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1화
“본래 청혈단이라는 조직은 척준경 장군이 만들었던 하나의 정예단체 였습니다. 합하 깨서도 아시지 않으시옵니까? 비록 그 단체가 변질이 되어 사람이나 죽이는 자객집단이 되었지요. 혹 청혈단을 의심하는 것이옵니까?”
무인이라면 척준경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의 무용담은 고려 제일이었다.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은 금나라 장수 사묘아리와 일전을 겨루었던 이야기는 전설적인 무용담이었다.
홀로 적진으로 들어가 세 명의 적장의 목을 치고, 사묘아리의 본진에서 단둘이 겨루었던 그 이야기.
사묘아리는 그런 척준경을 보고 군을 후퇴시켰다는 이야기가 무인들에게 전해져왔다.
하지만 이게 사실인지 거짓인지는 몰랐다.
“알지. 척 장군께서 궁궐을 침범하고 불 지른 것은 만세의 죄라고 탄핵을 받아 물러나시지 않았는가. 그 후로 청혈단은 어떻게 되었는지 언급도 없네… 나도 그 실체 여부를 모르지만 말이야.”
“합하, 이건 좀 위험한 말씀이옵니다만…….”
“그래. 이야기를 해봐.”
“칼 차고 다니는 놈들 잡아들여 고신(拷訊)을 하는 게… 어떻겠사옵니까?”
“뭐? 아니, 죄 없는 놈들을 잡아다가 뭐 하자는 거야.”
“그중에 토설하는 놈들도 있지 않겠사옵니까. 이 방법밖에는 없사옵니다.”
“만약… 그중에 없으면 어찌하나?”
이의방의 말에 금오위 대장군 송경보는 고개를 숙이며 답을 하지 못하였다.
이의방은 답답한지 한숨을 쉬었다.
“어찌 되었든… 금오위 대장군. 확실히 발본색원(拔本塞源)하게.”
“예! 합하!”
이의방은 그대로 밖으로 나가버렸다.
금오위 대장군은 금오위로 향하였다.
* * *
땅! 따악! 따당!
“풀무질하는 소리 한번 경쾌하네.”
“고맙사옵니다. 합하.”
“하하하, 자네 이번에 큰 사건이 터진 거 알지?”
“예. 알다 뿐이옵니까?”
군기감정이 고개를 숙이며 답하였다.
“자네가 상흔을 보면 어떤 종류의 칼로 베어졌는지 알아볼 수 있겠는가?”
“합하, 제가 십 수년간 풀무질을 해오면서 병장기를 만들어낸 것만 해도 수백 수천 자루입니다. 이제는 눈을 감고 상흔만 만져봐도 어떤 것인지 가늠을 할 수 있사옵니다.”
“그럼 자네가 안치소에 가서 한번 보고 와서 알려줄 수 있겠는가?”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군기감정은 고개를 숙이며 밖으로 나갔다.
“합하, 개경의 모든 대장간을 돌았습니다. 군기감이라고 다르겠습니까.”
“달라… 다르지… 저자는 선왕 시절부터 이곳에서 병장기를 만들어왔던 자이네. 다른 나라에서 쓰는 병장기들까지 만져본 사람이야.”
“…예?”
금오위 대장군 송경보는 깜짝 놀랐다.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기 전부터 알던 사람이네.”
“아, 그러하시옵니까?”
“몇 번이고 군기감장에 임명하겠다고 해도 계속 거부를 해서 아예 그냥 정으로 남겨두었네.”
이의방은 미소를 지으며 대장군에게 말하였다.
“자네 항상 한잔 마시고 싶을 때 군기감정과 함께 한 잔씩 하게. 나쁘지 않은 사람이야. 욕심도 없고… 나는 심란할 때 이곳에 와서 한 잔씩 하네.”
“아, 예… 알겠습니다. 합하.”
“그나저나… 봉모.”
“예. 합하.”
“자네 이번에 손주를 봤다면서.”
“아, 그러하옵니다. 합하.”
“집으로 좋은 선물 하나 보내겠네.”
“아니옵니다.”
“그리고 자네 아들… 이부에서 자꾸 말이 나오고 있어. 아들 단속 좀 하게.”
김봉모는 아들 이야기에 고개를 숙이었다.
