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2화
“정주공이 황실의 사위가 된다면 마땅한 직책을 내려야 할 것이 온데… 현재 응양군 상장군 경대승이 위위경직을 같이 가지고 있으나, 부재중이오니 부디 위위경 자리를 거두시옵고, 마찬가지로 전중감도 거두어 정주공에게 내리는 게 맞다고 사료 되옵니다.”
위위경은 의장(議長)과 황실 호위를 담당하는 견룡, 순검군의 우두머리 직책이었고, 전중감은 황실종친의 족보를 관리 감독하고 황실의 주요 행사를 책임지고 맡는 자리였다.
“신이 깊이 생각하여 말씀 드리는 것이옵니다.”
위위경과 전중감 자리를 현수에게 준다면 황제는 조금이나마 더 안심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황실종친보다 더 믿을 만한 게 견룡군, 순검군이었다.
이 자리의 우두머리를 황실의 사위가 맡는다면 황제는 환관과 내관보다는 견룡과 순검군에 의지하게 될 것이니 말이다.
“상국, 정주공은 이미 6위대장군직을 수행하고 있지 않소. 굳이 위위경과 전중감 자리까지 내려야겠소이까?”
“합하, 신은 국정을 운영하는 데 있어 추밀원 일에 치중하다보니, 전중시와 위위시의 일을 다 돌보지 못하고 있사옵니다. 이제 일을 나누는 것이 맞습니다. 부디 윤허하여 주시오소서.”
말이 왕명을 출납하는 곳이지, 현재 추밀원은 이의방의 명을 출납 하는 곳이 되었다.
이의방이 모든 인사권을 마음대로 하긴 했지만, 예의상 황제에게 교지를 받고 보고 하는 것일 뿐, 황제는 현재 실권 자체가 없었다.
있더라도 법안 제정, 공신, 작위에 관한 것일 뿐이었다.
“흐음… 그럼 상국의 뜻을 받아들이도록 하겠소이다. 그리고 이번 정벌에 대하여 논공행상을 논하려 하는데… 그건 언제쯤 해야 옳겠소?”
“우선 남송과 금에 대한 일이 있사오니, 차후에 아뢰겠사옵니다.”
“그리 하도록 하시오.”
“예, 폐하.”
“이 상국.”
“예.”
“지난날 태자와 있었던 일은… 상국이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시오”
“폐하, 어인 말씀이시옵니까? 폐하께서 성정을 되찾으시고 이리 정무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주시온데 어찌 신이 다른 마음을 품을 수 있겠사옵니까. 심려치 마시옵소서.”
“고맙소. 상국.”
이의방은 미소를 지으며 인사하였다.
“하옵고… 폐하. 이제 환관과 내관들을 멀리 하심이 어떠하시옵니까?”
이의방의 말에 박 내관이 이의방을 쳐다보다 시선을 거두었다.
“…환관과 내관을?”
“예. 지난 선황 시절, 환관과 내관의 간언(間言) 때문에 정사가 망가질 대로 망가졌사옵니다. 혹시 폐하께오서 선황 때의 전처를 밟을까 우려되어 말씀을…….”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우리 내관들은…….”
“닥쳐라! 폐하께 지금 간언(諫言)을 드리고 있는데 어찌 내관 따위가 나서느냐!”
“박 내관, 상국의 말이 옳다. 이만 물러나라.”
“…예. 폐하.”
박내관은 고개를 숙이었다.
“내 상국의 뜻을 알았으니, 이만 물러가시오.”
“황은(皇恩)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이의방은 만족한 듯, 허리를 숙이며 인사하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 * *
멍청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어리석다고 해야 할지.
관리를 죽이고, 은병을 탈취한 놈들이 생각보다 빨리 잡혔다.
태학생들 짓이었다.
지방 귀족들의 자식들로, 태학에 들어와 공부를 해도 모자를 판에 이런 미친 짓거리를 행한 것이었다.
학생들이 잡히게 된 이유는 생각보다 어이없었다.
기방에서 금오위로 고변(告變)을 해왔다.
많은 은병들을 함에서 계속 꺼내어 사용한다고 말이다.
처음에는 설마 했다.
