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황실에서 재배하고 있는 목화씨를 원합니다.”
악정이 현수의 말을 전달하자, 진우형은 흠칫하였다.
목화는 황실에서 본격적으로 재배한 기간도 얼마 되지 않을뿐더러 처음으로 들여온 식물이었다.
그런 목화를 달라고 하니, 진우형은 난감한 표정이었다.
“목화씨를 구해주시면… 제가 섭섭지 않게 보답하겠습니다.”
진우형은 잠시 곰곰이 생각하였다.
황실에서 관리하는 목화를 빼돌린다면 자신에게 닥쳐올 화를 피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태상황제의 총애를 받는다고 하더라도 현 금상 황제에게는 달랐다.
지난번 태상황제가 발작한 이후로 자신에게 잠시 기대었지만, 진우형은 금상 황제를 경계하였다.
금상 황제는 자신에 꼬투리 하나 잡아내기 위해 호시탐탐 감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대답이 왜 없으십니까?”
“그 문제는… 태상황제를 직접 알현하셔야 할 겁니다.”
진우형의 말에 현수는 고개를 갸웃하였다.
“태상황제가 우리를 만나주겠소? 지난번 그 일도 있는데.”
“그건 단지 사고일 뿐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몸 회복이 많이 되셨으니, 한번 알현해 주시지요.”
진우형의 말 속에 담긴 속뜻을 파악한 현수가 진우형에게 말했다.
“지금 황제를 만나 거래를 하라는 거군.”
“…예?”
“목화를 줄 수 없으니, 직접 거래하라는 말 아니오?”
현수는 피식 웃었다.
“곧 선물을 바리바리 싸들고 태상황제를 만나러 갈 테니, 말이나 잘 전해주시지요.”
악정은 현수의 말을 통역하자, 진우형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물품들은 제가 저녁에 조용히 보내 드리지요.”
진우형은 고개를 끄덕이며 객관 밖으로 나가다가 잠시 멈추어 서며 현수를 바라보며 말하였다.
“천축 상인을 찾아가 보세요. 가면 찾으시는 게 있을 수도 있으니.”
진우형은 그렇게 말하고는 객관 밖으로 나갔다.
“악 장군.”
“예. 위위경.”
“상인들을 통해서 이것들을 진우형의 저택으로 보내게.”
“예. 위위경.”
* * *
얼마 지나지 않아서 객관으로 환관이 찾아왔다.
태상황제 알현을 허락한다는 말을 전하러 온 것이었다.
다만 입궁할 때 악정은 데리고 들어오지 말라고 환관이 전하였다.
현수는 환관의 말을 수용한 채로 따로 역관만 부르고, 정균과 악정은 객관에 남게 한 채로 환관의 뒤를 따라 남송 황궁으로 들어갔다.
거대한 황궁의 대전을 지나서 태상황제가 있는 궁전인 용수전에 들어섰다.
환관이 문 앞에서 현수가 도착했음을 고하자, 문이 열리었다.
가만히 서서 나전칠기로 장식된 붓을 들고 있는 황제가 눈에 들어왔다.
현수가 역관과 함께 안으로 들어가자, 태상황제는 붓을 내려놓고 현수를 바라보며 물었다.
“몸은 괜찮은가?”
“몸은 괜찮으시냐 여쭙습니다.”
역관이 조용히 현수의 귀에 말하였다.
“예. 폐하. 덕분에 몸이 많이 나아졌사옵니다.”
현수는 허리를 살짝 굽히며 말하였고, 태상황제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천천히 계단 아래로 내려왔다.
“그대가 몸이 많이 회복되었다니, 짐이 한시름 놓아도 되겠군.”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우선 앉게.”
태상황제의 말에 현수는 자리로 가서 앉았다.
궁녀들이 곧 차를 내왔고, 태상황제 역시 현수의 옆자리에 앉았다.
“자네… 일부러 보여 준 건가?”
태상황제의 말을 역관이 통역해주자, 현수는 모르겠다는 듯 태상황제를 바라보며 물었다.
“무얼 말입니까?”
“모른 척하는 건가? 아니면 짐을 능멸하는 건가?”
