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천하의 주인-109화 (109/159)

109화

“자네가 천거해서 올린 사람들 말이야.”

“예. 합하.”

“내직은 어려울 거야. 대부분의 요직은 다 찼거든.”

“작은 자리라도 상관없습니다. 외직도 괜찮습니다.”

이의민은 웃으면서 말하였다.

“자네 올해 나이가 몇인가?”

“이제 곧 오십 되옵니다.”

“벌써 그렇게 되었나? 엊그제 들고 일어난 거 같은데… 나도 이제 나이가 육십하고도 둘이야. 이 상장군.”

“예. 합하.”

이의방은 지그시 이의민을 바라보며 물었다.

“너무 무당에 기대지 말게…….”

“…예?”

이의민은 깜짝 놀랐다.

“신도재상(新道宰相)이라고 불리는 자네야. 뭐가 아쉬워서 무당에게 기대려고 하는가. 그동안 자네가 잘 닦아 놓은 길을 보면 참으로 대단하다고 생각해. 그뿐만이 아니라, 축성에도 아끼지 않고 돈을 내놓고, 구휼소에 들려서 어려운 이를 도와주는 자네를 보니… 영 내가 부끄럽구먼. 부디 그 마음 변치 말고, 쭉 이어가 주길 바라네.”

“아, 예… 합하…….”

이의민은 이의방의 칭찬에 허리를 숙이며 답하였지만, 뭔가 찜찜함을 감추지 못하였다.

그의 표정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자신을 꿰뚫어 보는 이의방이 이제는 무서울 지경이었다.

“무당은 그냥 재미로 만나고 복술(卜術)이나 보게. 알겠는가? 내가 걱정이 돼서 그래. 걱정이.”

“예. 합하. 그렇게 하겠사옵니다.”

“합하, 술상이 마련되었사옵니다.”

“알겠다. 자, 이만 한잔하러 가세.”

“예. 합하.”

* * *

이의방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이의민을 대동하고 옆방으로 향하였다.

술자리에 들어선 이의방과 이의민은 첫 잔을 주고받으며 마시었다.

“그래… 내 그동안 도로를 정리하는 데 있어서 어디까지 진척이 되었는지 궁금하던 차인데… 어디까지 되었나?”

이의방은 도로 정비에 관련된 것을 이의민에게 물었다.

“아, 예. 합하. 전라도, 경상도의 목을 잊는 도로 정비는 곧 끝이 날 참입니다.”

“오, 벌써 그렇게 되었는가?”

“예. 합하.”

이의방은 만족스러운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의민이 동경에 있을 당시에 동경에서 나주 안남도호부에 이르기까지 길을 내고 도로를 정비하였다.

이제야 그 일이 모두 끝이 나가는 것이었다.

“참… 오랜 시간이 걸리는 공사였어.”

“예. 합하. 그렇사옵니다.”

“그럼 양광도, 교주도, 서해도는 전라도와 경상도 공사가 끝나는 대로 진행할 건가?”

“예? 아… 제가 거기까지는 생각해보지 않았사옵니다. 합하.”

“하하, 그런가? 그럼 잘 생각해보고, 좋은 생각이 있다면 알려주시게. 자, 한잔하세.”

이의방은 그렇게 말하며 술병을 들어 이의민의 잔에 술을 채워주었다.

“나는 자네가 있어서 든든해. 믿음직한 사람이 내 옆에 있어서.”

“감사하옵니다. 합하.”

이의민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한잔 마시고는 술병을 들고 이의방에 잔에 술을 따랐다.

“평장사.”

“예. 합하.”

“자네는 누가 뭐라 해도 나의 충실한 사람이야. 안 그런가?”

“그렇사옵니다. 누가 뭐라 하든, 소장은 합하의 수족이옵니다.”

“고맙네. 평장사. 그나저나 이 상장군… 자네 혹시 상투를 자르는 거 어떻게 생각하나?”

“예? 상투를 자르다니요?”

“음… 현수가 이야기한 건데 전투하다가 죽을 확률이 높잖아. 그런데 죽으면 시신을 옮기기가 힘들어서 대부분 그 자리에서 전부 다 묻어 버리거나 가능하면 화장해서 장례를 치르지 않나.”

“…그렇지요. 합하.”

“그러니까 미리 입대하기 전에 자르고 군에 들어오라는 거지.”

“아니, 합하… 그렇게 할 바엔 차라리 죽으면 상투를 자르고 군 패로 묶어서 옮기는 게 낫지 않습니까?”

“…….”

