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그나저나… 왜 두경승 상장군은 아니 보이는 겁니까?”
“아, 두 상장군과 함께 오려고 하였는데 응양군 장군들과 약속이 있다면서 응양군으로 향하였습니다.”
“그래요? 허허, 상장군씩이나 돼서 장군들에게 불려 다니다니…….”
우복야 이준의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불려 다니는 게 아니라, 응양군 장군들이 청하였다 합니다. 다들 알다시피 경승이 그 사람이 친위군들 사이에서 존경을 받지 않습니까.”
“하하하! 그러고 보니 그렇네요.”
이의민의 말에 이준의는 금방 표정을 바꾸었다.
“우복야, 술이 과한 듯싶소이다.”
“송구하옵니다. 합하. 계속해서 좋은 날만 있다 보니, 이렇게 흥겹게 취하게 되었사옵니다!”
“그럼 우리 코가 삐뚤어지게 한번 마셔보세!”
“예. 합하.”
신료들은 껄껄 웃으면서 이야기를 나누며 마저 술을 마시었고, 중방에서는 풍악 소리가 울려 퍼지었다.
* * *
“계속 오늘만 같았으면 좋겠네. 위위경. 자, 한잔 받으시게.”
“고맙사옵니다. 폐하.”
황제는 친히 어주(御酒)를 따라 주었다.
“계속해서 나라가 평안하니, 짐의 기분도 정말 좋구나.”
“모두 폐하와 합하의 은혜이옵니다.”
“내 은혜라고 할 거까지 있는가. 다 이 상국 덕분이 아닌가.”
“그래도 폐하께서 합하께서 하고자 하는 일을 적극적으로 밀어주시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 아니옵니까. 폐하의 재가(裁可)가 마지막 결정이니 말이옵니다.”
“대부분은 중방에서 떨어지고, 곧장 시행되지 않는가.”
“그래도 큰일은 폐하께서 결정을 내리지 않으시옵니까.”
“하하, 그런가?”
황제는 웃음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두 공주가 회임하였다고 들었을 때, 너무 기뻤네. 정말이지… 태자비의 회임소식 때보다 더 기뻐했던 거 아는가.”
“폐하, 그런 말씀 하시오면 태자비 전하께서 서운해하실 수도 있사옵니다.”
현수의 말에 황제는 덤덤한 표정이었다.
“자, 내 술 한 잔 받게.”
“예. 폐하.”
현수는 술잔을 두 손으로 들어 올리며 황제가 따라주는 어주를 받아 마시었다.
“이제 자네는 무얼 할 생각인가?”
“무얼 하다니요?”
“자네도 사내인데. 꿈이 있을 게 아니야. 내 듣기로는 아주 큰 계획을 짜는 거 같은데… 어디 한번 그 이야기를 짐에게 들려주겠는가?”
“생각은 하고 있지만… 아직 제대로 확립이 된 것이 없사옵니다.”
“하긴… 신료들이 반발하였다지?”
현수는 황제의 말에 살며시 고개를 숙이자, 황제는 그런 현수를 보며 다시 술병을 들어 올리었다.
* * *
쾅!
“이런 빌어먹을 자식들 같으니라고! 출전하지 않으니 뭐!? 군량도 주지 않겠다!?”
우학유는 금나라 장수 올출의 말에 급격히 분노했다.
“참으시오. 병마사. 화를 내봤자 우리 손해요.”
“당장 돌아갑시다. 이따위 대우를 받자고 온 우리 고려군이 아니지 않습니까!”
우학유는 소리를 지르며 말하였다.
“진정하시오. 저들이 생각해도 그럴 것이오. 저들이 요구할 때마다 매번 피하기만 하지 않았소이까.”
“후방의 성이라도 지켜준 걸 다행으로 알아야지!”
남송과 금나라의 상황은 점점 악화되어갔다.
올출은 계속해서 공격해오는 적들을 막아내며 버티고 있었다.
이에 따라 금나라에서 계속 고려군에게 출진(出陣)을 하라면서 강하게 압박을 하였고, 결국에는 출진을 하지 않으면 군량과 보급을 하지 않겠다는 올출의 말에 우학유가 분노를 터트린 것이었다.
“이미 합하께 사람을 보내었소이다. 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打開)해야 할지 나도 모르겠구려.”
