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4화
“잡과파? 그냥 실학파라고 하시는 게…….”
악정이 말하였다.
잡과파보다는 실학파라고 말하는 게 어감 상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좋아. 그럼 우리 넷이 앞으로 실학파로 가는 거야. 나라의 국력을 키우고, 공성병기도 잘 만들어서 자주국방(自主國防)하는 나라… 귀천을 가리지 않고 아프면 무조건 치료해 주는 나라… 배고파서 굶어 죽지 않게 하는 나라… 어때?”
“좋은 생각입니다. 하지만 문과는…….”
“그건 그냥 공자 왈, 맹자 왈 하면 끝이잖아. 잡과만큼 어려운 게 어디 있나. 사서삼경이나 오경까지 달달 외우면 끝 아닌가. 세상 살면서 실학만큼 좋은 거 없어. 봐봐. 공부에 누가 있나? 공부상서라고 하지만, 그 밑에 있는 이들은 전부 공장들이잖아. 그래, 안 그래.”
“아, 그렇지요.”
“예. 맞습니다.”
“형부도 보라고. 형부상서는 음서출신이지. 그 밑으로는?”
“잡과입니다.”
“그래. 그러니까 우리가 실학파로 가서 그런 이들을 대거 등용하자고. 고려를 문치중심이 아닌, 실학중심으로 가는 나라로 만들어 보자 이거야. 거기에 잡과에 하나 더 추가해 전문 약초를 캐는 채집꾼을 만들자고. 어떤가?”
“그거 좋은 생각입니다.”
“소장 또한 동의하옵니다.”
“문치보단 좋네. 실학이라… 하하하! 근데 현수 너도 알겠지만, 이미 인종 황제께서 너랑 비슷한 걸 한 적이 있으시거든.”
“압니다. 들었어요. 하지만 제대로 실행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이제라도 제대로 해야지요. 그럼 이제부터 우리는 실학파다!”
“예! 정주공!”
“정주공, 술상을 대령했사옵니다.”
“어서 들이게!”
덜컹.
방문이 열리며 술상이 안으로 들어왔다.
술을 마시며 실학을 활성화하기 위한 준비과정을 의논하기 시작하였다.
지금은 모두 제각기 다른 생각을 했지만, 이런 생각들이 후에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될지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하였다.
* * *
다음날 아침, 중방 회의를 마친 이의방은 집무실에서 각 현과 주에서 올라온 보고를 살피고 있었다.
“합하, 정주공과 6위장군들께서 뵙기를 청하옵니다.”
“오, 들라하라.”
이의방의 명에 방문이 열리면서 네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하하하, 다들 어쩐 일이냐?”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반겨주는 이의방이었다.
“합하, 저희는 이제 실학파로 가겠사옵니다.”
“…….”
네 사람이 들어오자마자 알 수 없는 말을 하자, 이의방은 인상을 구겼다.
“너 술 먹었냐?”
“아니옵니다. 합하.”
“갑자기 들어와서 무슨 말이야.”
“아, 예! 저희는 이제 문치가 아니라, 실학과 잡학으로 갈까 하옵니다.”
“아니,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이의방이 버럭 소리 지르며 성을 내었다.
“이제 고려는 문치중심이 아니라, 실학 중심… 즉 잡과 중심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였사옵니다. 신들은 율과 산학, 의과 역과 등으로 이 나라를 부흥시키고자 하옵니다.”
“안 해도 잘 먹고 있고, 상업도 잘 돌아가는데 왜들 그래.”
“문치중심으로 되면 상업이든 뭐든 다 망합니다. 송나라의 유교사상 때문에 얼마나 많은 잡과생들이 차별을 받았습니까. 저희는 나라를 위한 행위를 실현시키고자 하옵니다. 현실 사회 문제 해결을 위한 학문 말이옵니다.”
이의방은 피식 웃었다.
“계속해봐라.”
“예. 합하. 농업생산력이 발전하고 상공업이 성행하게 되면 많은 부를 쌓을 수 있게 됩니다. 나라 역시 막대한 세금을 거두어들일 수 있어 나라 발전에 크게 성장할 것이옵니다.”
“…….”
