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천하의 주인-110화 (110/159)

110화

“닻을 내려라!”

선장이 닻을 내리라며 소리쳤다.

이에 배의 속도가 줄어들면서 천천히 항구 쪽으로 들어가며 배가 멈추어 섰다.

뱃사람들이 두꺼운 널빤지를 밀어 넣어 땅에 고정했다.

“위위경, 내려가시면 되옵니다.”

선장의 말에 현수는 배 아래로 내려갔고, 천시호, 정균, 악정 그리고 역관들이 줄을 이어 내렸다.

상인들 그리고 황제에게 바칠 수레들도 배에서 내리기 시작했다.

“아이고, 반갑습니다. 위위경 유현수라 합니다.”

현수가 웃으면서 송나라 관리에게 말하자, 역관이 바로 통역해 주었고, 송나라 관리의 말은 고려 측 역관이 바로 통역해 주었다.

송나라 관리는 인사를 하며 현수를 한번 훑어보았다.

그러더니 아무 말 없이 침을 꿀꺽 삼키었다.

고려에서 온 사신의 지위가 생각보다 높아 보였다.

고려 사신은 금으로 만든 화려한 상투관을 착용했고, 청금석 비녀를 상투관에 꽂았으며 자색 빛깔의 겉옷을 걸치었다.

옷차림만 봐도 지금 자신이 생각하는 그 이상의 사신이 왔다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승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저 뒤에 있는 건 고려국 집정 대신께서 보내시는 하례물이고, 이건 황제 폐하의 승전을 축하하는 표문입니다.”

남송 역관이 현수의 말을 바로 통역해 주었다.

남송 관리가 현수에게 손으로 먼저 가라며 안내하자, 현수 역시 고개를 숙이며 사신과 함께 걸었다.

“고려에서 먼 송나라까지 장사해 보자고 온 상인들 좀 잘 부탁드립니다.”

“안심하라고 하십니다. 모든 안전은 남송에서 책임진다고 합니다.”

역관이 작게 말해주었다.

남송 관리는 자신보다 낮은 품계를 가진 관리들에게 지시하더니, 고려 상인들을 대신 인솔하게 하였다.

“객관으로 먼저 모시겠다 합니다.”

“알겠네.”

얼마 후.

현수 일행은 남송의 수도 임안에서 가장 유명한 호수 서호에 위치한 객관에 짐을 풀었다.

현수가 묵는 방은 2층 누각이 있는 방이었다.

창가로 다가가 창문을 열자 드넓은 서호가 눈에 들어왔다.

주위 경관은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울창하게 숲을 이루고 있으며 정면에는 출렁거리는 서호의 물결 소리가 마음을 씻어 주는 듯하였다.

“크… 경치 죽인다.”

“밤하늘에 달빛의 취해서 술 한 잔 먹으면 최고겠군요. 위위경.”

정균의 말에 현수는 키득 웃었다.

“밤에 한잔하고 싶으면 올라오세요. 형님.”

“아닙니다. 대 고려국의 황제 폐하의 사위이시자, 견룡과 순검의 지휘관이신 위위경께서 계신 곳에 어찌 하찮은 장군 따위가 올라오겠습니까.”

“장군이 하찮은 벼슬? 그거 누가 들으면 어찌하려 합니까.”

“육위 장군 솔직히 실권이 없지 않습니까…….”

“없긴 해도 합하 옆에서 보좌하는 게 대장군과 장군인데… 전쟁터 나가면 합하를 대신해서 지휘하는 게 대장군, 장군이고.”

“문제는 거의 전쟁터를 나갈 일이 없다는 거겠지. 이제…….”

정균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현재 육위 대장군, 육위 장군은 각 육위 상장군, 대장군보다 실권이 없어 명예직으로 봐야 했다.

모든 명은 이의방으로부터 내려오고 그 명을 받는 게 각 육위 상장군들이었다.

육위 대장군, 장군은 이의방을 보좌하는 자리이긴 했지만, 입김 하나는 기가 막힌 자리였다.

덜컹.

방문이 열리면서 악정, 천시호가 빼놓으라는 물건을 가지고 안으로 들어왔다.

“위위경, 저녁에 객관 일 층에서 연회를 열겠다고 통보를 해왔습니다.”

