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천하의 주인-90화 (90/159)

090화

일주일 후.

서북면 고려군의 진영에 수천의 이르는 군영이 설치되었다.

목책으로 군영주위를 에워싸고 곳곳에 망루를 설치한 곳에 전령이 당도하였다.

“유수, 병마사! 개경에서 합하의 전령이 당도하였사옵니다!”

“들라!”

막장을 들추고 전령이 안으로 들어섰다.

“합하의 명령서라 하였느냐?”

“예. 합하께서 보내신 명령서이옵니다.”

전령은 유수에게 곧장 명령서를 건넸다.

명령서를 받아든 유수는 끈을 풀고서 두루마리를 펼쳐 보았다.

[금나라에서 원군을 요청하였다. 나는 그 요청을 받아들였다. 우리 군사들의 희생은 최대한 막아야 한다. 그러니 금에서 선봉으로 나아가라 하면 최대한 피해야 할 것이다. 또한 금나라에서 우리가 요구하는 조건을 다 들어주기로 하였으니, 군량도 보급도 준비할 필요 없다. 내 명이 당도하는 즉시 금나라로 원군으로 가면 된다.]

“그래… 금나라에서 소식도 없이 온 게 원군 때문이었군.”

“무슨 명령서이길래 그러시오.”

“보시게.”

서경 유수 조위총은 명령서를 우학유에게 보여주었고, 우학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집결해야겠네요.”

“최소한 방어병력은 남겨두고 출병할 준비를 해야겠소. 전령은 수고했다. 쉬었다가 돌아가라.”

“예! 장군!”

전령은 다시 밖으로 나갔다.

“지금 모든 중랑장을 소집해라.”

“예. 장군.”

“금나라에서 진짜 남송이랑 붙으려나 봅니다.”

“예. 오고 가는 전령들을 통해서 듣긴 했지만… 진짜일 줄은…….”

서경 유수 조위총은 꽤 심각한 표정이었다.

“합하의 말씀도 그렇지 않소. 금나라는 상국인데… 상국이 출전을 하라 하면 이거 어찌해야 할지.”

“그건 나중에 생각합시다. 어찌 되었든 원군으로 가는 것이니, 금나라가 강요는 못 할 것입니다. 어차피 남송이 공격해오는 것에 수성전을 펼쳐야 하니… 오히려 그게 문제지요.”

“수성전도 수성전이지만, 전면전에 들어간다면 어찌하겠소.”

“우리 병력은 태반이 보병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만약 전면전이라면 선봉이 아닌, 후방에 서는 게 맞지요. 게다가 우리는 금나라의 지형을 모릅니다. 그렇기에 선봉을 세우려 하여도 쉽게 선봉을 내어주지 않을 수도 있을 거요.”

“음… 그럴 수도 있겠군.”

조위총은 고개를 끄덕였다.

“장군, 중랑장들이옵니다.”

“들라!”

막장이 들춰지며 수십여 명의 중랑장들이 안으로 들어섰다.

“지금부터 들어라. 각 군을 집결시키고, 거란족을 토벌한 장소에는 방어할 수 있는 만큼의 병력을 두고 본영으로 모두 집결하라 전령을 띄우도록!”

“예! 유수!”

중랑장들은 곧장 다시 밖으로 나갔다.

* * *

호부의 관리들과 군사들이 천왕문을 지나 절 안으로 들어오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주지가 문 앞에 서 있었다.

호부 관리는 주지에게 다가가 합장하며 인사하였다.

“호부녹사 이현운이라 합니다. 세금 거두러 왔습니다.”

호부녹사가 신표를 보여주자, 주지는 미소를 지으며 세금으로 낼 소은병을 담은 함을 건넸다.

“여기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스님.”

녹사는 미소를 지으며 건네주는 함을 받았다.

함을 열어보며 얼추 세어보고는 다시 함을 닫아 교위에게 건네고는 장부를 꺼내었다.

“매번 감사하옵니다.”

“아닙니다. 나라에서 하시는 일인데 당연히 내야지요.”

호부 녹사 이현운은 합장하며 인사를 하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살펴 가십시오.”

주지도 녹사가 가는 걸 보고는 몸을 돌아섰다.

* * *

수레에 가득 실은 소은병 함들을 가지고 호부로 가는 길이었다.

