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3화
“거기에다가 추가 병력을 요청한 건 그만큼 심각한 상황이 아니겠습니까. 금으로 군을 지원한건 잘못된 판단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일단 동북면에 주둔하고 있는 군을 국경을 넘게 해서 중도로 보내야지. 천천히 말이야. 병부상서가 남송의 상황을 알아보며 보고하게. 또한 병부에서 함경도로 보낼 군사들을 선정하여 각 상장군들과 의논하여 군을 이동시키게.”
“예. 합하.”
“혹시 모르니, 군사들의 상태를 점검하고 낡은 무기가 없는지 군기감장이 확인하게. 낡은 것들은 모두 바꾸도록 해.”
“예. 알겠습니다.”
“시간을 지체 하면 지체할수록 우리 군사들의 피해가 많이 날것이니, 서두르도록 하시오.”
“예.”
“또한 호부에서는 개경에 밀집해 있는 백성들을 외성 밖에서 살 수 있도록 그 터를 마련해주도록하게.”
“명을 받으옵니다.”
신료들은 고개를 숙였다.
이의방 역시 돌아서서 황제에게 고개를 숙이었다.
“짐은 상국과 조정대신을 믿으니, 상국이 알아서 잘 처리하시오. 혹여 문건에 결제가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대전에 들도록 하시오.”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황제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침소로 향했다.
신료들도 황제가 자리를 뜬 것을 보고 모두 대전 밖으로 나갔다.
이의방은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황제가 이제 더 이상 술독과 후궁들에 빠져 살지 않으니 말이다.
이건 정말이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하아…….”
황제가 침소로 들어서자,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물을 한 사발 들이키던 황제가 입맛을 다셨다.
“이놈의 술이 또 당기는구나.”
“폐하, 좀 참아보시옵소서.”
박 내관의 말에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짐을 따르는 이들은 어떠한가?”
“충직한 환관들이 백존유의 지휘 아래, 매일 훈련을 받고 있사옵니다. 내관들 역시 폐하의 명이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할 것이오니, 심려치 마시옵소서.”
“박 내관밖에 없도다. 그런데도 이 상국이 환관들과 내관들을 줄이라하니, 참으로 짐의 속이 타는구나.”
박 내관은 황제의 말에 고개를 숙이며 말하였다.
“폐하, 심려치 마시옵소서. 내관들이 내시부를 떠난다고 하더라도 폐하의 말씀이라면 단번에 일어설 것이옵니다.”
황제가 박 내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내관들 역시 각 현령으로 배치된 상황이었다.
환관들은 최소한의 인원을 제외하고는 밖으로 보내기로 하였다.
이로써 이의방이 원하는 대로 황제는 실행하고 있었다.
나라의 사정은 점점 좋아지는 반면, 황제는 점점 불안해져 갔다.
황제는 자신이 보위에 오를 당시를 다시 되새겼다.
정말 두려웠다.
지금도 자신의 형, 의종처럼 폐위를 당하는 꿈을 수도 없이 꾸었다.
폐위를 당할 수 있다는 생각이 자주 들다보니, 황제는 점점 지쳐가기 시작했다.
‘정주공이 사위로 들어온다면 이런 생각이 잦아들까……?’
황제는 이마 위에 손을 얹혔다.
* * *
호부에서는 금의 사신들이 가져온 것을 일일이 확인을 한 다음, 장부에 적어 나갔다.
호부 상서는 필요에 따라 재정을 분배하기로 하였다.
예산은 호부에서 제일 많이 차지하였다.
함경도 재건에 있어서 얼마가 들지 모르는 상황이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
비단 3천 필은 황실의 내탕고(內帑庫)로 옮겨졌다.
“공부상서, 오셨습니까.”
“예. 다름이 아니라, 함경도 재건에 관한 일로 왔습니다.”
“아, 예… 그 부분은 저희 호부에서 관리 감독할까 합니다.”
“그렇군요. 그럼 재건 하는 데 있어 얼마나 나오겠습니까?”
“나오다니요? 아직 보고조차도 올라오지 않았습니다만.”
호부 상서는 의아하게 공부상서를 바라보았다.
“별다른 뜻은 없습니다. 건축하는 데 있어서 얼마나 들어갈지 궁금해서 말입니다.”