하지만 함에서 계속해서 은병이 나오는데다가, 한 학생이 술에 취해 입방정을 떠든 바람에 행수가 금오위에 고변하게 된 것이었다.
“이놈들! 사실대로 불지 못하겠느냐!”
금오위 대장군 송경보는 엄하게 심문을 하였다.
형틀에 묶어서 가차 없이 주리를 틀고, 형리들이 채찍으로 마구잡이로 때렸다.
하지만 이중에 단 한명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지독한 놈들… 여기 보이느냐! 여기에 쓰여 있는 것들은 모두 나라에서 직접 새긴 글자들이다. 네놈들이 이걸 보고도 대답하지 않는 게냐!”
은병이 담겨있는 함 안에 작은 글씨로 ‘봉’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학생들은 고개를 푹 숙이었다.
“네놈들이 불지 않는다면 고신(拷訊)은 더 가해질 것이다! 여봐라, 압슬형(壓膝刑)을 준비하라!”
“예!”
형리들은 곧장 주리를 틀고, 채찍으로 때리는 것을 중지했다.
이내 물러서서 압슬형을 준비하려 하였다.
그때.
“말씀 드리겠습니다! 말씀 드리겠습니다!”
압슬이라는 말을 들은 학생은 기겁하며 소리쳤다.
“무슨 개소리야!”
“맞잖아. 우리가 한 거!”
엉엉 울면서 말하는 학생에 금오위 대장군 송경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야기해보아라. 그럼 압슬형은 멈추어주겠다.”
“예… 저희가 한 거 맞습니다.”
“주동자가 누구냐? 왜 그런 짓을 하였느냐?”
학생은 온몸을 부르르 떨면서 말하였다.
“저, 저기.”
“누구냐! 사실대로 이실직고하지 못할까!”
“이자홍입니다! 이자홍입니다…….”
“…이자홍? 그래. 그럼 왜 그런 짓을 한 것이냐?”
“개, 객기였습니다. 그 사람이 오래토록 세금을 탈취한다 해도 찾을 수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말이 끊어지기가 무섭게 송경보는 소리쳤다.
“한심한 놈들… 여봐라! 토설을 하였으니, 고신은 필요 없다. 이들을 당장 하옥하라!”
“예!”
형리들이 학생들의 밧줄을 풀더니, 학생들을 질질 끌고 옥사로 갔다.
“하아…….”
송경보는 그런 학생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 * *
“합하, 죄인들이 토설을 하였사옵니다.”
송경보가 중방으로 들어서며 말하였다.
“뭐라던가?”
“객기였다 하옵니다. 세금이 오고가는 것을 보고, 중간에 탈취해도 찾을 수 없을 거라 생각 했다 하옵니다.”
“멍청한 놈들… 세금이 오가는데 있어서 방비를 안 할까… 형부상서.”
“예. 합하.”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저자에서 다리 힘줄을 자르고, 거제로 유배 보내거라. 그리고 그 집안의 재산을 모두 압수토록 하라. 당장 시행해야 할 것이다.”
“예. 합하.”
중서문하성에서 나온 결과대로 처리하였다.
평장사 이의민이 말한 대로 힘줄을 잘라내기로 하였다.
더불어 세금을 탈취하여 사용했으니, 그 집안에 재산을 압수하는 것으로 일단락 시켰다.
“이제 상서성에서 6부에 관한 일들을 집행 할 때 앞으로 조심 또 조심하라.”
“예. 합하.”
신료들은 고개를 숙이며 답하였다.
그렇게 탈취사건이 끝났다.
저자에서 학생들의 다리 힘줄을 잘라, 지혈만 시킨 후 수레에 실어 모두 거제로 유배를 보내었다.
유배지로 가던 도중에 죄인들은 십여 명이 넘게 죽어갔다.
치료는커녕 방치한 채로 보냈으니, 덧나거나 썩어 감염 증세를 일으켜 죽었다.
그 사실은 조정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 * *
두 달 정도 흘렀다.
이제 덥디 더운 여름이 왔다.
여름철이라 그런지 군사들은 자주 물을 마셨다.
