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위위경.”
“예. 태후 마마.”
“남송에서 돌아오는 대로 혼례를 올릴 준비를 하시게.”
“예? 하오나… 두 공주께서는…….”
“그건 걱정하지 마시오.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그리고 여기 황태비의 조카와 함께 나가서 남대가 다원에 가서 차라도 한잔하든지 아니면 종친부에 가서 차나 즐기다가 함께 궁 밖으로 나가서 바람이나 쐬시오. 아직 시간은 널널하니 말이오. 아시겠소?”
거의 반강제였다.
혼례 안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말과 별다를 게 없었다.
현수는 차마 대답하기가 매우 곤란했다.
“위위경, 아시겠냐고 물었소.”
정색하며 태후는 현수에게 물었다.
“예? 아… 예! 태후 마마!”
태후전에 인사만 하고, 공부 상서에게 남송 황제에게 승전을 축하하는 서첩을 받고 물품도 다 확인하여 남송으로 가려 하였다.
하지만 이건 꼬였다.
그것도 제대로 꼬여 버렸다.
“그만 가보시오. 연아, 수정이는 여기에 맡기고 위위경과 함께 하다가 돌아오너라.”
“예. 태후마마.”
황태비의 조카, 연아라는 여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딸을 황태비에게 맡기고서 현수와 함께 태후전을 나갔다.
태후전에 나오자마자 현수는 당황하였다.
연아라는 여인도 무안해했고, 현수에게 미안한 표정이 역력했다.
“종친부로 가시겠습니까? 아니면 다원으로…….”
멀뚱멀뚱 서 있지 말고, 현수는 먼저 어디로 갈지 결정하라는 듯 말하였다.
“조, 종친부로 가시지요.”
“예. 가시지요.”
현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한참을 걸었다.
어느 정도 걷자, 아무도 돌아다니지 않는 길이 나왔다.
연아라는 여인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현수를 불러 세웠다.
“정말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난처해지신 거 압니다.”
“아닙니다.”
“사실 제가…….”
“말 못 하실 일이시면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니요. 말씀드려야 합니다. 사실 저를 자꾸…….”
“자꾸 뭐요?”
“…탐하려는 자가 있습니다.”
“예?”
현수는 황당했다.
대체 어느 X친놈인지.
그것도 황태비의 조카를 탐하려고 하는 이가 있다니, 그건 조상부터 부모까지 부관참시(剖棺斬屍)해도 할 말 없었다.
“관아에는 말씀하셨습니까?”
“했지요. 관아에 이러한 일을 겪고 있다고 하니, 조사하겠다고 하였지만… 그쪽에서 어떻게 알았는지 서찰을 보내더군요. 제 딸 아이를 죽이겠다고요.”
“뭐, 뭐예요?”
현수는 인상을 찡그렸다.
“당혹감에 황태비 마마를 뵈러 온 것인데…….”
“그래서 태후 마마께서 그런 말씀을 하신 거군요. 가족분들에게는 말씀드렸습니까?”
“말씀드렸지요. 다들 제 안위를 걱정하십니다. 하지만 그 사람을 찾아내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태후가 왜 혼사 이야기를 꺼냈는지 이제야 알 거 같았다.
태후와 태비 사이에는 감출 게 없었다.
한 분의 황제를 함께 모셨으니, 둘 사이에는 거의 비밀이라는 게 없었기에 황태비의 일은 곧 황태후의 일이었고, 황태후의 일은 황태비의 일이었다.
“알겠습니다. 저와 혼례 하시죠.”
“…예?”
“어디서 누가 그럴지 모른다면서요. 저와 혼례를 올리면 그런 서찰은 오지 않을 거 아닙니까. 공개적으로 혼례를 올리는 것이니, 그자 또한 알 것 아닙니까.”
“그래도 혹시나 오면 어찌합니까?”
“그때는 제가 처리할 겁니다. 제가 돌아올 때까지 저의 집에서 머무르시고, 건강하게 지내고 계십시오.”
“예… 알겠습니다.”
현수는 연아의 손을 꼭 잡으며 종친부로 향하였고, 연아는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 * *
“예. 합하, 준비는 다 되었습니다.”
“그래. 남송에 다녀오면 혼례를 올린다고 들었어. 축하한다. 황태비 마마의 조카를 잘 모셔야 한다.”
“아, 예… 합하.”
이의방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밖에 나가면 호부 상서가 준비하고 있을 것이야. 이번에 가져갈 품목들이 많으니, 서첩 받고 출발하도록 해.”
“예. 합하.”
현수는 고개를 숙이며 밖으로 나갔다.
중방 밖으로 나오자, 태후의 남동생 호부 상서 임극정이 있었다.