이의민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듣고 보니 그렇네.”

“그래도 죽어서 남이 자르는 것보다 내가 자르는 게 더 의미는 있겠지요. 소장은 그 부분에 찬동하는 바입니다.”

“…그래?”

“예. 합하. 하옵고… 전투에 나가기 전 자르는 것이 아니라, 군에 들어오는 즉시 자르게 하심이 어떻겠습니까?”

“음… 그것도 나쁘지 않은 생각인 거 같네.”

이의방은 이의민의 말에 만족한 듯 미소를 지었다.

“더 하실 말씀이 있는지요.”

“그래. 말 나온 김에 용주, 귀주, 화주에 화장을 전문적으로 설치하려고 하려 하네. 전투 후 사망한 군사들이나 장수를 화장을 시키려고 말이야. 그곳에 승려들을 입대시켜서 관리하게 할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화장이라… 화장은 고려에 보편화 되어 있는 장례 절차이니, 합하께서 하시겠다면 저는 찬성하는 바입니다.”

이의방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의민이 반대한다고 했었어도 그냥 자기가 공표해버리면 그만이었다.

이에 반발하고 항의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고려민들 전부 다 상투를 자르라는 것도 아니고, 군에 들어가는 자만 상투를 자르라고 하는 것이니, 문제는 없을 듯 보였다.

“그래. 자네가 책임지고 각 육위 상장군들과 이야기해서 병부에서 발표하라고 하게.”

“알겠사옵니다. 합하.”

이의민은 고개를 숙이며 답하였다.

“하하, 자… 오늘 우리 둘이 실컷 마셔보세!”

“예. 합하!”

이의민과 이의방은 술잔을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더니, 옛날이야기를 꺼내며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 * *

“폐하, 심기가 많이 불편하신 모양이십니다.”

“금상 황제가 속을 썩이니, 내 머리가 아프구나.”

남송 태상황제는 젊은 후궁의 품속에 안기어 눈을 감고 있었다.

“나도 아무런 생각 없이 네 품에 오래 있고 싶은데, 금상 황제가 짐을 도와주지를 않는구나.”

태상황제는 두 눈을 뜨더니, 젊은 후궁의 얼굴을 매만졌다.

“폐하, 금나라와 협상은 어찌 되는 것이옵니까?”

“듣기로는 금나라 상황도 여의치가 않더구나. 금상 황제가 빼앗은 성들은 모두 우리 송의 것이 될 거 같아. 그리고… 더 이상 전쟁도 하기 싫다.”

태상황제는 그렇게 이야기하며 일어나 침상에 몸을 기댔다.

이에 후궁은 반대로 태상황제의 품에 안기었다.

“하아…….”

“어찌 한숨이십니까?”

“모든 게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런다.”

“폐하, 폐하는 대송의 태상황제이시옵니다. 폐하의 말씀 한마디면 기세등등한 금상 폐하도 명을 들어야 하는 상황입니다. 이번 전쟁을 일으킨 주전파의 신료들을 엄벌하라 명하시옵소서.”

태상황제는 슬며시 후궁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하라고 진우 형이 시키더냐?”

“…예?”

후궁은 살짝 당황한 눈치였다.

“짐은 두 선황처럼 아둔하지 않다. 짐은 실리(實利)를 따르지… 주전파는 아직 있어야 하는 신하들이다. 주전파가 없으면 남송은 손해만 보는 장사만 할 뿐이지.”

“폐, 폐하…….”

“하하하! 걱정하지 말거라. 짐은 네가 무슨 말을 하든 너를 버리지 않을 거다. 다만, 너와 나의 이야기는… 그 누구에게도 발설하면 아니 된다. 알겠느냐?”

“…예. 폐하.”

후궁은 벌벌 떨며 고개를 숙인 채 답하였다.

남송의 개의치 않는 듯 태상황제는 촛불을 끄고 후궁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다.

* * *

바람이 좋은 덕분에 25일 만에 남송의 영토에 들어설 수 있었다.

바다를 넘어 수로에 들어오자, 수많은 상선이 바다와 수로를 오가고 있었다.

아직 남송은 죽지 않은 듯했다.

약한 나라가 아니라는 걸 여실 없이 보여 주었다.

“저 항구가 임안입니다. 위위경!”

“그러한가? 가히 대단하구먼! 남송의 수도가 저렇게 거대하다니…….”

감탄스러웠다.

임안의 성벽은 정말이지 웅장하고 거대했다.

하지만 그 성벽 위로 구멍들이 보이자, 현수는 침을 꿀꺽 삼키었다.

