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위위경, 남송 예부 상서 증효운 대인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모시어라!”
덜컹.
방문이 열리면서 남송 예부 상서 증효운과 그의 옆에 있는 중년의 남성, 그리고 역관이 함께 들어왔다.
그 뒤로는 수많은 서적이 쌓여있었다.
“아이고, 어서 오십시오.”
“몸은 괜찮으십니까?”
“예. 많이 좋아졌습니다.”
“지난번에 부탁하신 송나라, 대식국의 잡서 적들입니다.”
“하하하! 감사합니다. 이렇게 귀중한 서적을 보여 주시다니…….”
현수는 크게 기뻐하며 감사함을 감추지 못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가져온 서적들을 살피어 보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수은 설계도인 신의상법요, 의학서적 도경본초와 더불어 몽계필담이 있었다.
거기에 고려의 산학 기본교서인 구장산술부터 각국의 언어를 정리한 서적들까지 없는 게 없었다.
현수가 정수론(整數論)의 서적을 들고 펼치더니, 이내 몇 줄 읽지도 않고 곧장 서적을 닫아 버렸다.
“아, 수학은 진짜 못해 먹겠다…….”
혼자 작게 중얼거리던 현수가 증효운을 바라보며 살며시 고개를 숙이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귀중한 서적들을 구해주셔서.”
“저… 그리고 위위경께 따로 소개해드릴 분이 있습니다. 제 옆에 있는 분은 남송의 대학자이신 주희 선생이십니다.”
“…주희?!”
주희라는 말에 현수는 그에게 살며시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였다.
주희는 현재 누구보다 자부심이 굉장히 높아 보였다.
증효운 역시 그런 주희를 높이 우러러보고 있는 게 눈에 보였다.
“음… 주희 선생이란 분은 왜 저에게 소개를 해 주려 하시는지요?”
“위위경께서 잡서들을 가져가신다고 전해드렸더니, 주희 선생께서 집대성하신 학문을 고려에 직접 전달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그 학문이 뭡니까?”
“성리학이라는 학문입니다.”
성리학이라는 소리에 현수의 표정이 급격히 바뀌자, 증효운은 살짝 당황하였다.
“왜 그러시는지요?”
증효운의 물음의 대답하지도 않고, 현수는 주희를 바라보았다.
“선생, 선생이 만든 성리학이란 학문은 어떤 학문입니까?”
현수의 물음에 역관이 통역해주었고, 이내 주희가 망설임 없이 답하였다.
“참된 학문입니다.”
참된 학문이라는 말에 현수는 헛웃음이 나왔다.
현수는 톡 쏘아붙이며 주희에게 말하였다.
“선생의 학문은 우리 고려에 전혀 필요가 없는 학문이랍니다. 그러니 우리 고려에 선생의 학문을 풀어놓으려고 하는 생각 따위는 하지 말아주시지요. 그리고… 이야기 나온 김에 한 가지 더 이야기하자면 선생이 집대성한 학문이 훗날 남송의 있어서 가장 불필요한 학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현수의 말을 예부 상서 증효운이 주희에게 전하자, 주희의 얼굴이 붉어지다 못해 터질 것만 같았다.
명백히 자신을 무시하는 행위의 언행이었기 때문이었다.
“선생 같은 사람들이 여성이라는 존재를 가장 하찮게 여기고, 남성의 전유물로 생각하지 않소. 그것 자체부터 당신들이 말하는 학문은 개판이라는 거요. 여성들이 지켜야 할 덕목을 멋대로 만들어 가르치면서 말이오.”
“…….”
“이청조라는 시인을 보시오. 여성에 대한 유교적 속박을 거부하고 남성과 동등한 여성으로서 평등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쪽들이 평생 괴롭히질 않았소이까. 학문하는 자로서 부끄러운 줄 아시오. 아니, 당신네 나라 여성들에게 미안함을 느끼시오.”
“…….”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당신이 집대성한 학문은 우리 고려에 필요 없소. 우리 고려는 실학 위주의 학문만을 추구하는 나라이니 말입니다. 뭐, 내가 이렇게까지 이야기했는데 선생이 집대성한 학문을 굳이 고려로 보내고 싶다면 내가 가져는 가드리겠소. 하지만 우리 고려는 남녀의 차별을 두지 않고 다 가르칠 거요. 그게 어떤 학문이든지 말입니다.”