태상황제의 말에 현수는 미소를 지으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답을 요구하는 황제의 얼굴에 현수가 찻잔을 내려놓고 등에 의자를 기대며 황제에게 말하였다.
“제가 폐하를 능멸하려 그런 게 아닙니다.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날지는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리고 악정 장군은 고려의 사신으로서 당당히 온 것입니다.”
현수의 말에 역관이 통역하였다.
“그럼 악정이라는 자가 어찌 고려에 있는 것인가? 그의 아비는 역적으로 몰려 죽었는데.”
“폐하, 말은 바로 하셔야지요… 역적으로 몰려 죽은 게 아니라, 폐하가 두려워서 그를 죽인 거 아닙니까? 그리고 악정 장군이 왜 고려에 있는지는 태상황제께 말씀드릴 의무가 없습니다.”
“뭐, 뭐라!?”
태상황제가 발끈하였다.
그리고 현수는 여유롭게 차를 마시었고, 태상황제는 여전히 부들부들했다.
여기서 고려의 사신을 죽인다면 전쟁 선포와 마찬가지였기에 함부로 행동할 수 없었다.
현수는 이를 놓치지 않고 태상황제를 바라보며 말하였다.
“여기까지 이야기하겠습니다. 더 이상 이야기하겠다가는 혈압 오르실까 해서 말입니다.”
태상황제는 크게 숨을 들이쉬며 흥분을 가라앉히더니, 차를 마셨다.
평정을 찾은 황제가 현수를 보며 헛웃음을 지으며 자신을 보자고 한 이유에 관해 물었다.
“짐을 보자고 한 이유나 들어보자.”
“목화씨를 좀 내어 주십시오.”
“뭐, 뭐라?”
현수는 밑도 끝도 없이 목화씨를 내어 달라고 말하였다.
“화약과 화포를 주었으면 되었지, 목화씨까지 내어 달라니!”
“목화씨를 저에게 몇 개만 내어 주십시오. 폐하, 집에서 좀 키워보려고 합니다.”
집에서 키운다는 말에 태상황제는 어이가 없었다.
그걸 키워서 불리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으니 말이다.
태상황제는 현수를 경멸하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자신과 본인이 대등하다는 듯한 행동에 있어서 불쾌하기 그지없었다.
특히 황제 앞에서 느긋하게 등을 의자에 떡하니, 기대어서는 자신을 바라보는 게 정말 어이가 없었다.
“하아…….”
현수는 한숨을 내쉬더니, 의자 옆으로 몸을 살짝 기울이며 기대었다.
“몇 개만 주시지요. 폐하께서 저를 죽이려고까지 하셨는데 그 정도는 합당한 처사지요. 그리고 화약은 현 황제께서 주시는 것이지, 태상황제께서 주시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니 태상황제께서 제게 미안한 마음이 있으시다면 목화씨 몇 개만 주시옵서서.”
“하…….”
태상황제는 어이가 없었다.
현수는 어차피 받아도 그만 안 받아도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송나라 천축 상인을 찾아서 목화씨를 구해보면 그만이었다.
못 구하면 천축으로 상단을 보내어 구해볼 참이었다.
그 상인이 남송에서 어떻게 목화씨를 구해왔는지 모르지만, 구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재미있군. 짐 앞에서 이렇게 당돌한 사신이 고려 사신 말고 대체 어디 있겠는가. 조 환관.”
“예. 폐하.”
“목화 씨앗 함을 가져오거라.”
“예. 폐하…….”
현수는 씩 미소를 지으며 역관에게 살며시 이야기했다.
“목숨값치고 제대로 받아내는구먼.”
“축하드립니다. 위위경.”
“축하는 무슨… 저 목화라는 게 활짝 펴야지 축하를 받는 것이네. 죽어버리면 말짱 도루묵이고.”
“저 목화라는 게 무엇입니까?”
“직물 짜내는 용도야. 겨울에 입으면 따뜻해. 부드럽기도 하고.”
역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환관이 통을 가지고 와서는 황제에게 건네자, 황제는 현수에게 주라며 손짓하였다.
환관은 현수에게 통을 내밀었다.
“잘 받아서 키우겠사옵니다. 폐하.”