“화포가 있네.”

“…예?”

선장이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 하겠다는 얼굴로 현수에게 재차 물었다.

“뭐가 있다는 말씀이신지요.”

“…아니네. 선장, 자네는 이만 가보게. 장수들과 할 이야기가 있어서.”

“예. 위위경.”

선장은 곧장 계단을 내려갔다.

정균, 천시호, 악정은 현수에게 다가오더니, 저 멀리 보이는 임안의 나성을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저 구멍들은 다 무엇입니까?”

악정이 궁금한 듯 물었다.

“화포 구멍이네.”

“예?”

“화포요?”

“그게 무엇인가?”

“불 뿜는 쇠구를 설치하는 구멍입니다. 균이 형님.”

“저게 중방에서 이야기한 그거라고?”

정균은 침을 꿀꺽 삼키었다.

쇠구를 뿜을 수 있는 설치대가 저렇게 많다는 건 남송이 그 누구에게도 임안을 반드시 빼앗기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했다.

“밖에서 보이는 나성이 저 정도인데… 안은 얼마나 거대할까.”

“요새 그 자체겠지요.”

천시호는 임안의 나성을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키었다.

“저렇게 겉만 번지르르하면 무엇하겠습니까. 속이 빈 강정인데.”

“그게 무슨 말인가, 위위경?”

정균이 현수에게 물었다.

“대부분 남송의 성벽은 흙과 자갈을 다져서 쌓은 성이 아닙니다. 저 성도 그럴 가능성이 있지요.”

“그럼 석포로 때리면 무너질 수 있다는 건가?”

“예. 석포로 미친 듯이 때리면 성벽이 무너지겠지요, 그나마 다행인 건… 고려의 성은 대부분이 흙과 자갈을 다져서 화강암 위에 쌓아 올린 후, 흙과 자갈을 다시 올리지 않습니까.”

“그렇지. 그러니까 석포를 아무리 때려도 벽이 무너지면 흙과 자갈이 드러나지. 적들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할 거야.”

“하하, 그렇네요.”

천시호는 크게 웃었다.

“위위경, 그나저나 그 불을 뿜는 쇠구… 그러니까 화포라는 거 말이네. 그걸 어떻게 고려로 가져가려고 하는 건가? 화포라는 건 남송에 있어서 기밀(機密)에 부치는 무기일 터인데.”

“우선 악정의 얼굴을 보인 다음 상대의 반응을 확인해보고, 반응이 없으면… 그다음부터 다시 생각해봐야지요.”

“악 장군의 얼굴을 보고 반응을 한다는 건 대체 무슨 말인가? 악 장군 얼굴을 보면 화포라는 게 나오나?”

정균은 현수의 대답이 답답하다는 듯 물었다.

“혹시 모르죠. 악 장군 얼굴을 딱 보더니, ‘어, 악비가 나타났다. 악비 죽어라!’ 하면서 칼 뽑아 들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럴 확률이 얼마나 된다고… 채 1할도 안 돼.”

“만약 그 1할이 먹히면요?”

“…….”

“진짜 태상황제가 죽어라 하면서 달려들 때 그 순간 내가 확 가로막으면서 태상황제의 칼을 맞으면 그냥 고려 사신을 살해했다고 소문이 나겠지요.”

“…….”

“그럼 주변국에도 소문이 돌 테고… 그 소문이 합하의 귀에 들어가면 합하는 눈알 뒤집혀서 서해 해군 절도사 이경수 불러서 금나라랑 손잡고 남송을 치자 할 것입니다.”

“…그건 아니다.”

정균의 말에 현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말이 안 되죠…….”

“안돼. 그냥 포섭해야지. 주화파를.”

“흐하하하!”

현수는 크게 웃었다.

“천 장군.”

“예. 위위경.”

“황제에게 주는 품목 말이야… 흑삼이랑 청자 10점, 인삼차 빼고 주자고.”

“예? 위위경, 그래도 그건 좀…….”

“그거 좋은데요?”

“어차피 쟤들은 모르잖아. 그리고 뭘 가져왔는지 황제한테 보고할 이유도 없고.”

“그렇지요. 그냥 승전 선물이라고 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하하하!”

정균은 크게 웃었다.

이야기하다 보니 어느덧 배는 항구에 다다르고 있었다.

그리고 저 멀리 송나라 관원들이 보였다.

고려의 배를 본 후, 조정에 바로 보고를 한 것이었다.

그들은 미리 항구에 나와 현수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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