현수는 주희에게 자신이 가진 생각을 말해주었다.
자존심 드높이던 주희는 역관의 말을 듣고서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서 뒤를 돌아 밖으로 나가버렸다.
증효운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현수를 바라보며 말하였다.
“나중에 다시 뵙고 싶네요. 이만 가보겠습니다.”
“예. 예부 상서도 다시 뵐 때까지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예부 상서 증효운은 현수에게 짧게 인사를 하더니, 역관과 함께 객관 밖으로 나갔다.
* * *
한편.
양소는 모든 짐을 고려 사신들이 있는 객관으로 모두 옮기고 난 뒤, 자택(自宅)을 바라보고 있었다.
끼익.
대문이 열리는 소리에 양소는 현수일까 하여 뒤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내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지금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양소를 떠났던 아내였다.
그토록 가지 말라고 부탁하였지만, 매몰차게 떠났던 아내가 옛집으로 다시 들어섰다.
양소는 전 아내를 바라보며 아무런 말을 잇지 못하다가 시선을 피하며 겨우 입을 열었다.
“여긴 어쩐 일이오.”
양소의 물음의 그의 전 아내는 양소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고려로 떠난다면서요.”
“그렇소.”
양소는 슬쩍 전 아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모습은 여전히 예전만큼이나 눈이 부실 만큼 아름다웠다.
“어쩐 일로…….”
“집문서 돌려줘요.”
“…응?”
“떠난다면서요. 원래 이 집 내 것이잖아요.”
양소는 고개를 끄덕이며 군말 없이 품속에서 문서를 꺼내어 그녀에게 건넸다.
그녀는 문서를 받아 들고는 망설임 없이 대문으로 몸을 돌렸다.
양소는 그런 그녀의 손을 부여잡았다.
“나와 함께 고려로 갑시다.”
“나는 되돌릴 수 없는 길을 갔는데, 당신과 어떻게 고려로 가겠어요.”
“부인…….”
“행복하길 바랄게요.”
짤막한 그녀의 한마디에 양소는 손을 놓아주었다.
그녀가 집 밖으로 걸어 나가자, 양소는 그녀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가만히 뒷모습만 지켜 보고 있다가 그녀가 완전히 보이지 않자 천천히 밖으로 나가 대문을 닫고서는 미련 없이 그 집을 떠나 객관으로 향하였다.
* * *
“합하, 보문각 대제학 두 분과 우복야, 좌복야께서 합하를 알현(謁見)하길 청하옵니다.”
“모시어라!”
덜컹.
방문이 열리면서 안으로 들어온 문극겸은 이의방에게 인사를 하였다.
“좌정(坐定)들 하시오. 다들 공사다망(公私多忙)할 텐데 어쩐 일이오?”
문극겸이 자리에 앉더니, 이의방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합하, 합하께서는 이 나라의 수국사도 겸하고 계십니다.”
“응? 아, 그렇소. 수국사도 겸하고 있지… 그런데 그게 왜요?”
“수국사란 모든 기록을 관장하기에, 재상들이 춘추관 수국사로 겸직하옵니다.”
“아, 그거야 알고 있는데…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요. 수국사 자리를 달라는 말이오?”
“아니옵니다. 합하. 이제는 더 이상 미룰 수가 없다는 말씀을 드릴까 하옵니다.”
“무얼 말이오?”
“선황제의 실록편찬 말이옵니다.”
실록편찬.
이의방은 이 이야기가 안 나오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선황제의 장례를 치르고 난지 어느덧 십 년이 흘렀고, 그동안 선황제의 실록편찬에 관한 이야기는 아무도 꺼내지 않았다.
그런 실록편찬을 문극겸이 어렵게 꺼낸 것이다.
“합하, 실록이 편찬되면 경인년에 있었던 일도 모두 상세히 기록됩니다. 선황제께서 어찌 돌아가셨는지… 낱낱이 기록이 될 것이옵니다.”
