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화약과 화포는 언제쯤 받아 볼 수 있겠습니까?”
현수의 물음에 역관이 진우형에게 말하였다.
“화약은 만들어야 하고 화포는 주조해야 합니다. 따라서 시일이 필요합니다.”
진우형은 이것도 마치 예상했다는 듯, 품속에서 종이를 꺼내어 현수에게 건넸다.
현수는 종이를 받아 들고 펼쳐 보았다.
[화약 20근, 화포 20문.]
“이렇게 드릴 테니… 나머지는 고려에서 만들어 사용하시길 바랍니다.”
“그러죠.”
“그럼 각서도 받았고… 화약과 화포도 빠른 시일 내에 준비해드릴 테니, 이곳에서 용무를 다 보시면 돌아가십시오.”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옵고… 혹시 모르니, 오늘 중으로 고려로 사람을 한 번 더 보내시지요. 여차하면 고려에서 오해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무슨 일이 생기면 곤란하니까요.”
현수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악 장군, 오늘 내로 두 사람을 고려로 보내 아무 일 없다고 전달하게.”
“예. 위위경.”
악정은 고개를 숙이며 답하였다.
현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진우형은 자리에서 일어나 신료들과 함께 객관을 빠져나갔다.
“이 정도면 잘된 일이지… 그나저나 그때 다시 생각하면…….”
정균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이 잘 풀려서 다행이지요. 태상황제가 그렇게 나올 줄을 생각도 못 했습니다. 아니, 어떻게 위위경이 말씀하셨던 대로 진행됩니까? 혹시 원래 알고 계신 겁니까? 위위경?”
“나도 설마 먹힐까 했는데… 진짜 먹힐 줄 누가 알았겠나. 솔직히 배에서 다 같이 한 말 농담 아닌가.”
지금 생각해봐도 얼떨떨했다.
상상한 게 그대로 이루어졌으니 말이다.
“일이 잘 풀렸으면 되었지. 저 진우형이라는 자 말이야… 정말이지 소름이 돋는 자구만. 마치 내 머리 꼭대기 위에 앉아서 내가 뭘 바라는지 다 알고 있는 거 같아.”
“그 정도로 머리가 좋은 자라고 볼 수 있겠지요.”
“내가 볼 때는 이미 대전에서 눈치를 채고 계산을 한 것 같은데.”
“아휴… 뭐가 어떻게 되든 일이 잘 풀렸으니 된 것이지요. 며칠 있다가 행수들을 만나 필요한 것들을 모두 구매하라고 지시해야겠습니다. 구할 수 있는 것도 좀 구해보고요. 형님이랑 악 장군께서는 임안 저자라도 나가서 구경이나 좀 하세요. 저 때문에 노심초사(勞心焦思)하셨을 텐데.”
“암…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네. 악 장군이랑 이야기를 마쳤어.”
“그나저나… 자네 악비 장군 아들이라고 싹 다 소문난 거 같은데… 괜찮나?”
“그럼요. 그들이 하도 회유를 해대서 제가 못을 박았지요.”
“뭐라고 했는가?”
“‘당신네가 버릴 때는 언제고 인제 와서 필요하니 다시 돌아오라니… 대체 무슨 경우요!’라고 톡 쏘니까 말을 못 하더군요.”
“하하하하!”
현수는 악정의 말에 크게 웃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것만이 아니었다.
객관 근처로 악비 장군의 아들이 있다는 말에 사람들이 몰려와서 난리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아버지를 대신해서 나라를 구해달라고 하는 이들까지 나왔다.
그러자 악정은 한마디로 끝을 내버렸다.
‘나의 진충보국은 송나라가 아니라 고려에 할 것이다!’라는 말을 끝으로 남송의 백성들은 단 한 명도 찾아오지 않았다.
“자, 우리 술 한 잔씩들 합시다.”
“몸이나 추스르자. 무슨 술이야… 술은 고려로 가서 먹자고.”
“아, 예… 형님. 하하하!”
현수는 기분 좋게 크게 웃었다.
* * *
“그래서… 그걸 다 받아들였다고?”
“예. 폐하…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진우형의 말에 금상 황제는 머리에 손을 얹었다.
주화파의 수장인 진우형에게 모든 전권을 준 남송의 황제였다.
그런 진우형은 결국 고려의 사신들에게 원하는 걸 모두 들어주었다.
“어차피 언젠가는 모든 나라가 다 가질 화약과 화포였습니다. 저희가 고려에 자비를 베풀어 예정보다 일찍 고려에 기술을 전수 해 주었다고 생각하시지요.”
