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악정이 중간중간 통역해가며 서로 술잔을 주고받다 보니, 어느덧 늦은 저녁이 되었다.
독한 술을 다섯 병씩 비운 현수와 악정, 정균, 양소는 밖으로 나와 달빛을 보며 서로 술을 주고받으며 마시고 있었다.
양소의 딸은 기다리다 지쳐 양소의 무릎을 베며 잠들어 있었다.
“대단하시오. 어떻게 혼자서 딸을 지극정성으로 키우셨는지… 제가 다 존경스러워집니다. 양공.”
양소는 악정의 말을 들고는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곤히 자는 딸의 볼을 매만지며 말하였다.
“고려로 가라고 해서 처음에는 망설였소. 그곳에서조차도 남송에서처럼 사직하라고 하면 어쩌나 생각도 했습니다. 고려행을 결심한 건 온전히 딸 아이 때문이오.”
“…….”
“이곳은 자기를 버리고 간 어미와 멀면서도 가까운데… 나중에 진실을 알면 얼마나 상심할까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꾸역꾸역 아이를 키우면서 내 삶도 버텨왔는데… 아이가 커서 사실을 알게 되면 내가 감당을 못하겠더군요. 그래서 고려행을 결심한 겁니다.”
양소의 말을 전해 들은 현수는 양소의 손을 꼭 잡자, 양소는 현수를 바라보았다.
“양공이 이 남송에서 있었던 일을 고려에서 겪을 일은 없을 것이오. 내가 약조하겠소. 내가 있는 한 양공의 딸은 나의 딸과 마찬가지이며 그 누구도 양공의 딸을 함부로 넘볼 수 없게 할 것이오.”
“…….”
“양공의 딸은 어느 자제 집의 딸 남부럽지 않게끔 살게 할 것이오. 더불어 양공이 개발하고 싶었던 모든 걸 다 개발하시오. 나라에서 돈을 못 준다면 내 사비를 털어서라도 내어 줄 것이니, 개발하고 싶었던 모든 걸 마음껏 개발하시오.”
현수의 말을 악정을 통해서 듣게 되자, 양소는 살며시 고개를 숙이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까지 저희 부녀를 생각해 주셔서.”
“하하하, 우리 한번 잘해봅시다. 내 반드시 양공과의 약조를 지킬 것이오.”
현수는 양소에게 다시 한번 더 믿으라며 강조하였고, 이에 기뻐하며 술잔을 들어 모두 한 잔씩 마시었다.
* * *
다음 날 아침.
현수는 몹시 피곤한 눈으로 침상에서 일어났다.
통 잠을 못 자지 못했다.
술을 먹어서인지 환부가 가려워서 몸을 뒤척였고, 검에 베인 상흔 부분에 열감이 느껴져 열도 나서 고생을 좀 하였다.
하지만 아픈 것보다도 기술자를 고려로 안전하게 데려갈 수 있게 되어 정말이지 기뻤다.
현수는 눈을 비비며 신을 신었다.
그리고 주위를 한번 돌아보자, 어제 많이 마셔서 그냥 쓰러져 있는 정균과 악정이 눈에 들어왔다.
그 옆 구석에서 혼자 물끄러미 현수를 바라보는 양소의 딸, 양복을 찾은 현수는 아이를 향해 양팔을 벌렸다.
“이리 와 보거라.”
미소를 지으며 말하였다.
양복은 현수를 보며 살며시 한 발자국 다가가려다 멈추었다.
양복 옆으로 양소가 다가가 양복에게 무어라 말하자, 양복은 천천히 현수에게로 다가가서는 살며시 안기었다.
현수는 그런 양복을 번쩍 들어 올려 무릎에 앉히며 귀에다가 속삭였다.
“고려로 가면 남부럽지 않게 살게 해주마. 이런 누추한 곳에 살지도 않아도 된단다.”
현수는 짤막하게 이야기하더니, 양복을 번쩍 들어 올리며 밖으로 나갔다.
* * *
얼마 후, 양소의 딸과 잠시나마 함께 있다가 안으로 들어왔다.
집으로 돌아와 보니, 양소가 상위에 돌돌 말린 두루마기를 꺼내 놓고 있었고, 양소의 주위에는 정신을 차린 정균과 악정이 함께 있었다.