개국사는 개경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라, 마음 편하게 가고 있었다.

“수레를 멈추어라!”

그때 수십여 명의 복면을 쓴 도적들이 나타났다.

“네 이놈들! 썩 비키지 못할까! 감히 대낮에 이런 짓을 하다니… 하늘이 무섭지도 않느냐!”

“안 무서운데. 제 배 채우자고, 이의방이 가져오라고 시킨 게 아니냐.”

“뭐, 뭐라! 닥쳐라! 이건 나라에서 거둔 세금이다. 당장 썩 꺼지지 못할까!”

군사들은 빙 둘러싸며 수레를 보호했고, 도적들을 노려보았다.

“물러가라. 물러간다면 너희들의 죄는 묻지 않을 것이다!”

호부 녹사의 말에도 도적들은 물러갈 생각이 없었다.

도적들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검을 뽑아 군사들에게 달려갔다.

병장기들이 서로 맞부딪쳤다.

도적들은 날랜 몸으로 군사들을 발로 걷어차고서 검으로 베어 나갔다.

십 수 명의 군사들은 속수무책 당하였고, 결국에는 도적들의 검이 호부 녹사의 목에 겨누어졌다.

“이놈들… 합하가 두렵지 않으냐!”

“도둑놈이 도둑놈 걸 가져가는 것이다. 하하하.”

도적은 웃으며 그대로 녹사의 목을 그어버렸다.

“커헉!”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녹사는 자신의 목을 부여잡고서 쓰러졌고, 군사들과 녹사의 피로 땅을 적시었다.

“빨리 챙겨가자.”

복면을 쓴 도적의 말에 수십여 명의 도적들이 함을 하나씩 챙겨서는 곧장 사라졌다.

개경 코앞에서 벌어진 참사였다.

* * *

이의방은 태후 전에 들어있었다.

정주공의 혼사 문제 때문이었다.

태후는 많은 재물을 이의방에게 건넸다.

“태후마마, 어찌 이걸…….”

“내가 정주공에게 주는 것인데… 이 상국이 좀 대신 가져다주겠소?”

“태후마마, 정주공을 직접 부르시면 되지 않사옵니까?”

이의방은 활짝 웃으며 말하였다.

“젊은 사람들끼리 있는데 늙은이가 산통 깨는 듯싶어 이리하는 것이오. 가져다주기 뭐하면… 내 사람을 시켜 보내겠네.”

“아니옵니다. 태후마마. 신이 가져가겠사옵니다. 혼삿날은 정하셨사옵니까?”

“아, 내 그 이야기를 하려고 이 상국을 부른 것이네. 앞으로 닷새 후 황궁에서 진행할 것이네.”

“그리 준비하도록 하겠사옵니다.”

이의방은 고개를 숙이며 말하였다.

“합하! 급보(急報)이옵니다!”

밖에서 들리는 부장의 목소리에 이의방은 깜짝 놀랐다.

“상국, 어서 가보시오.”

“송구하옵니다. 태후마마.”

이의방은 허리를 숙이며 인사하고는 천천히 뒤로 물러나갔다.

덜컹.

방문이 열리면서 이의방이 급히 계단을 내려왔다.

“무슨 일이냐. 무슨 일이길래 태후 전까지 온 게야.”

“합하, 개국사에서 세금을 걷던 관리와 군사들이 모두 죽었사옵니다.”

“뭐, 뭐?”

“은병을 노리던 도적 떼에게 당했다고 하옵니다.”

이의방은 깜짝 놀랐다.

“그게 사실이냐?”

“예. 합하.”

“…가자.”

이의방은 부장들을 대동하며 중방으로 향하였다.

이의방이 중방으로 들어서자, 신료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 앉게.”

이의방은 자리로 가서 앉자마자 명을 내렸다.

“들으라.”

“예. 합하.”

“이번 일은 결코 넘어갈 수 없는 일이다. 나라의 세금을 탈취하고 관리와 군사들을 죽인 것은 대역죄로 다스릴 것이다. 또한, 이번 일을 낱낱이 조사하여 어찌 된 영문인지 반드시 밝혀내도록 해야할 것이다. 살해당한 호부 녹사와 군사들은 나랏일을 하다 죽은 것이니, 예부에서 장례를 잘 치러주도록.”

“예. 합하.”