“만일 그걸 가지고 우리 남송을 향해 공격해 들어오면 어떡할 것인가?”
“걱정하지 마십시오. 고려는 남송을 공격해 들어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걸 어떻게 아나 자네가?”
“고려의 사정을 알아보고 있습니다만, 그러지 않을 것 같사옵니다. 고려는 자국의 성장을 위해 힘만 기르고 있습니다. 그렇게 기른 힘을 금나라와 남송에는 겨누지 않을 거 같습니다.”
“자네 생각은 어떠한가?”
“송구하옵니다만, 그 부분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사옵니다.”
진우형의 말에 금상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들이 더 요구하는 게 있던가?”
“없사옵니다. 폐하.”
금상 황제는 진우형에 말에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번 자네가 태상황제를 알현하였을 때, 화약 이야기를 꺼내었다면서.”
“예. 폐하.”
“태상황제께서 자네 말에 조금 귀를 기울이셨다면… 어찌 되었을지…….”
“이미 지나간 일이옵니다. 폐하.”
“그럼 기술자는 누구로 보내려 하는가?”
“양소이옵니다.”
“양소……?”
금상 황제는 진우형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역시 자네구먼… 자네에게 있어서 늘 골치 아픈 존재지. 그런 양소를 고려로 보낸다고?”
진우형은 읍(揖)하였다.
금상 황제가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양소가 만들어내는 화포의 규모는…….”
“조정에는 양소 못지않은 화포 기술자들이 많습니다. 오히려 양소보다 더 뛰어난 기술자들이 많이 존재하니 심려치 마시옵소서.”
“흠…….”
“양소는 이제 이 나라에 필요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저 허무맹랑한 기물(奇物)을 만들어내려는 자일뿐이옵니다.”
“자네가 그리 확신을 하니, 오히려 고려에 대해 의구심이 드는군. 고려 사신이 피갑을 입고 들어올 확률이 얼마나 되나?”
“위위경의 신분상으로 보면… 호신용으로 입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 그럴 수도 있지. 그런데 마치 태상황제께서 그렇게 움직이실 거라고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이 행동하지 않았는가. 또한 그날 한사람이 바로 남송을 벗어났지.”
“폐하, 단지 우연입니다.”
“우연이라…? 생각해보게. 아무리 그런 상황에서 바로 움직일 수 있는 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미리 사전에 계획하지 않는 이상 말이네.”
“하면…….”
“태상황제 폐하의 병세를 미리 알고 준비를 한 게 아닐까 싶네.”
금상 황제는 의심스러운 얼굴로 고려 사신들을 떠올렸다.
“폐하, 태상황제 폐하와 황제 폐하의 건강에 대해서는 아무리 고려의 고관대작(高官大爵)이라 할지라도 알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들이 미리 조사하였다면?”
“불가합니다. 그들이 온 지는 며칠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태상황제 폐하의 건강상태를 알아볼 수 있는 시간도 따로 주어지지 않았사옵니다. 더군다나 고려 사신들이 묵고 있는 객관에 그 어느 태의들도 가지 않았습니다. 객관에 방문하였던 예부 상서조차도 태상황제 폐하의 건강을 알지 못하는 자인데 어찌 그걸 말하겠습니까.”
“…….”
“우승상 왕회 대인 또한 태상황제 폐하의 신하입니다. 병세를 알고 있다 하여도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승상의 충심은 폐하도 아시지 않사옵니까.”
금상 황제는 의구심이 계속 들었지만, 확실한 물증이 없는 이상 그들은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다.
“…알았네. 그만 가보게.”
“예. 폐하.”
진우형은 천천히 뒤로 물러서더니, 밖으로 나갔다.
* * *
천시호가 선장들과 선원들을 대동한 채 배를 타고 고려로 돌아왔다.
급하게 출발하는 바람에 배에 필요한 물품과 식량도 제대로 확보 못 한 채로 돌아왔지만, 이들은 무사히 고려로 돌아왔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했다.
“고생들 많았네. 이번 사태가 마무리되면 큰 상을 내리겠네.”
“아이고, 아닙니다. 장군… 장군 덕분에 저희가 살았습니다. 여기 일은 저희에게 맡기시고, 어서 가십시오.”
“그래. 그럼 내 말대로 벽란도에 소문 제대로 내야 하네. 고려가 남송을 공격할 수 있다고 말이야.”
“예! 장군!”
천시호는 곧장 말머리를 돌려 개경을 향했다.