“다들 왜 그렇게 진지하게 들 있어.”
천천히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이에 양소는 군말 없이 두루마기를 펼쳐 현수에게 보였다.
두루마기 안에는 양소가 그동안 개발해 오던 물건이 그려져 있었다.
“남송에서 사용하는 화포입니다. 청동으로 만들었고, 무게는 900근이 나갑니다.”
양소의 말을 악정이 전달해 주었다.
“청동은 값이 비싸지만, 화포의 화력을 견뎌낼 수 있는 유일한 재료입니다. 청동 말고도 많은 광석들을 찾아보았는데, 철로 만들면 화력을 견디지 못하고 파편이 튀어 위험성이 높습니다. 청동은 깨질 때가 되면 취약 부위 등이 부풀어 오르거나 실금이 가는 등의 증상을 보여, 비교적 안전합니다. 그래서 주로 청동을 사용하지요.”
현수는 양소의 말을 다 듣더니, 양소를 바라보며 물었다.
“양공, 철과 비교하면 청동의 가격이 얼마나 되는지 아시오?”
“세배, 아니 네배 정도입니다. 아무래도 청동의 수요도 적다 보니, 수입을 해와야 한다고 합니다.”
악정이 양소의 말을 대답해주었다.
“일단 송나라에서 만들어서 준 화약과 화포가 있으니, 돌아가면 설계도를 토대로 양공이 지휘해서 청동 화포를 주조하면 됩니다. 그럼 그 후가 문제인데…….”
“뭐가 문제라는 건가? 청동이 비싸더라도 청동으로 만들면 되는 게 아닌가.”
정균의 말에 현수는 고개를 저었다.
“수십 문이 아니라 수백, 수천 문이 필요할 텐데… 그걸 모두 청동으로 만들 수는 없지요.”
“하면? 철이라도 사용해서 만들겠다는 건가?”
“예.”
“이 사람아, 철로 만드는 건 위험하다고 하잖나. 그리고 남송에서도 만들지도 못하는 걸 우리가 무슨 수로 만들어.”
“이 세상에 만들지 못하는 건 없습니다. 시간은 걸리겠지만, 철로 화포를 만들면 얼마나 좋습니까? 청동보다 훨씬 튼튼하지요.”
현수는 정균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하긴… 칼 맞아 가면서 화약 화포를 구해가는 자네인데… 누가 반대하겠나. 하하하!”
“하하하하!”
현수와 악정은 크게 웃었다.
그러더니 현수는 손으로 도안을 가리키며 양소에게 말하였다.
“양공, 이 화포를 철로 만들어 봅시다. 일단 청동 화포를 먼저 만들어서 포병을 육성하면서 철로 만든 화포는 연구해서 만들어 가봅시다. 돈이 얼마나 들든 개의치 마시오.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
현수의 말에 양소는 매우 당황해하는 표정이었다.
철로 만들면 시간과 돈이 얼마나 들어갈지 확답을 주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어쩌면 아예 만들지 못할 수도 있었다.
양소는 쉽게 대답을 할 수 없어 머뭇거리었다.
“양공, 돈 때문에 그러는 거라면 내 어제 말하였다시피 돈에 대해서는 생각도 하지 마시오. 내가 다 알아서 할 것입니다. 그대는 그냥 만들어서 결과만 보여 주면 되오. 아시겠소, 양공?”
“…….”
“욕먹는 일이라도 내가 다 욕을 먹겠습니다. 누가 양공을 해하려고 든다면 내가 양공과 양복을 지켜 줄 것이니,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만들어 주시오.”
악정은 양소에게 현수의 말을 그대로 전하였다.
양소는 진심 어리게 말하는 현수의 말을 듣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반드시 만들어 보여 드리겠습니다.”
양소의 말에 현수는 미소를 지어 보였고, 양소는 곧 화약에 대해 말하였다.
“화약을 만들려면 목탄, 염초, 유황이 필요합니다. 이것들을 모두 배합해야 하는데 손기술이 좋은 사람들이 있어야 합니다. 손기술이 없는 사람이 잘못 만지면 마찰이 일어나서 어떤 사고가 날지 모릅니다. 더군다나 유황, 목탄은 쉽게 구할 수는 있어도 염초는 쉽게 구할 수도 없을 겁니다.”