“면목이 없사옵니다. 그런 비루한 놈이 제 자식이라…….”
“그럼 쥐어패서라도 인간 만들어야지. 하하하!”
이의방은 크게 웃었고, 군기감정은 곧장 안치소로 향하였다.
“대장군.”
“예. 합하.”
“저 김봉모 말이야. 여진어와 한어에 능통해서 이번에 유응규를 보좌할 사람으로 보낼까 생각 중이네. 예부시랑으로 보내려고.”
“아, 그렇습니까?”
“그래. 사람이 보기보다 똑똑해.”
얼마 후, 군기감정이 돌아왔다.
“보기에 어떠한가?”
“합하, 상흔은 검은 맞사오나… 깊이와 넓이를 보아하니, 탄력으로 혈이나 급소를 찌르기에 좋은 연검으로 보입니다.”
“…연검이라?”
“예. 합하. 연검은 다루기가 어렵고, 가볍지요. 필시 검을 배운 자입니다.”
“고맙네. 대장군. 지금 즉시 연검을 사용하는 무사 놈들을 모조리 찾아 추포(追捕)하고, 최근에 연검을 구매한 이들이 있는지 대장간을 돌아서 확인해봐.”
“예. 합하.”
* * *
그날 저녁.
깊은 골짜기에 모여든 복면인들은 탈취한 것을 보며 좋아라 하며 미소를 지었다.
“이보게. 이거 보게나. 하하하하.”
“이 정도면 우리 뭐든 다 살 수 있을 거네. 아니 그런가?”
“…부족해.”
“이 사람아, 뭐가 부족하다는 건가?”
“이걸 나눈다면 얼마나 남는다고. 벽란도에 집사고 끝이야. 그럼 이걸로는 부족하지.”
남자는 미소를 지었다.
“그럼…….”
“한동안 조용히 지내고 있다가 개경에서 잠잠해지면 다시 시작해야지.”
“그거 좋은 생각이네. 계속 움직이면 덜미가 잡힐 테니 말이야.”
“그나저나 저 재물로 무얼 할까?”
“기방이나 가서 죽치자고. 어떤가?”
한 남자가 말하였다.
“기방이라… 그것도 좋지. 이참에 우리 기방에서 아주 살아볼까?”
“하하하하!”
수십여 명의 복면인들은 크게 웃었다.
“제길… 법이 바뀌지 않았으면 우리가 이 돈으로 땅을 사고, 노예도 사서 경작을 하는 건데 말이야. 그럼 떼돈을 벌었을 텐데… 안 그런가?”
“무식한 무부(武夫)놈 같으니라고. 이의방 그놈은 왜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하는 거야. 빌어먹을…….”
“옛날처럼 받아먹을 거 받아먹고, 뺏을 거 뺏으면서 살기나 할 것이지.”
“그래도 사람 일은 모르는 거라고 하지 않나. 이것만 있으면 남송으로 가든, 금나라로 가든 떵떵거리고 살 수 있네. 그러면 되는 거 아닌가. 하하하!”
“하하하하하!”
* * *
다음 날 아침, 중방에 신료들이 모였다.
“앞으로 닷새 후에 정주공의 혼례가 황궁에서 치러진다고 하니, 예부에서는 실수 없이 준비하도록 하라.”
“예. 합하.”
“병부상서.”
“예. 합하.”
“모든 군사들에게 경번갑을 항시 착용케 하라. 더불어 군기감에 전하여 군사들의 경번갑을 예비용으로 제조해 나누어 주도록 하라.”
“예.”
신료들은 이의방의 말에 고개를 숙이며 답하였다.
이의방은 군사들이 경번갑을 입지 않아, 이런 불상사가 났다고 생각 하였다.
경번갑을 입고 있었다면 쉽게 죽지 않았을 것이니 말이다.
“합하, 신 병부시랑 아뢰옵니다. 여름철이 다가오고 있어 날이 매우 덥사옵니다. 군사들에게 경번갑을 입힌다면 다들 더위에 못 이겨 쓰러질 것이옵니다. 그 방비책 또한 필요하다 사료 되옵니다.”
“그래. 그 일도 병부에서 고안하여 말하시오.”
“예. 합하.”
병부시랑은 고개를 숙이었다.