“금오위 대장군은 나를 따르라.”

“예. 합하.”

이의방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대장군도 함께 밖으로 나갔다.

“시신들을 직접 봐야겠다.”

“예? 하, 합하.”

금오위 대장군은 깜짝 놀랐다.

“합하, 이번 일은 금오위에 맡기시옵소서.”

“아니야. 내가 직접 움직이는 게 나을 듯해.”

“합하, 부디 금오위를 믿어 주시옵소서.”

“도적놈들 잡는데 내가 나서서 잡아야 훗날에도 이런 일이 없을 것이 아닌가.”

이의방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잡아서 어육을 내든 찢어 죽이든 할 것이다. 감히 나랏돈을 훔치다니… 제 명에 못 살게 해줄 것이다.”

이의방은 금오위 대장군과 함께 시체들이 있는 곳으로 향하였다.

* * *

이의방이 시체들을 살피며 손을 가져다 데려 하자, 금오위 대장군이 그의 손목을 부여잡았다.

“뭐 하는 짓이냐.”

“합하, 시신에 손을 대시다니요. 제가 하겠습니다.”

여기까지 온 것도 내키지 않았던 대장군이었다.

“괜찮다. 나랏일 하다가 험히 간 신료와 군사들이다. 내 손으로 거두어 주지도 못하였는데 이리 험히 갔으니… 내가 직접 보는 게 맞아.”

이의방의 말에 금오위 대장군 송경보는 고개를 숙이며 손목을 잡던 손을 놓았다.

이의방은 자신의 손으로 시신의 옷 매듭을 풀었다.

상흔을 직접 살피고는 다른 군사들의 시체 역시 매듭을 풀어서 살피었다.

“자네. 저 시신과 이 시신의 상흔을 한번 보게.”

“예.”

금오위 대장군도 시키는 대로 상흔을 살폈다.

“…어떤가?”

“모두 똑같습니다.”

“그리고.”

“군영의 검이 아닙니다.”

“잘 보았네.”

이의방은 다른 시신들도 모두 살피었다.

역시 같은 상흔들이었다.

찔리고 베인 부분이 달랐지만, 검에 베인 자국은 숨길 수 없었다.

“이건 절대 군영 검이 아니야. 찌르는 건 깊게 찌르지만, 베인 곳은 앓게 베였어. 군영 검은 벨 때도 정확히 깊게 베이지 않는가.”

“그렇습니다. 합하. 한 손으로 베어버린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나오지는 않습니다. 합하께서도 아시다시피, 군영에서 쓰는 검과 도는 매우 다릅니다. 호신용 검이나 도는 대부분 한 손으로 만들어져 있지만, 군영에서 쓰는 건 두 손으로 잡을 수 있습니다. 두 손으로 잡고 베고 찌르면 이런 상처는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베고 찌르기로 끝내려 한다면 예사 솜씨가 아니야… 누구 소행일까?”

시신들의 검상은 벨 때는 가볍게 베였고, 찌를 때에는 깊게 찔러 넣어 관통시켰다.

심지어 급소 부분은 정확히 찔러 깔끔하게 죽였다.

“갑주를 입었던 군사들을 봐 보게. 갑옷 덕에 얇게 베이고 겉에는 피가 살짝 묻어있지.”

“예. 군영 검이라면 절대 이렇게는 베지 못합니다. 군영 검이면 이 갑옷을 찢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이 상흔은 반복적인 훈련되어있는 군사들의 솜씨는 아닙니다.”

이의방은 고개를 끄덕였다.

훈련된 군사들의 솜씨라면 검으로 내려치는 힘과 베어지는 것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단번에 죽일 수 있었다.

하지만 경번갑이라면 달랐다.

창, 도끼, 둔기가 아닌 이상, 검으로 경번갑을 벤다고 한들 상처 하나는 내지 못할 것이었다.

“어찌 보는가?”

“소장도 참으로 답답합니다. 시정잡배들이나 사병… 아니, 고려 전역을 떠도는 칼잡이들도 이렇게 벨 수 있을 만한 이는 손에 꼽힐 것입니다.”

“혹시 청혈단이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예. 어찌 모르겠사옵니까. 본래 금나라 장수들을 암살하려는 집단 아니었습니까.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놈들이라 들었습니다.”

이의방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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