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8화
그날 저녁.
이의방은 태자와 태자비를 찾아왔다.
“태자 전하, 노여움을 거두십시오.”
“장인, 저는 이 황궁이 싫습니다. 폐하께서 저러고 계시는 것도 보고 싶지 않습니다.”
“참으세요. 폐하께서 저리 계시는 게 하루 이틀이 아니지 않습니까.”
“되었습니다. 저는 태자 자리에 물러나겠습니다.”
“태자 전하!”
태자는 시선을 돌리었다.
“곧 좋은 날도 있을 것입니다. 태자 전하마저 이러시면 어찌하옵니까. 그럼 이리하시지요. 태자비 마마와 잠시 출타라도 하셔서 바람 좀 쐬고 오시옵소서. 그동안 황궁에만 너무 오래 계시지 않으셨사옵니까. 잠시라도 나갔다 오시면 괜찮아지실 것이옵니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태자비의 말에 이의방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의방은 태자와 태자비에게 인사를 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 * *
한바탕 난리가 났다.
태후, 태비 역시 소식을 듣고서 한숨을 내쉬었다.
황제의 무책임한 행동 때문에 말이다.
“어찌합니까?”
“어찌하긴요. 이제 지칩니다. 지쳐요.”
황제가 저런 행동을 계속하니, 태후마저 포기 직전이었다.
“차라리… 황제가 물러나는 게 좋을 수도 있겠습니다.”
“마마!”
황실 내에서는 황제 때문에 불화가 생긴 지 오래였다.
이제 그 감정이 깊어질 만큼 깊어진 것이다.
“익양후가 아니라, 대녕후를 황제로 삼았다면… 황실은 안정적이지 않았을까… 생각이 듭니다.”
“마마, 대녕후는 정변이 일어나기도 전에 죽었습니다. 어찌 그리 미련을 가지시옵니까?”
“뭐가 그리 급하다고 갔는지…….”
태후는 오늘따라 대녕후가 보고 싶은지 두 눈에 눈물이 맺혔다.
* * *
중방에 이의방 홀로 앉아 있었다.
황실의 불화로 인해, 황실이 예전만치 못하다는 것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이의방이었다.
그리고 그런 상황을 방치한 결과 끝내 이런 상황까지 왔다.
‘어찌하면 좋을까. 나라의 내정은 안정이 되었으나, 자칫하다가는 태자가 다칠 것인데…….’
지금 상황에서는 황제보다 태자가 우선인 이의방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이 둘을 웬만하면 떼어 놓아야 하였다.
‘황제의 말처럼 폐위하고… 훗날을 생각해야 하는 건가?’
이의방은 한숨을 내쉬며 이마에 손을 짚었다.
“합하, 추밀원 부사께서 알현하기를 청하옵니다.”
“들라.”
덜컹.
방문이 열리며 추밀원부사 문장필이 안으로 들어서 고개를 숙이었다.
“합하, 태자비 전하와 태자비 마마께서 출궁하셨사옵니다.”
“그래. 누가 두 분을 보좌하느냐?”
“응양군 장군 허승과 장군 김광립이옵니다.”
“…그래? 응양군이 갔어?”
“예. 합하.”
이의방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양군이면 믿을만하지. 그래. 잘했네. 두 분께서는 어디로 가신다고 하던가?”
“두 분께서는 대부인 마님을 뵌 뒤에 동경으로 가신다고 하시옵니다.”
“동경? 하하하. 그래, 동경 좋지.”
추밀원부사 문장필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었다.
“추밀원부사.”
“예. 합하.”
“황실 내부의 일이 어찌 돌아가는지 자주 내게 이야기를 좀 해주게.”
“그리하겠사옵니다. 합하.”
문장필은 밖으로 물러나가자, 이의방은 지도를 펼쳐 보았다.
“흥화진은 병부에서 추천한 김순, 사량주를 보내었고… 이제는… 함경도에 보내야 할 터인데.”
이의방은 함경도로 누구를 보낼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함경에는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동경에는 이의민, 남경에는 서희만, 안변도호부사 이거, 안서도호부사 김현이라…….”
이들 중에는 함경도로 보낼 사람은 딱히 없었다.
도호부도 중요한 곳이라, 당장 함경도로 보낼 수는 없었다.
다른 이를 찾아야 했다.
* * *
상장군들이 부재중인 탓에 다른 상장군들이 임시로 군을 지휘하였다.
이의민, 돈장을 비롯해 장수들이 자리를 비웠으니 말이다.
다른 장수들도 마찬가지였다.
좌우위, 신호위, 흥위위, 감문위, 천우위, 금오위에도 상장군들을 재배치해야만 하였다.
그동안 각 상장군은 6위의 모든 군을 지휘하고 있어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정리를 해야만 하였다.
이미 이의방은 전령을 띄어 동경에 주둔하고 있는 7령의 좌우위 군사와 이의민을 올라오라 명을 내렸다.
이의민은 너무 오랫동안 동경에 가 있었으니 부를 때가 되었다.
“병부상서, 받아 적으라.”
“예. 합하.”
“좌우위 이영령, 신호위 박존위, 흥위위 돈장, 감문위 최원호, 천우위 최숙청, 금오위 우학유… 이 여섯 명을 상장군으로 명하고, 현 6위에 속해있던 상장군들은 병부에서 알맞은 자리를 찾아서 올리게.”
“예. 합하.”
병부상서 이문저는 답하였다.
현직 상장군들은 임시 직할로 맡은 상장군들이기에 언제든지 상장군 자리에서 떨어져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리고… 이부상서.”
“예. 합하.”