문극겸의 말에 이의방은 이준의를 바라보며 물었다.
“좌복야도 같은 생각이오?”
“예. 합하.”
“두 대제학 분도 같은 생각입니까?”
“그러하옵니다. 합하.”
보문각 대제학 두 사람의 대답에 이의방은 쉽게 대답하지 못하였다.
선황제의 실록이 편찬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쾅!
중방 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건 평장사 이의민이었다.
한 손에 부월(斧鉞)을 들고 들이닥쳤다.
“네 이놈! 문극겸! 네놈이 지금 나와 합하를 해하려 하는 게냐!”
“평장사! 이게 무슨 짓이오!”
이준의가 큰소리를 치며 이의민을 노려보았다.
“우복야, 미친 것이오!? 실록편찬을 무슨 의미인지를 모르는 것이오이까!”
“알고 있소이다! 언제까지 미룰 수도 없는 노릇이오!”
“그까짓 실록편찬이 뭐가 대수요! 적지 않으면 그만 아니오!”
“그렇지 않소이다! 황제의 실록이 적히지 않은 나라가 어디 있소!”
문극겸이 소리쳤고, 이의민은 부월을 당장에라도 내려칠 자세를 취하였다.
“이 평장사, 부월을 내리게.”
“합하!”
“내리라지 않는가!”
이의방이 버럭하자, 이의민은 이의방의 명을 받아 부월을 내렸다.
“우복야, 실록편찬에 관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십시다. 지금 상황이 아닌 듯하오.”
“합하, 어차피 모든 이들이 반발할 일이란 걸 각오한 일이옵니다. 이런 식으로 미루시다가는 실록편찬은 진행되지 못할뿐더러, 오히려 더 좋지 않은 평가를 받게 될 것이옵니다.”
“실록은 황제의 재위 동안 있던 일들과 정치, 법령 그 외에 모든 사실을 적은 기록입니다. 폐주가 복권(復權)된 지 십여 년 가까이 흘렀어도 편찬하지 못한다면… 경인년의 거병이 왜 일어났으며 일어난 연유가 무엇인지도 모른 체 후대는 살아갈 것입니다.”
“차라리 모르는 게 낫습니다. 실록이 편찬되면 합하와 저희 경인년에 거병에 들고 일어났던 이들은 모두 역적의 오명을 쓰고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의방은 심각하게 고민해야만 하였다.
“생각할 시간 좀 주게… 갑작스럽게 편찬하자고 하니 내 당황스러워 그러네.”
“합하, 아니 됩니다!”
“합하! 하셔야 합니다!”
이의민과 문극겸이 서로 외쳤다.
“중서문하성에서 이 일을 의논할 테니, 더 이상 시끄럽게 하지 말고 나가게!”
이의방이 소리를 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중서문하성에서 결과가 나올 때까지 입들 함부로 놀리지 마시오. 안 그러면 내 이 월도로 목을 쳐버릴 테니!”
콰앙!
옆에 놓인 월도를 들고 탁자를 내리치자, 탁자가 움푹 파여 들어갔다.
중방에 들어와 있던 이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이의방에게 고개를 숙이며 밖으로 나갔다.
이의민 역시 밖으로 나가자, 이의방은 그대로 자리에 앉았다.
“실록을 편찬한다… 그래… 손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듯이… 어찌 내가 역사를 가릴 수 있겠는가.”
* * *
며칠 후, 중서문하성의 문무백관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중에 이의방은 상석에 앉아 회의를 주재(主宰)하였다.
“선황제의 실록편찬에 대해서 다들 이야기해 보시오.”
이야기를 해보라는 말에 중서시랑평장사 윤인첨이 자리에서 일어나 말하였다.
“역대 황제분들의 실록이 있으나, 선황제의 실록은 아직 편찬되지 않는바… 선황제의 실록은 마땅히 편찬돼야 한다고 보옵니다.”
쾅!
“이보시오! 지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요! 그럼 우리가 모두 역적이라고 광고하는 게 아니오!”
중서문하성은 일순간에 반대하는 신료들과 찬성하는 신료 둘로 나누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