진지하게 화약에 대하여 짤막하게 말하는 양소의 말에 세 사람은 귀를 기울였다.
“양공, 그건 걱정하지 마시오. 고려에는 손기술 넘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리고 화약 재료도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 구해 오겠소. 그러니 우리 잘 한번 해봅시다. 하하하!”
현수는 양소의 손을 꼭 부여잡고 말하였다.
* * *
현수는 양소와 헤어지며 출발하는 날 사람을 보내겠다고 말하고 객관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객관으로 돌아오자마자 상인들을 만났다.
“그래. 어떻게 잘들 지내었는가?”
“예. 위위경께서는 몸 좀 어떠하십니까?”
“괜찮네. 그나저나… 내가 말하였던 그거 찾아봤어?”
현수가 찾는 것 다름 아닌 목화였다.
목화가 이 시대에 있을지 없을지 몰라도 한번 남송으로 온 김에 알아봐야겠다고 해서 상인들을 풀어 알아봤던 것이다.
“목화라는 건 모르겠고… 양모(羊毛)가 열리는 식물은 있다고 이야기 들었습니다.”
“양모가 열리는 식물?”
“예. 위위경. 남송 황실 안에서 직접 재배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식물은 황실 안에서 밖으로 일체 나갈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럼 그걸 누가 구했는지도 알고 있나?”
“모릅니다.”
목화의 단서 하나는 찾아내었다.
황실에서 밖으로 빼돌리지 않고 있다는 것만 알아도 충분히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래. 대식국 상인에게 종이는 팔았는가?”
“예. 남송에서 팔지 않으니 판매하기 수월했습니다. 한 상인에게 모두 다 팔았습니다.”
“잘 되었네. 내가 알아보란 작물은 어떻게 알아보았는가?”
“송구합니다. 말씀하신 작물들은 구할 수가 없는 작물들입니다.”
“…그렇군.”
현수는 고개를 여러 번 끄덕였다.
저번에 감자를 발견해서 혹시라도 다른 작물도 있을까 하여 알아보라 시킨 것이었다.
하지만 옥수수, 고구마가 지금 있을 리는 만무하다고 생각했다.
함경도 가서 발견한 감자라도 감지덕지였다.
“아, 이보게. 대리국에서 제일가는 대리석, 그리고 유리거울 좀 크고 이쁜 거로 구해 오게. 함경도에서 밀과 보리를 키울 것이니, 밀, 보리 종자도 많이 사들이게.”
“양은 얼마나 구하면 되겠습니까?”
“음… 대리석은 적당히 절단한 거로 최대한 많이 구하고, 유리거울은 한 30점이면 되겠네. 보리 종자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아.”
“예. 위위경.”
상인은 허리를 숙이며 답하였다.
“나는 곧 가볼 데가 있으니, 자네들도 그만 나가 일들 보게.”
“예. 위위경.”
이제 상인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려 하자, 현수는 마지막으로 나가는 상인에게 물었다.
“엘리시아… 그 아이는 잘 있는가?”
현수의 물음에 상인은 몸을 돌아서 답하였다.
“예. 위위경. 그리고 워낙 똑똑한 아이라, 나중에 크면 거상이 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그래? 다행이군… 뭐, 잘 지내고 있다니… 그래. 앞으로 그 아이를 좀 신경 많이 써주게.”
“예. 위위경.”
현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가라며 손짓하자, 상인들은 모두 밖으로 나갔다.
현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깔끔한 비단옷으로 갈아입고 금으로 만든 허리띠를 착용했다.
그리고는 객관을 관리하는 남송의 신하들을 불러 진우형을 만나고 싶다고 전하였다.
* * *
얼마 후, 소식을 들은 진우형이 객관으로 찾아와 현수와 대면 하고 있었다.
현수는 진우형에게 청자 두 점을 내밀었다.
“선물입니다.”
“그냥 주시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진우형은 청자를 덥석 받지 않았다.
현수가 악정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자, 악정은 자리에서 일어나 상 위에 두 개의 함을 올려놓고 열었다.
한 개의 상자에는 흑삼이 가득 들어 있었고, 또 다른 상자에는 인삼차가 가득 들어 있었다.
함 속에 있는 걸 본 진우형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려다가 바로 표정을 감추며 현수를 바라보며 물었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바로바로 말이 통하는 진우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