“호부 상서,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하하, 위위경.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자, 이제 가시지요. 준비는 다 되었습니다. 예부에서 표문(表文)을 작성하였으니, 서문 밖에서 예부 상서를 만나면 되십니다.”
“예. 호부 상서.”
현수는 고개를 숙이며 호부 상서 임극정을 따라갔다.
얼마 가지 않아 남송으로 가져갈 품목들이 소 수레에 실려 있었다.
임극정은 현수에게 서첩을 건넸다.
“품목들입니다. 살펴보시지요.”
“제가 보면 뭐 압니까? 호부 상서께서 잘해주셨겠지요. 남송에 도착하면 품목들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오. 위위경.”
임극정은 미소를 지으며 말하였고, 현수는 말 위에 올라타고 서문으로 향했다.
소 수레들은 현수의 뒤를 따라갔다.
서문으로 나오자, 준비된 사신단이 줄을 이루었다.
사신 행렬을 따라가려는 상인들의 행렬도 어마어마하였다.
그중에 현수가 뒤를 봐주는 상단, 그리고 현수가 운영하는 상단도 포함되어 있었다.
현수를 알아보는 상단주들은 허리를 숙이며 인사하였다.
상단뿐만이 아니라, 행상을 업으로 하고 사는 상인들도 눈에 들어왔다.
저 앞에서 예부 상서 유응규가 성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걸 본 현수는 말에서 내려 유응규 에게 다가가 허리를 숙이고, 황제의 표문과 이의방의 서찰을 받았다.
“위위경, 잘 다녀오십시오.”
“예. 다녀와서 다시 뵙겠습니다. 잘 드시고, 부디 몸 건강히 지내십시오.”
“예. 감사합니다.”
유응규와 유현수는 서로 마주 보고,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이었다.
현수는 표문과 서찰을 역관에게 건네고, 다시 말 위에 올라타 사신단을 이끌고 예성강 하구에 있는 벽란도로 향하였다.
개경에서 말을 타고 벽란도로 향하면 한 시진 정도 후에는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람이 많으니, 더 걸릴 것 같긴 했다.
그래도 길게 잡아야 하루 정도 예상하였다.
“위위경, 답답하시지요?”
정균이 물었다.
“형님, 나 놀리시는 겁니까?”
“군사들도 아니고, 이렇게 많은 사신단을 이끌고 가니 답답하지 않냐 이거지…….”
“정말 답답합니다. 그냥 아주 시원하게 말 타고 뛰고 싶네요.”
“하하하! 그 와중에 네가 뒤를 봐주는 상단도 보이고, 네가 운영하는 상단도 보이고… 정말 대단하구나.”
“아마 수십 년 만에 가는 정식 외교사절단이라 그럴 겁니다.”
“그건 그렇지.”
“그나저나… 네가 가지고 있는 상단은 잘 운영되느냐?”
“예. 저 말고 뛰어난 이가 상단을 도맡아서 운영하고 있고, 돈도 알아서 벌어다 주니 신경 쓸 게 거의 없습니다.”
“위위경, 누가 만약 그 상단을 가로채 가면 어찌하려고 하십니까?”
“가져가라 해야죠. 가져가도 굶어 죽지는 않으니.”
현수는 미소를 지었다.
* * *
“합하, 지난번 동경으로 돌아갔던 신료들의 명단이옵니다. 합하께서 이걸 보시고 다시 등용을 해주셨으면 좋겠사옵니다. 또한 용력(勇力)이 출중한 자들을 천거(薦擧)하여 올리옵니다.”
이의민은 서첩을 이의방 탁상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 두고는 자리로 돌아왔다.
이의방은 아무 말 없이 서첩을 펼치었다.
“자네가 직접 쓴 글인가?”
“예? 아… 그러하옵니다. 합하.”
“정말 글 한번 잘 썼구만. 자네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글 하나 몰랐는데, 이제 현수 덕분에 글을 읽고 쓸 줄 아니 얼마나 다행인가.”
“그렇사옵니다. 합하. 모두 위위경 덕입니다. 신이 글을 읽고 쓸 수 있게 될 줄 누가 알았겠사옵니까.”
“하하, 사람하고는… 그래, 요즘 집에서 뭐 하나?”
“언문으로 풀어낸 사기(事記)를 읽고 있습니다.”
“사기? 자네가 사기를 읽는다고?”
이의방은 믿지 못하겠다는 눈치였고, 이의민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사기를 읽고 있습니다. 합하.”
이의민은 이의방을 보며 다시 한번 더 말하였다.
이에 이의방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크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
이의민 역시 이의방을 따라 크게 웃기 시작했다.