“또한 농업생산력이 발전하면 백성들은 매년 걱정 없이 끼니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더불어 의학을 널리 알릴 수 있게 하여 백성을 편안케 하고자 하옵니다. 또한 나라의 무기를 월등하게 만들어 외세의 도움 없이 자주국방(自主國防)할 수 있도록 인재(人才)를 늘리고자 하옵니다.”
이의방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 오늘 듣기 좋은 소리만 듣는구나. 그래… 네가 말한 것들을 어찌 실행할 것이냐?”
“의관들을 시켜 책을 만들게 하여 언문으로 풀어 백성들에게 보급하면 스스로 병을 치료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더불어 우리는 필요 이상으로 송나라, 금나라에서 들여오는 약재를 쓰고 있습니다. 합하께서도 아실 거 아닙니까. 이건 돈 낭비라 사료되옵니다. 충분히 우리 땅에서 나는 약초로 능히 치료할 수 있습니다.”
“그게 정말 가능하겠느냐?”
이의방은 천시호를 보며 물었다.
“합하, 가능하옵니다. 예전에 합하께서 제게 물으셨던 거 기억하시옵니까?”
“그래. 기억나다마다.”
“가능한 일이옵니다.”
“하긴… 가능하다고 듣고 난 후에도 정무가 바빠 제대로 처리를 해주지 못하였지. 기본적인 것만 알려 주는 것이었고… 혜민국에서 시행을 하여 찾아오는 이들에게 약방문을 써주며 가르쳐 준 게 다가 아니더냐?”
“그러하옵니다. 수질 역시 실학에 포함된다고 보시면 되옵니다. 이를 더 발전시킬 것입니다.”
“그렇구나. 오냐, 네 마음껏 해 보거라.”
“감사하옵니다. 합하.”
현수는 고개를 숙이었다.
이제 제대로 된 고려의 개혁을 펼칠 순간이었다.
“합하, 하옵고… 삼경, 사도호부, 8목에 있는 혜민국을 좀 더 확대하는 게 어떨까 하옵니다.”
“그건 너하고 내가 중서문하성으로 가서 신료들과 의논하고 결정되면 상서성에서 집행할 거다.”
“예. 합하.”
“그리고 조만간 황제 폐하께서 네게 전중감 겸 위위경 직책을 내릴 것이다. 그리 알거라.”
“예? 하지만 그건…….”
“내 폐하께 직접 전중감과 위위경 직을 너에게 달라 청하였다. 이 직을 갖고 네가 장차 부마가 된다면 황실의 큰 방패가 되어 줄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위위경이란 직책은 견룡과 순검군을 모두 통솔해야 하는 막중한 자리이다. 본래 견룡과 순검은 친위군에 속하지만, 황실을 경계하고 황제 폐하를 가까이 모시는 근위 군이니, 절대 실수가 있어서는 아니 된다. 알겠느냐?”
“예. 합하.”
현수는 고개를 숙이더니, 뒤로 물러나 밖으로 나갔다.
* * *
보름 후, 동북면 진영에 전령이 당도하였다.
“합하께서 보내신 명령서이옵니다.”
전령은 명령서를 건넸다.
홍중방이 이를 펼쳐보았다.
이미 금나라에서 사신이 온 것을 알고 있던 장수들은 만반의 태세를 갖추었다.
“뭐라 하십니까?”
“원군으로 금나라 중도로 가라 하시네. 그곳에서부터 움직이면 된다고 하십니다. 최대한 천천히 가라고 하시는군요.”
“그리해야지요. 아무리 재촉을 한다고 하더라도… 아주 천천히 움직일 것입니다.”
“금나라의 상황이 급박하나 보군요.”
홍중방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합하께 전하 거라. 말씀을 따르겠다고.”
“예! 장군!”
전령은 고개를 숙이며 곧장 밖으로 나갔다.
“좌장, 우장은 들으라. 지금 전군에게 출전 준비하라 이르라!”
“예! 장군!”
부장들은 곧장 밖으로 나갔다.
* * *
“전군! 공격하라!”
“와아아아아!”
수만의 대군들이 일제히 돌격을 하였다.
맨 앞에서는 사다리를 들고, 운제(雲梯)를 밀며 성으로 맹렬하게 달려나갔다.
군사들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퍼어억!
퍽억!
석포에 실어 날린 돌들이 강하게 성벽을 내리꽂혔다.
그리고 불붙인 기름 항아리가 연달아 성곽을 넘어가며 성곽을 불바다로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슈슈슈슝!