특히 경번갑을 입고 다니는 군사들은 죽을 맛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군사들마다 수통이 있었고, 경계를 설 때 태양을 가려주는 우산 덕에 군사들을 버틸 수 있었다.
“큰일이군. 날씨가 점점 더 더워지니 말이야.”
“안 그래도 군의들로부터 전갈(傳喝)을 받았어. 오늘도 한 오십 명이 쓰러졌다네.”
“이놈의 날씨란… 참으로 고통스럽네.”
“예. 그렇습니다.”
“우리 응양군도 마찬가지야. 이십여 명이 훈련하다가 탈수를 일으켰지 뭔가.”
“이리 잠잠한 것을 보니, 금나라에서는 아예 자기들끼리 전쟁을 치르려는 모양이구먼.”
“하긴… 금병, 은병, 비단은 엄청난 재물이 아닌가.”
“무슨 말인가. 우리 군대는 이미 금나라로 들어갔어. 따라서 우리는 금병, 은병, 비단은 반드시 받아야 하네.”
“쉽게 주겠는가? 이 핑계 저 핑계될 건데.”
“그렇게 나오면 내 손으로 금나라 조정을 박살내버려야지.”
이의민이 그렇게 말하더니, 씨익 웃었다.
좌우위 이영령, 신호위 박존위, 흥위위 돈장, 감문위 최원호, 천우위 최숙청도 이의민의 말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산원이 급히 어디론가 뛰어가는 게 보이자, 돈장은 산원을 불러 세웠다.
“무슨 일이냐.”
“금에서 사신이 왔습니다!”
뛰어가며 말하는 산원의 말에 상장군들은 웃었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진짜로 왔네.”
* * *
얼마 후, 황궁 대전에 중신들과 금나라 사신단이 들어섰다.
“약조대로 금병, 은병, 비단 모두 가져왔습니다.”
“아니… 일부만 보낸다고 하지 않았소?”
이의방이 물었다.
“금나라의 사정이 급합니다. 부디 군을 더 보내주시지요.”
사신의 말에 이의방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군을 보내기로 하였으니, 추가 병력을 보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어디로 보내면 되오리까?”
“중도에서 금나라 군과 같이 움직이시면 됩니다. 고려군에 대한 모든 지원을 아끼지 말라는 폐하의 명까지 받아왔사옵니다.”
완안홍준의 말에 이의방은 만족스러워하며 끄덕였다.
남송과 금나라에 상황이 악화된 듯싶었다.
“금의 사정은 어떠하기에 이리 다 가져온 것이오?”
“남송이 양양성을 넘었습니다. 파죽지세(破竹之勢)로 금의 성을 공략하고 있습니다.”
“…뭐라?”
“남송의 군이 금을 공격하고 성을 공략할 정도인가? 허…….”
이의방은 헛웃음이 나왔다.
“합하, 한 시가 급합니다.”
“알겠소이다. 내 오늘 동북면 함경도에 주둔한 군대로 파발을 띄울 것이니, 그리 아시오.”
“감사하옵니다.”
“사신을 객관으로 모시라.”
“예.”
예부 상서 유응규가 앞으로 나와 고개를 숙이며 사신을 이끌고 대전 밖으로 나갔다.
“상국, 남송이 계속 공격을 감행하고 있다면… 우리 고려군에게도 많은 피해가 있을 것이 아닌가?”
“폐하, 심려치 마시옵소서. 이미 서경 유수와 병마사에게 명령서를 보내놓았으니, 그들이 잘 알아서 할 것이옵니다.”
“오, 그거 정말 잘하신 일이오.”
황제의 칭찬에 이의방은 미소를 지으며 살며시 고개를 숙였다.
“남송이 파죽지세로 금의 성을 공략하고 있다하니, 정말로 우려가 깊습니다.”
“우려라니?”
“남송의 공격으로 속수무책 당하고 있다하면 필시 우리 고려군에도 피해가 있을 것이 아닙니까.”
“우복야, 합하께서 이미 명을 내렸다하지 않소.”
“그래도 걱정돼서 말씀 드리는 겁니다. 금나라가 우리 고려군을 어떻게 쓸지 모르는 상황 아닙니까.”
우복야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전선(前線)의 상황이 어떻게 뒤바뀔지 모르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