“합하, 금오위 대장군 송경보 아뢰옵니다. 연검을 가지고 다니던 무사들을 조사하였으나, 이번 일과 관련이 없는 이들이 태반이옵니다. 도적 떼들이 은병을 보관해놓았을 수도 있사오니, 은병에 관하여 벽란도 주위와 객관 등을 수색할까 하옵니다.”
“앞으로 그런 일은 따로 보고하지 말고, 금오위에서 알아서 하게. 그나저나… 은병이 거기서 다 같은데 객관을 뒤지면 나오겠나? 나오더라도 똑같은 은병인데 그걸 가지고 있다고 모두 잡아들일 수는 없잖아. 다른 방법 찾아보게.”
“예. 합하.”
중방에서는 현수의 혼삿날과 은병 탈취사건에 대한 의논을 이어갔다.
“합하,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일이 일인 만큼 혼삿날을 잠시 미루는 것이 어떻겠사옵니까?”
예부 상서 유응규가 말하였다.
“예부 상서 유응규의 말이 일리가 있다 보옵니다.”
좌복야 문극겸, 우복야 이준의가 말하였다.
“참지정사도 같은 생각이오?”
“예. 합하.”
“다른 분들의 뜻은 어떻소이까?”
“신들 또한 같은 생각이옵니다.”
모든 신료들은 답하였다.
“중방에서 의견이 만장일치로 나온 것이니, 폐하께 전달하도록 하겠소이다.”
“예. 합하.”
이의방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고려가 안정되니, 점점 몹쓸 놈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어떻게 국가의 세금을 탈취를 하고, 관리를 죽일 수 있단 말이오.”
“이번 일에 대해서는 절대 묵고해서 아니 됩니다. 이게 조정에 도전하는 행위가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예. 우복야의 말씀이 백번 옳으신 말씀이옵니다.”
“형부상서, 형부에서는 어떻게 일을 처리 할 것이오? 금오위가 나섰으니, 형부 또한 그의 합당하는 판결을 내야 할 것이 아니요.”
형부상서 최인은 참지정사의 물음에 답하였다.
“참형에 처해야지요.”
“참형? 너무 약한 거 아니오?”
응양군 상장군 이의민이 말하였다.
“…약하다니요?”
“나라에 도전한 일입니다. 겨우 참형으로 되겠소이까. 다리의 힘줄을 잘라 다시는 이와 같은 일을 범하지 못하게 해야 할 것이 아니요.”
“하지만 고려의 법에 의하면, 세금 탈취 금액에 따라 그 처벌하는 경중이 다릅니다.”
“그놈의 법! 참형 가지고는 아니 되오! 최소한 삼족은 멸해야지!”
이의민은 씩씩 거리며 말하였다.
“자, 진정하시게. 상장군. 이번일은 합하께서 금오위에게 조사하라 하였으니, 차후에 판결을 내릴 때 다시 의논을 하는 게 좋을 듯싶소이다.”
좌복야의 말에 이의민은 시선을 돌렸다.
“금오위 대장군, 우리 어사대에서도 도움을 드릴 테니, 언제든지 인력이 필요하시면 말씀하시오.”
“예. 알겠습니다.”
“처벌에 관한 것은 중서문하성에서 논의를 하여 합하께 아룁시다.”
“이번 인사에 대해서는 어찌 결론이 났소이까?”
좌복야 문극겸이 물었다.
“이부에서 합당한 능력이 되는 이들을 각 지방의 현령과 안찰사로 보냈습니다. 전 현령과 안찰사들 역시 다른 지방으로 보냈으니, 심려치 마십시오.”
좌복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라의 재정과 살림이 안정이 되었으니… 우리도 좀 더 분발해야 할 듯싶소.”
“지당하신 말씀 이십니다. 우리가 더 분발해야 합하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리지요.”
신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 * *
한편 이의방은 황제를 알현하고 있었다.
황제는 다행히 예전과 같지 않았다.
지난번 일로 인해서 충격을 받고 반성을 한 듯했다.
더군다나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했었다.
이의방이 이제 무슨 짓을 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폐하, 전중감과 위위경 자리를 거두어 주시기를 청하옵니다.”
“상국, 그게 무슨 말이오?”
황제는 깜짝 놀랐다.
전중시 전중감, 위위시 위위경의 자리를 거두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