“그렇군. 오늘 온 김에 아주 그냥 푹 쉬게. 배에서 그동안 고생들 했으니 말이야.”

현수와 정균은 멀미를 덜 하였지만, 천시호와 악정은 멀미를 미친 듯이 했다.

거의 배 안에서 실신한 상태였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하겠다고 끙끙거리면서도 중간에 내릴 수도 없어 배에서 열흘 이상을 보내었다.

그나마 도착할 때쯤에 멀미가 사라져 겨우 이만큼 버티고 있는 두 사람이었다.

* * *

“흠…….”

태상황제는 고려국에서 사신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도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반면, 주전파 신료들은 고려국 사신들을 받지 말자고 난리를 치고 있었고, 주화파 사신들은 받자고 난리였다.

양측 세력이 물러섬 없이 팽팽하였다.

“폐하, 어찌 결정을 내리지 않으시옵니까?”

진우형이 태상황제에게 물었다.

“금상께서 알아서 하시겠지.”

“태상황제 폐하의 말씀 한마디면… 정리될 문제가 아닙니까.”

“지켜보자고, 금상이 어찌 나오나.”

태상황제는 종이에 시를 써 내려가다가 마음에 안 드는지 종이를 구겨 버렸다.

“진우형.”

“예. 폐하.”

“네가 보기에는 고려 사신이 온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느냐? 우리가 승전했다고 해서 사신을 보낼 자들이 아니긴 한데…….”

태상황제는 새 종이에 시를 다시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제가 감히 생각하는 것이지만… 화포에 대해서 알아보기 위해 온 게 아닐까 합니다.”

화포라는 말에 태상황제는 붓을 내려놓았다.

“고려가 화포에 대해 벌써 눈치를 챘다고? 너무 빠르지 않다고 생각 안 하느냐?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진우형은 태상황제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오늘 저녁에 누가 사신을 대접하느냐?”

“예. 폐하. 우승상 왕회와 예부 상서 증효운입니다.”

“두 사람 가지고 되겠느냐?”

“…예?”

“고려에서 큰 손님이 왔는데… 한왕 조성도 나가서 접대하라 하거라.”

“예. 폐하.”

진우형은 다시 읍하며 뒤로 물러 나갔다.

황제는 다시 붓을 들고 종이에 글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 * *

그날 저녁.

객관 일 층에 자리가 연회 자리가 마련되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는 예부 상서 증효운이라 합니다.”

“고려말을 할 줄 아시는군요. 저는 고려 위위경 유현수라 합니다. 예부 상서.”

고려말을 할 줄 아는 예부 상서 증효운을 현수는 반갑게 맞이하였다.

남송 예부 상서 증효운은 유현수를 한번 훑어보았다.

예부 상서 또한 현수가 보통 관리가 아니란 걸 알았다.

고려 사신을 맞이한 관리의 말이 틀림이 없었다.

문양이 들어간 금으로 만들어진 요대를 착용하고 있었다.

거의 황제가 아니면 대놓고 착용하지 않을 요대였다.

그런 요대를 대놓고 차고 다닌다는 건 고려의 사신은 말이 위위경이지 그 이상의 권력을 가진 신하라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듣기로는 고려는 예전의 고려가 아니라고 들었다.

이참에 제대로 고려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이든 증효운이었다.

“곧 준비가 다 될 겁니다. 그리고 우승상이신 왕 대인과 한왕 전하께서 위위경을 뵈러 올 것입니다.”

“아, 저를 만나러 한 전하와 우승상이신 왕 대인이 오신다니… 영광입니다.”

“하하하!”

예부 상서 증효운은 크게 웃었다.

“자, 자리에 좌정(坐定)하셔서 차라도 한잔하시지요.”

“예.”

현수는 예부 상서 증효운과 연회장 안쪽 방으로 이동하여 자리에 앉았다.

“위위경께서는 위위시 말고도 어떤 직책을 겸하고 계십니까?”

“동벽상공신 육위 대장군 전중감 위위경 정주공 부마도위입니다.”

“그렇게 많은 직책을 가지고 계십니까? 거기에 공신이시라고요?”