“그건 걱정 마십시오. 호부관원들이 조사차 나갔으니, 보고가 오는 대로 공부에서 관원을 파견해 살필 것입니다. 그때 다시 내어 드리겠습니다.”
“예. 그럼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살펴 가십시오.”
공부상서는 공부로 돌아갔다.
* * *
그날 저녁.
현수는 자신의 저택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았다.
그동안 벌어졌던 일들과 자신이 알고 있는 역사들을 비교하며 되짚어 보았다.
‘전부 다른데…….’
알고 있는 역사를 모두 끄집어내어 종이에 적어 내려갔다.
하나도 맞는 게 없었다.
망이 망소이의 난부터 시작해서 현재까지.
단 하나도 맞는 게 없었다.
난은 확실히 일어났으나, 그 난이 이렇게 일찍 일어나면 안 되는 것이었다.
[이의방, 정중부, 경대승, 이의민, 최충헌, 최우, 최향, 최의, 김준, 임연, 임유무…….]
종이에 적은 건, 고려의 권력자들의 이름이었다.
‘정중부는 이미 죽었으니… 이의방 집권은 계속 갈 수 있는 거고… 대승 형님…….’
이에 현수는 한숨이 나왔다.
‘설마… 아닐 거야…….’
현수가 도방 때문에 분노했던 나머지, 경대승의 마음을 그냥 들쑤셔놓았다.
못할 말까지 한 자신이 조금 후회되었다.
내정을 깊이 안정시키고, 군사력도 보강(補講)한 고려였다.
게다가 금나라에 꿀리지 않을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더불어 음서를 폐지하고, 과거를 실행하여 많은 인재(人才)를 뽑았다.
그런 그들을 현령, 안찰사 등으로 보내어 고려의 민심을 안정시켰다.
이런 고려에 경대승이 반란을 일으킬 이유는 없었다.
‘이의민… 이 양반 골치 아프네…….’
이의민은 동경 유수로 가서 민심을 안정시켰다.
그 후가 문제였다.
역사대로라면 이의민은 동경에서 반란을 일으키려다가 최충헌에게 주살(誅殺)되었다.
그 후에 최충헌이 집권하지 않았던가.
‘남송… 금… 전쟁?’
남송의 황제는 북벌을 계획하였지만, 쉽게 북벌에 나서지 못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군사를 이끌고 친정(親政)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앞으로 어떻게 되려나…….”
생각하기 싫었다.
역사가 뒤죽박죽이다 보니, 놔두면 어떻게든 될 것이었다.
현수는 이름들을 적어놓은 종이를 들고서 불에 가져다 대고 태웠다.
그리고 사기(沙器) 안에 이를 집어넣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주공, 손님들께서 오셨습니다.”
“손님? 들이시게.”
방문이 열리면서 안으로 들어온 이들은 다름 아닌 악정, 정균, 천시호였다.
현수는 세 사람을 보자마자, 믿기지 않는 듯 눈을 손으로 비볐다.
“너무 피곤한가? 헛것을 다보네.”
“헛것이 아닙니다.”
“…….”
“하하하, 왜 그리 보십니까?”
“어… 자네는 함경도에 있어야 하지 않나?”
“합하의 명을 받들어 돌아왔습니다.”
“…아.”
현수의 반응이 시원치 않았다.
“일단 앉게.”
“예.”
세 사람은 자리에 앉고, 현수도 자리에 앉았다.
현수는 세 사람을 보면서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저희가 괜히 찾아온 듯싶습니다. 정주공.”
“다음에 다시 뵙겠습니다.”
“아니야, 아니야. 앉게. 이보게! 술상 좀 내오게!”
“예!”
밖에서 대답 하는 소리가 들렸다.
“저희가 너무 늦게 찾아온 게 아닌지…….”
“아니야, 아니라니까. 나는 함경도에 있어야 할 자네들이 오니 당황스러워서 말이야.”
당황스러울 만도 했다.
전선(前線)을 지켜야 할 사람들이 왔으니 말이다.
“그럼 누가 함경도로 갔나?”
현수는 그동안 공주들과 함께 있었기에 중방에 거의 나가지 않았다.
그러니 상황을 몰랐다.