* * *
그날 저녁.
저녁쯤에 당도한 천시호는 곧장 중방으로 들어갔다.
“충!”
견룡군 대정들이 천시호를 보자, 인사를 했다.
인사는 했지만, 믿기지 않는다는 듯 그들은 멈추어서 뒤를 돌아봤다.
“지금 우리가 잘못 본 거 아니지?”
“어? 어…….”
위위시 소경 천시호를 모르는 견룡, 순검군은 없었다.
“사신으로 가셨던 분이 벌써 오신 거야? 연락 같은 거 못 받았는데.”
견룡군 대정들이 수군거리는 소리에도 천시호는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곧장 계단으로 올라가자, 천시호를 알아본 녹사가 허리를 굽히었다.
“장군…….”
“합하께서 안에 계시느냐?”
“합하께서는 신료분들과 황궁으로 들어가셨습니다.”
“…뭐?”
“금나라에 원군으로 가셨던 장군분들께서 모두 귀환하셨고, 서경 유수로 가셨던 경대승 상장군께서도 돌아오셨습니다. 그분들을 축하하기 위해 폐하께서 황궁에서 크게 연회를 여셨습니다.”
“그럼 모두 황궁에 계신다는 말이지?”
“그러하옵니다. 장군.”
천시호는 곧장 중방에서 나와 황궁으로 몸을 돌렸다.
급하게 발걸음을 재촉하며 연회장이 있는 쪽으로 향하였다.
연회장에 가깝게 도착하자, 주악 소리와 웃음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이에 천시호는 더 속도를 높이었다.
“추웅!”
군사들과 중랑장부터 대정에 군사들까지 자동으로 군례를 올렸다.
군례를 올리긴 했지만, 아직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천시호가 여기에 있으면 안 되는 걸 잘 아는 이들이었다.
거기다가 오더라도 혼자 왔을 리는 만무하였고, 대규모 사신단이 갔는데 이렇게 조용하게 오는 건 더 말이 안 되었다.
천시호가 연회장 문으로 들어섰다.
악공들이 주악(酒樂)을 연주하고 있었고, 무희들은 춤을 추고 있었다.
저 멀리서 황제가 크게 기뻐하며 술을 마시고 있는 게 보였다.
주위에는 황태후, 황태비, 황태자 그리고 위위경의 안 사람들까지 있었다.
이를 본 천시호가 나중에 와야겠다고 생각하고 몸을 돌아섰다.
“세상에, 천 장군 아니오!”
뒤에서 부르는 목소리에 천시호는 뒤를 돌아섰다.
형부 상서 이린이 자리에 서서 천시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신료 한명 한명씩 연회장 문 쪽으로 시선을 두었다.
이때 상석에 있는 황제가 술잔을 내려놓으며 손을 올리자, 주악 소리가 멈추었고 무희들은 허리를 숙이며 물러갔다.
“위위시 소경이 아닌가? 하면… 위위경도 돌아온 것인가?”
“천시호! 네 어찌 혼자 온 것이냐!? 다른 사신 일행들은!?”
이의방이 놀라 소리를 지르며 천시호에게 물어왔다.
천시호는 곧장 이의방에게로 향하여 품속에 서찰을 꺼내더니, 이의방에게 건네었다.
“무엇이냐?”
“위위경께서 합하께 올리라는 서찰이옵니다.”
“혹 무슨 일이 있는 게냐?”
천시호는 이의방에게 물음에 쉽게 대답하지 않았다.
이에 이의방은 서찰을 받아 들고 곧장 펼쳐 보았다.
수많은 이들이 이의방과 천시호에게 시선을 두었고, 수안 궁주와 연희 궁주는 지금 천시호만 혼자 입궐한 걸 보고 몹시 불안한 눈치를 보였다.
황태비의 조카 역시 불안해하는 눈치였다.
한참 동안 이의방이 서찰을 읽어 보는 데 있어서 황제부터 신료들까지 모두 시선을 떼지 못하였다.
“이게 사실이냐?”
“예. 합하.”
이의방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서찰을 고이 접어 품속에 넣었다.
그리고는 황제를 바라보며 황제에게 고하였다.
“폐하, 신 이의방… 중방으로 돌아가 급히 처리할 일이 생긴 듯하옵니다. 이만 물러 가보도록 하겠사옵니다.”
“그리하도록 하게.”
이의방은 황제에게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하고는 뒤로 물러났다.
몸을 돌려 연회장 밖으로 나가자, 신료들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이의방에게 허리를 숙이었고 천시호가 이의방의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