현수는 목화 통을 받아서 열어보았다.
그 안에는 목화씨가 가득 들어 있었다.
이에 현수의 입꼬리에 미소가 가득 머금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태상황제에게 허리를 숙이었다.
“다시 한번 더 감사의 말씀 올립니다. 돌아가는 대로 상단을 통해서 흑삼과 인삼차를 진상하도록 하겠사옵니다.”
“차? 차는 중국의 것이 제일 아니냐.”
“인삼은 고려의 제일이지요.”
“그래. 인삼은 고려의 제일이지.”
태상황제는 현수의 말에 동의하였다.
현수는 그렇게 태상황제와 알현을 끝내고 용수전 밖으로 나갔다.
* * *
달포의 시간이 흘렀다.
남송에서 이것저것 알아보았고, 필요한 것들은 상단을 통해 매입(買入)하고 있었다.
특히 유황을 대거 구입(購入)했고, 유향과 몰약, 침향을 나쁘지 않은 가격에 구매하게 하였다.
어차피 수입해서 가져올 거 미리 구해서 가져가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 자… 어떠냐? 맛이 있느냐?”
현수는 미소를 지으며 양복에게 물었다.
양복의 옆에 있는 역관이 현수의 말을 통역하였다.
수줍어하는 양복은 항시 말이 없었다.
대부분이 미소를 짓거나,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대신하였다.
“이 녀석, 나중에 크면 남자 좀 울리겠어.”
“하하하!”
악정과 정균은 현수의 말에 박장대소를 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하는 양복은 그저 미소만 지으며 음식을 먹고 있었다.
“위위경, 유향과 몰약은 왜 그리 많이 구매하십니까?”
“황태후 전과 황태비전에 올리려고. 그 두 향을 좋아하시네. 안사람들도 그렇고… 그나저나 꼭 구해왔으면 하는 게 있는데 남송에 있는지 모르겠군.”
“무엇인데 그러합니까?”
“음… 서양 식물인데 로즈마리라고, 향유(香油)로 만들어서 몸에 바르고 하면 진짜 좋은 거야.”
악정은 현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향유로만 쓰는 건가?”
정균이 물어왔다.
“음식에도 쓰고, 약으로도 쓰고… 생각보다 쓸 데 많은 식물입니다.”
“역시 의학 전공자는 다르구먼.”
정균의 말에 현수는 피식 웃으며 말하였다.
“전공자라니요… 전의감의 태의, 전의들이 저보다 훨씬 나은 사람들입니다. 감히 제가 그들에게 어떻게 비길 수 있습니까. 하하하.”
“음, 그렇지 않습니다. 위위경께서는 지난날 전의감 직책도 가지고 계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때는 그때이고… 지금은 다르네. 하하하!”
똑똑.
“들어오게!”
방문이 열리면서 상인들이 들어와 현수에게 고개를 숙이었다.
“음… 그래. 어떻게 구할 수 있는 건 다 구하였는가?”
“예. 위위경께서 구하라고 하신 건 다 구하였고, 지난번에 말씀하신 종자 역시 구하였습니다.”
“잘했네, 잘하였어.”
상인은 품속에서 현수가 구해 오라고 시킨 종자 씨를 상위에 놓았다.
“이게 위위경께서 말씀하신 종자이옵니다.”
현수는 가만히 종자 씨를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생했네. 그리고 대리석은 얼마나 구했어?”
“이천 근 정도 색상별로 구매하였습니다.”
“잘하였네. 이제 돌아갈 차비를 이제 하게나.”
“예. 위위경.”
상인들은 허리를 숙이며 인사하고 밖으로 나가자, 정균은 현수를 바라보며 물었다.
“대체 그놈의 돌덩이는 뭐에 쓰려고 하는 건가?”
“양공의 집 지어 줄 때 쓰려고 합니다.”
현수는 웃으며 말하였다.
“뭐? 집을 지어 주려고 돌덩이를 샀다는 말인가!?”
“예. 아니 데려가는데 도착하면 집이라도 있어야 할 거 아닙니까.”
“아니, 그냥 집을 사주면 되는 거 아닌가.”
“사주는 것보다는 지어 주는 게 좋은 거 아닙니까.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