서경 유수 조위총의 말에 우학유는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 같아서는 금나라와 같이 싸워주고 싶었다.
하지만 합하의 명을 거스를 수가 없었다.
이제는 금나라 군이 겁쟁이라며 고려군을 손가락질하니, 고려군의 사기도 예전만큼 높지가 않은데 보급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어떤 상황이 속출할지 두 사람은 예상할 수 있었다.
이제 어떻게든 선택을 해야만 하였다.
“일단 보급을 끊는다고 해도… 굶겨 죽이지는 않겠지요?”
“당연한 거 아닙니까. 만약 그러기만 한다면 내 목숨을 걸고 올출 그놈의 목을 베어버리겠소이다.”
조위총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최소 병력 3천을 올출에게로 보내지요.”
“병마사.”
“어찌 되었든 합하의 명을 받아오기까지는 시일이 오래 걸릴 겁니다. 그때까지는 해봐야지요.”
“알겠소. 그리합시다. 서언, 자네가 군 3천을 이끌고 올출에게로 가게. 하지만 선봉은 아니 될 것이야.”
“여부가 있겠습니까.”
서언은 고개를 숙이며 곧장 밖으로 나갔다.
* * *
금나라로 떠난 지 벌써 시간이 꽤 흘렀다.
가는 길에 중간중간 군사들을 쉬게 하였다.
보급과 군량을 이끌고서 가는 것이라 행렬이 늦어졌다.
“이놈의 날씨가 사람 잡는구나.”
서언은 인상을 찌푸렸다.
고려와 날씨가 전혀 맞지 않아 고생이었다.
서언의 옆으로 금의 장수가 다가와 물을 건넸다.
“고맙소.”
서언은 물을 받아 마시며 다시 잔을 돌려주었다.
그리고 저 멀리서 군마가 달려오는 게 보였다.
정찰을 나간 정찰병이었다.
진영에 도착하자마자 말에서 내려 금 장수에게로 달려갔다.
“어찌 되었느냐?”
“아무것도 없습니다. 당장 출발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고생했다.”
금나라 장수는 정찰병의 보고를 받고서는 서언에게로 다가가 상황을 설명하였다.
이에 서언에 옆에 있던 역관이 통역을 해주자, 서언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부장을 바라보며 명을 내렸다.
* * *
그날 저녁.
서언이 막장을 들추며 안으로 들어섰다.
금나라 장수들이 앉아서 회의를 하고 있었다.
“고려국 장수 서언이라 합니다.”
서언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하였다.
“어서 오시오. 군사는 얼마나 되오?”
올출이 묻자, 역관이 바로 통역해주었다.
“보병 2천, 궁병 1천입니다. 선발대로 왔습니다.”
올출은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갑소. 드디어 고려군이 우리와 합류하였으니, 저 성은 금방 우리 금나라에게 떨어질 것이오. 하하하!”
“하하하하하!”
장수들은 크게 웃었다.
현재 상황을 오면서 들은 서언.
남송과 금이 성 하나를 두고서 서로의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고 있다고 했다.
“적들의 기세가 만만치 않소. 고려군이 그 사기를 꺾어주길 바라겠소.”
“고려 군사가 3천밖에 안되니, 후방을 지키겠습니다.”
쾅!
“역시… 여기까지 와서 꽁무니를 빼겠다는 건가!”
“3천밖에 안 되는 군사를 가지고 무슨 성을 치라는 거요!”
장수가 진노하며 벌떡 일어났다.
3천의 군사로 성을 치는 건 무모한 짓이었다.
자칫하다가는 전멸(全滅)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진정들 하게. 3천의 선발대로 성을 공격하는 건 아주 멍청한 짓이야. 고려국 장수의 말이 일리가 있어. 그럼 우리가 선제 공격하면 후방에서 성을 함께 공격하겠다는 이야기인가?”
올출의 물음에 서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좋네, 아하료!”
“예.”
“내일 해가 뜨면 공격한다.”
“예. 장군!”
아하료라는 장수는 곧장 밖으로 나갔다.
* * *
“그게 사실이냐?”
“예. 폐하. 고려군이 당도했습니다. 비록 수만은 아니더라도… 수천은 족히 되어 보였습니다. 또한 보급과 군량을 가득 실은 수레가 당도하였습니다.”