이에 맞서듯 성안에서 수천 발의 화살이 날아 들어왔다.
퍼퍼퍽!
화살에 맞아 무수히 쓰러지는 군사들.
그 화살 비를 뚫고, 병사들은 운제를 성곽에 걸었다.
그에 보병들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공격하라!”
남송의 황제는 친히 전선을 지휘하였다.
이러하니 남송의 군사들은 사기(士氣)가 떨어지려 해도 떨어질 수가 없었고, 오히려 파죽지세로 성곽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성곽에서는 뜨거운 물을 붓고, 돌을 던지며 군사들이 올라가지 못하게 하였다.
돌에 머리와 복부에 맞은 병사들은 힘없이 사다리에서 떨어졌다.
하지만 그걸로는 역부족이었다.
떨어진 군사들을 대신해서 쉴 새 없이 밀려드는 군사들 때문에 금나라 병사들은 사기가 점점 떨어지고 있었다.
맹렬하게 공격하는 남송군대 앞에서 말이다.
“막아라! 적들을 막아라! 올출 대원수께서 군사를 몰고 올 것이다! 필히 막아라!”
금나라 장수는 다급히 막으라며 소리쳤다.
쉬이이익!
퍼퍼퍼퍽
남송의 궁수들이 일제히 성곽 위 궁수들을 향해 화살을 날렸다.
“으아아악!”
금나라 군사들은 화살에 맞고 그대로 성곽 아래로 떨어졌다.
다른 군사들 또한 쓰러져 죽어가며 부상자들도 속출하였다.
이에 남송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하지만 금나라 병사는 올출이 곧 도착할 것이라는 말에 포기하지 않고, 남송 병사들을 공격해갔다.
그럼에도 남송의 병사들은 성곽을 올라와, 들고 있던 도끼로 적을 가격하면서 성을 점차 점령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이를 본 금의 장수는 밀리고 있는 곳으로 군사를 추가로 보내었다.
“저쪽이다! 저쪽을 사수하라!”
도끼를 찍고 뽑아내자, 금나라 병사들은 피를 분수처럼 뿜고 죽었다.
피가 남송 병사들의 갑옷과 얼굴 곳곳에 튀었다.
남송의 군사들은 미친 듯이 성을 장악해 나아가면서 금나라 병사들을 향한 일말의 자비 따위는 보여주지 않았다.
군사들은 계속하여 도끼와 철퇴를 휘둘렀다.
“대송의 원한을 갚아라! 공격하라!”
쿠우웅! 쿠우웅!
충차로 성문을 때리기 시작했고, 뒤편에서는 공성탑를 들이밀며 공격을 감행하였다.
솨아아!
충차로 기름을 뿌리고, 횃불을 던졌다.
화르륵.
“으아아아아!”
불붙은 군사들은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타 죽어갔다.
충차에 붙은 불을 끄기 위하여 충차에 달아놓은 물을 퍼서 겉가죽에 뿌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다행히 불은 금세 잡히었다.
남송은 연달아 충차로 성문을 가격하였다.
“힘을 내라! 함락이 코앞이다!”
장수들은 황제의 친정(親征)에 힘입어 직접 사다리를 타고 성곽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군사들도 장수의 뒤를 따라 올라가기 시작했다.
“야차뢰를 떨어트려라! 통나무를 굴려라!”
수성 전에 미리 준비해둔 야차뢰를 일제히 떨어트리며 불을 붙인 통나무를 굴렸다.
퍽!
두꺼운 송곳이 박혀있는 야차뢰는 사정없이 남송 장수의 머리를 가격하였다.
빠악!
“으아악!”
야차뢰를 맞은 장수가 사다리에서 떨어지자, 야차뢰는 다시 올라갔다가 떨어지며 남송의 군사들이 성곽으로 올라오는 것을 제지하였다.
야차뢰 덕에 금나라 군사들은 조금씩 힘을 되찾아갔다.
계속하여 사다리를 성곽에서 떨어트리며 병사들이 올라오는 것을 제지하였다.
성곽이 뚫린 부분에도 마찬가지로 금나라 병사들이 몰려들어 접전 중이었다.
창으로 찌르면서 앞으로 나아가자, 송나라 병사들은 무차별적인 공격으로 인해 제대로 반항 한 번 해보지도 못하고 죽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