“그렇습니다. 지난번 함경도 정벌에 큰 공을 세웠다 하시어 폐하께서 제게 과분하게도 공신 작을 내리셨습니다. 더불어 황금으로 만들어진 절월을 내리시며 대대손손 작위와 전중감, 위위경 직을 겸직하라 명을 내리셨답니다.”

“위위경, 대대손손 작위와 벼슬까지 하사받으시다니… 대단하십니다.”

“대단하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지만, 너무 많은 책임감에 제 어깨가 무겁기만 합니다.”

“하하하!”

증효운은 차를 들어 올리며 마시자, 현수도 차를 마시었다.

“차는 어떻습니까?”

“음… 향이 그윽합니다.”

“철관음이라는 차입니다. 차가 입에 맞으시면 돌아가시는 길에 싸드리지요.”

“하하,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남송에서 차를 사 가려고 하였는데 예부 상서 덕분에 찻값이 굳었습니다! 하하하!”

“하하하하하!”

두 사람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크게 웃었다.

그리고 곧 일행들이 도착하자, 현수와 예부 상서 증효운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왕 조성과 우승상 왕회가 연회장으로 역관들과 함께 들어왔다.

현수가 이에 살며시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였다.

“두 분을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고려국 위위경 유현수라 합니다.”

남송 측 역관이 곧장 우승상 왕회와 한왕에게 통역하였다.

“위위경, 연회 자리가 다 마련되었으니 자리를 이동하자고 합니다.”

“음… 그래.”

현수는 통역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어 보이자, 예부 상서가 연회장으로 길을 안내하였다.

네 사람은 연회장 안으로 들어와 각자 자리에 앉았다.

그중에 예부 상서가 현수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나마 말이 통하였으니 편했기 때문이었다.

오른편에는 정균, 천시호, 악정이 자리하였고, 왼편에는 남송 측 인사들이 몇몇 자리하였다.

“오늘은 즐기시고, 모레 태상황제 폐하와 금상 황제 폐하를 알현하시지요.”

“하하하, 예. 고맙습니다. 예부 상서.”

곧 악공 삼십여 명이 연주하고 오십여 명의 무희들이 연회장 안으로 들어와 춤을 추기 시작하였다.

술을 주고받으면서 마시고 이야기하다가 현수는 예부 상서에게 슬쩍 물었다.

“예부 상서께서는 주화파이십니까, 주전파이십니까?”

“저요? 그건 왜 물으십니까?”

“주화파, 주전파 신하분들이 어느 분인지 몰라서 말입니다. 제가 말을 하다가 실수를 할까 봐 그렇습니다.”

“제가 주화파라면요?”

“주화파라고 하시면… 저는 그냥 아무런 말 하지 않겠습니다.”

현수는 미소를 지었다.

주화파와 이야기를 하다 보면 절대 대답해주지 않을 걸 알기 때문이다.

“궁금하군요. 무슨 말을 하려고 하실지. 위위경, 주화파가 예부 상서에 있는 게 더 웃기지 않겠습니까?”

“듣고 보니 그렇네요. 하하하. 그렇다면 내일 객관으로 한번 와주시겠습니까? 귀한 선물을 드릴까 합니다.”

“그렇게 하지요. 자, 우선 드시지요.”

두 사람은 잔을 살짝 부딪치며 마시었다.

왼편에 앉은 사신들 중, 유독 우승상 왕회가 악정을 유심히 바라보며 술만 마실 뿐이었다.

“왜 그러시오? 우승상?”

한왕 조상이 우승상 왕회를 바라보며 묻자, 우승상 왕회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한왕 전하. 드시지요.”

왕회는 말을 돌리며 술잔을 들고는 술을 마셨다.

오른편의 정균도 우승상 왕회라는 자의 눈초리를 의식하고 있었는지 무희들의 춤을 보는 척하면서 항시 왕회를 살피었다.

“무시하시지요.”

악정이 정균을 바라보며 말하였다.

“…자네도 알고 있었나?”

“모를 리가 있습니까? 계속 주시하면서 보고 있는데. 제가 닮긴 했나 봐요?”

악정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거… 남송 대전에 들어가면 어떤 반응이 나올지 나도 궁금해지네.”

정균이 피식 웃으며 말하더니, 악정과 술잔을 부딪치며 술을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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