남송의 황제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대로라면 길목에 가로막힐 게 뻔하니 말이다.
장기전은 매우 불리한 상황이었다.
어떻게든 하루빨리 적들을 몰아내야 했다.
“폐하, 제가 군사를 이끌고 기습하겠습니다.”
고승윤이 나서며 말하였다.
“위험하네. 성문을 열고 어찌 나가려 하는가?”
“폐하, 성벽을 타고 내려가 기습하면 됩니다.”
이건 사지(死地)로 들어간다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불가하네. 저들이 바보인가? 그리고 만약 자네가 기습에 성공했다고 쳐보세. 돌아올 때는 어찌할 건가?”
“죽기를 각오한 몸이온데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겠사옵니까.”
“폐하, 저도 보내주십시오. 개봉의 성문을 지킬 수만 있다면 이 한 몸 불살라 모든 것을 다 받치겠사옵니다.”
심지어 지금 태상황제가 당장 성을 다 내어주고, 회군(回軍)하라는 서찰을 보내왔다.
이 서찰을 읽어 본 황제는 그 자리에서 찢어버렸다.
승기를 잡았는데, 도와주지 못할망정 회군하라니.
더군다나 남송에서 보급품 역시 보내고 있지 않았다.
“폐하, 장기전으로 가면 갈수록 불리해집니다. 폐하께서도 아시다시피 군량과 보급품들이 떨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곳곳에서 군량을 조달해왔다고 하여도…….”
황제는 손을 올렸다.
“폐하, 왜 그러십니까?”
“…화포를 써 봐야겠다.”
“…예?”
만일의 사태를 대비에 최대한 화약을 아껴온 남송의 군대였다.
화포를 써볼 기회는 이번이 제격이었다.
어쩌면 기습보다 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었다.
“전 장수는 들어라. 지금부터 비축(備蓄)하고 있던 화약을 꺼내거라. 화포를 써 적들의 진영을 불바다로 만들 것이다.”
황제의 말에 장수들은 침을 꿀꺽 삼키었다.
그동안 비축한 염초를 통하여 연구 끝에 남송에서 무기를 만들어내었다.
그건 바로 화약이었다.
그 화약을 이용할 수 있는 화포도 만들어내자, 남송에서는 이에 대해 함구령을 내렸고, 어느 때보다 철저하게 비밀 속에서 화약과 화포를 만들어내었다.
물론 금나라, 고려에서도 지금까지 남송의 화포의 내력(來歷)을 모르고 있었다.
“지금부터 적진에 우리의 화포의 위력을 보여라. 또한 기병을 성문 쪽으로 집결시켜라!”
“예. 폐하.”
장수들은 속히 해산하였다.
이에 황제는 미소를 지었다.
얼마 후, 군사들은 성곽에 화포와 화약 철구를 배치하고는 곧장 장전에 돌입했다.
훈련 때에나 쓰던 화포를 이제 본격적으로 사용하려 하니, 포수들은 정확하게 훈련을 하던 대로 화포를 장전하기 시작했다.
“장전 완료!”
곳곳에서 장전을 완료하였다며 포수들이 외치었다.
황제는 갑옷을 두르고 금군 대장과 함께 성루에 올라섰다.
금나라 진영에는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다.
황제는 천천히 손을 올리자, 금군 대장이 소리쳤다.
“발포하라!”
“발포하라!”
곳곳에서 발포령이 떨어지자, 포수들은 도화선에 불을 붙이었다.
치이익!
도화선이 점점 타들어가자, 장졸들은 침을 꿀꺽 삼키었다.
훈실전에서 쓰는 화포가 얼마나 파괴적일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퍼엉! 퍼엉! 퍼엉!
화약이 터짐과 동시에 달궈진 쇠구가 적진을 향해 날아갔다.
퍼억!
화포는 망루를 정확히 타격하였고 달궈진 쇠구들은 곳곳에 목책을 무너뜨리기 시작하였다.
다른 쇠구들은 군막에 떨어져 적들을 격파하기 시작했다.
“계속 장전하여 발포하라!”
황제의 명이 떨어지자, 휘하 장수들이 소리치며 명령을 내리었고 포수들은 재장전에 돌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