 지켜줄 것이야. 그러니 자네 혹여라도 혹여라도 이상한 생각은 하지 말게. 알겠나?”
이의방은 이의민에게 혹여라도 다른 생각을 할까 싶어 앞으로 아무 일 없을 것이라고 단단히 새겨 두었다.
“예. 합하…….”
이의방은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나 밖으로 나갔고, 이의민은 연거푸 술을 따라 마시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