“아이고, 이렇게 오랜만에 웃어보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구먼. 자네 덕에 내가 크게 웃었어!”
이의방은 그렇게 웃다가 이의민이 가져온 서첩을 다시 살피었다.
“음… 문, 무반의 신료들을 자네가 다 정리를 한 건가?”
“아니옵니다. 그건 제가 동경에 있을 때 만난 수하가 작성해준 것을 제가 옮겨쓴 것이옵니다.”
“그래? 아주 유능한 수하를 두었구먼. 한잔하겠나?”
이의방은 이의민에게 물었다.
“예. 합하. 한 잔 주시옵소서.”
이의방은 손을 올려 줄을 몇 번 당기자, 서리가 안으로 들어왔다.
“합하, 찾아계셨사옵니까.”
“아래에 일러 술상을 좀 봐와라.”
“예. 합하.”
서리는 고개를 숙이며 밖으로 나갔다.
황성 안에 있는 중방으로 술상을 들이려면 내성 밖까지 가야 했다.
내성 밖에 주점이 있으니 말이다.
내성은 종친과 고관대작들이 사는 곳이다 보니, 웬만하면 내성에서 술을 마시지 않았다.
고관대작(高官大爵)이라고 하더라도 대부분 내성 밖에서 술을 마셨다.
“합하, 황성에서 술을 마시다니요.”
이의민의 말에 이의방은 피식 웃었다.
“나가기 귀찮아. 그리고 조용히 한 잔씩 먹는 거 가지고는 이제 뭐라고 하지도 않으셔.”
“합하, 하오면… 이참에 내성이나 내성밖에 새로운 관청을 세우는 게 어떻겠사옵니까?”
“뭐? 관청을 새로 세워?”
“예. 합하.”
“관청을 새로 세워 합하의 위엄을 보이십시오.”
“자네 왜 이래… 갑자기… 하하하!”
이의방은 이의민의 말이 그냥 기분 좋으라고 하는 말일 거라 생각했다.
“합하, 중방보다 더욱더 큰 관청을 지어 위엄을 보이시옵소서. 합하께서는 이 나라의 모든 집정을 보고 계시옵니다. 더군다나, 현 황제 폐하를 대신하여 만백성을 살피시오는데… 관청이 아니라, 궁전을 새운다고 하시더라도 그 누구도 반대할 자는 없을 것이옵니다.”
“이 상장군, 궁궐이라니! 말이 과하네!”
이의방은 인상을 썼다.
“합하, 왜 그러시옵니까? 합하께서는 이 고려라는 천하를 쥐고 계신 주인이시옵니다.”
“어허, 이 사람… 그 정도만 하라니까!”
이의민의 말에 이의방은 발끈하였다.
“송구하옵니다. 합하.”
“되었고… 서첩이나 살펴보세.”
이의방은 서첩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 * *
“합하, 추밀원사 임민비가 합하를 뵙기 청하옵니다.”
“마침 잘 왔네. 어서 뫼시어라.”
덜컹.
방문이 열리며 추밀원사 임민비가 안으로 들어와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며 이의방에게 인사를 하였다.
“합하, 강녕하셨사옵니까.”
“하하, 어서 오게. 외직으로 떠돌다가 이제야 내직으로 들어오는구먼.”
“합하의 은혜가 크옵니다.”
“크기는… 폐하께서 자네를 많이 칭찬했네. 그래서 내가 이렇게 데리고 있게 되었고.”
“어인 말씀이시옵니까.”
임민비는 미소를 지으며 살며시 고개를 숙이었다.
“처음 만나지? 여기 문하시랑평장사 겸 응양군 상장군 이의민이네.”
이의방이 이의민을 가리키며 임민비에게 소개하자, 임민비는 이의민에게 허리를 숙이며 인사하였다.
“이번에 추밀원사로 발탁된 임민비라고 합니다. 상장군.”
“반갑네. 나도 잘 부탁하네.”
“추밀원사.”
“예. 합하.”
“지난 경인년에 사직한 관리들인데… 모두 동경 출신이야. 자네가 이거 가지고 이부와 병부상서에 좀 전하여 불러들이고, 마땅한 자리가 있으면 채워 넣으라 하게.”
“예. 합하. 그렇게 하겠사옵니다.”
“그리고 그냥 여기서 푹 쉬면서 일한다고 생각하면 되네.”
“나라의 신하가 되어 어찌 쉬라고 말씀하십니까.”
“하하하!”
이의방은 크게 웃었다.
“두 분 편하게 말씀 나누십시오. 저는 이만 나가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하게.”
임민비는 고개를 숙이며 뒤로 물러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