이의방이 현수에게 중방에 나오지 말고, 공주들과 함께 있으라며 엄포를 놓았기 때문이었다.
“바뀐 건 없습니다. 흥위위 대장군 홍중방, 좌우위 대장군 오광척, 천우위 대장군 장박. 이 세 분이 전군을 지휘할 것입니다.”
악정이 말하였다.
“호부관원들이 갔다고 하던데… 어떤가?”
“지금 차근차근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저희들이 안착한 곳에 진을 세우기로 하였습니다. 그곳에서 여진족을 방비(防備)할 생각입니다.”
“거기가 어딘가?”
“한 곳은 압록강 상류고, 다른 쪽은 두만강 하류 지역입니다.”
“두만강 하류 쪽은 동해와 연결이 되어 있어서 어선을 일구어도 될 듯합니다.”
“압록강 상류 쪽은 온통 허허벌판이라, 농사는커녕 먹고 살려면 사냥을 해야 할듯합니다.”
“미리 지형은 파악해놓은 건가?”
“예. 저는 진을 치고 계속 순찰을 돌며 살피어 봤지요.”
“저 또한 그렇습니다. 두만강 하류로 내려가니, 장대한 바다가 펼쳐지더군요. 그곳으로 하여금 고기를 잡고 하면 먹고사는 데는 지장이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더불어 수군도 있으면 좋겠더군요. 그쪽 주변에 아주 거대한 섬이 하나 있으니까요. 거긴 토지가 좋아 농사도 가능할 거 같습니다.”
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이 살 정도면 되지 않겠나. 악정, 본진에는 아무 일 없지?”
“그렇습니다. 여진족도 내려오지 않고 오히려 조용합니다. 군사들은 사냥에 취해 있습니다.”
“하하하, 사냥도 훈련이지.”
“최근에는 어떤 병사가 호랑이를 잡았지 뭡니까.”
“그게 정말인가?”
“예. 호랑이를 잡아 가죽은 병사에게 주었고, 뼈는 약재로 쓰고, 고기는 장졸들과 함께 먹었지요.”
“대단하네, 대단해!”
“홍중방 장군이 그 병사에게 대정직을 내렸습니다.”
“대정? 하하하! 잘한 일이구먼!”
현수는 악정의 말에 크게 기뻐하였다.
호랑이를 잡는 일은 결코 쉬운 게 아니었다.
호랑이 형체만 봐도 오금을 저리고 옴싹 달짝 못 하는 게 정상이었다.
그런 대상인 호랑이를 잡았다면 정말 대정이 아니라, 별장직도 내렸을 것이다.
자신의 한계에 맞게 대정직을 주었다는 것은 정말 홍중방을 칭찬해야할 일이었다.
“합하는 뵙고 오는 길인가?”
“예. 뵙고 왔습니다.”
“하하하, 잘했어. 합하께 먼저 인사드리는 게 당연하지. 그나저나 이 늦은 시간까지 뭐하신다나?”
“그냥 이것저것 생각하실 게 많다고 하십니다.”
천시호가 답하였다.
“마침 자네들에게 묻고 싶은 게 있네.”
“예. 하문하시옵소서.”
“자네들은 문과가 좋나, 아니면 잡과가 좋나?”
뜬금없는 질문에 세 사람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 것인지 몰랐다.
“잡과는 산학, 의학, 율학 그런 거잖아. 그걸 배워놓으면 먹고 사는 데 문제없겠지?”
“그건 당연한 말씀 아닙니까.”
“그럼 보자고. 글만 줄줄 읽어서 먹고사는 게 나을까… 아니면 산학, 의학 등을 익혀서 먹고 사는 게 나을까?”
“당연히 산학, 의학이 낫지요.”
정균이 답하였다.
“그래. 그럼 우리 이제 잡과파로 가자.”
“예?”
“그게 무슨…….”
“우리 앞으로 산학, 의학 이런 거에 매진해보자고. 실학 말이야. 농업 생산력이 발전하고, 상공업이 성행하는 그런 거 말일세.”
“지금도 그러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계속해서 가자고, 우리가 밀어붙이잔 말이네. 자네, 천 장군. 나랑 같은 잡과파 잖아.”
“…예? 아, 그건 그렇지요.”
천시호는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