“문신들도 인사이동을 할 때가 되었다고 보는데… 어찌 생각하나?”
“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고을 수령으로 보낸 관리부터 시작해서, 안찰사에 이르기까지 모두 인사이동을 해야 하옵니다. 개경으로 불러들일 자와 지방으로 보낼 자 역시 가려야 합니다. 더불어 전의감 역시 인사이동이 필요하옵니다.”
“그래? 그럼 대부분은 이부상서가 이부에서 처리하고, 의관들 처리는 전의감에서 해서 올리도록 하시오.”
“예. 합하.”
* * *
며칠 후, 송악산 자락에 사병들을 대동한 장수들이 한자리에 모여들었다.
그중에는 자제들도 데리고 나온 장수들도 있었다.
“최 대장군, 감문위 대장군에서 상장군으로 승차한다던데… 정말 축하하오.”
“고맙사옵니다. 상장군.”
최원호는 이영령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하였다.
“저 아이들이 대장군의 자제요?”
“예. 그러하옵니다. 상장군.”
“참으로 늠름하게 생겼습니다. 하하하.”
“고맙습니다. 상장군.”
최원호는 흐뭇하게 미소를 지으며 한쪽에서 활의 시위를 당기고 있는 두 아들을 바라보았다.
“저기 합하께서 오시는군.”
이의방이 사병을 이끌고, 정주공 유현수와 함께 오는 게 보였다.
수백의 달하는 사병들.
이의방은 멀리 보이는 장수들에게 손을 올리며 인사하였다.
“합하를 뵈옵니다!”
“먼저들 와있었는가.”
“예! 합하!”
수십여 명의 장수들은 답하였다.
“젊은 청년들은 자네 자식들이 아닌가.”
“그러하옵니다. 합하. 이번 강무장에서 합하께 인사를 드리고 싶어 데려왔사옵니다.”
“그래, 그래. 아주 대장부답게 컸구먼! 대장부야!”
이의방은 흐뭇하게 청년들을 바라보았다.
“조만간 무과가 있을 것이다. 너희들 모두 응시할 것이냐?”
“예! 합하!”
“하하하, 대 고려국의 사내라면 문신보다는 무인이 제격이지! 너희 모두 네 아비의 뒤를 이어, 자랑스러운 대 고려국의 장수가 되어야 한다!”
“예! 합하!”
청년들의 외침에 이의방은 미소를 지었다.
“너도 한마디 해주거라.”
“아, 예.”
현수는 아이들을 보며 말하였다.
“무인이 되려면 공부도 열심히 하고 무예도 열심히 해야 한다. 그래야 무과에서 장원(壯元)을 할 것이니 말이다. 알겠느냐?”
“명심하겠사옵니다.”
청년들은 현수의 말에 고개를 숙이며 답하였다.
“자, 슬슬 시작해보세!”
“예!”
장수들은 곧장 말 위에 올라탔다.
자제들도 활을 허리춤에 찬 뒤, 말 위에 올라탔다.
“지영아.”
“예. 합하.”
“몰이꾼을 준비하라!”
“예! 몰이꾼을 준비하라!”
박지영은 소리치면서 자신의 휘하들에게 명을 내렸다.
이에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이의방과 장수들은 사냥 준비에 돌입하였다.
북, 꽹과리, 징을 치며 이의방의 사병들이 몰이하였다.
장수들은 말을 달리며 곳곳에서 튀어나오는 날짐승들을 활을 쏘며 잡아갔다.
이의방 역시 짐승을 잡았고, 사병들은 잡은 짐승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사슴, 노루, 꿩, 멧돼지 할 거 없이 계속 잡아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잡은 짐승들로 술자리를 마련하였다.
장수들의 자제들은 미리 돌려보내었고, 이의방과 장수들은 송악산에서 산짐승 요리와 함께 술을 곁들이며 마시고 먹고 있었다.
“이 꿩 요리 맛이 아주 일품이야! 하하하!”
“그렇사옵니다.”
“정주공, 혼사 준비는 잘 되어 가십니까?”
“아, 예! 대부인 마님께서 신경을 많이 써주고 계십니다.”
“감축드립니다! 혼삿날 저희들은 꼭 부르셔야 합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하하하!”
현수는 크게 웃었다.
자신의 혼사 준비는 조씨와 임씨가 아주 신경 써서 해주고 있다.
임씨는 정주로 미리 가서 준비 해주고 있었고, 조씨 역시 현수의 저택을 관리해주고 있었다.
“내 부인들이 알아서 하겠지. 우리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하하하!”
“예. 두 마님들께서 아주 잘 해주실 것이옵니다.”
“그럼. 누가 장가가는 날인데. 하하하!”
이의방은 크게 웃었다.
“정말 잘된 일이옵니다. 함경도를 되찾자마자 혼사를 치르시다니… 정말 복이 많으십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여진족 놈들을 쓸어버리고, 그대로 북상을 하였으니 말입니다! 하하하하!”
“두 공주님의 미색이 대단하시다던데… 정말 부럽습니다!”
“하하하하!”
“최 상장군, 부러우면 또 장가 가시면 됩니다.”
“하하하하!”
현수는 상장군들의 말에 미소를 지으며 술을 들이켰다.
“내 긴히 물어볼 말이 있는데… 자네들 태자 전하를 어찌 생각하는가?”
“태자 전하께서는 올곧은 분이 아니시옵니까? 폐하께서 잘못된 행동을 하시려 할 때면 매번 간언(諫言)하시니 말입니다.”
“그런 태자 전하가 폐위된다면… 자네들은 무슨 생각이 드나?”
이의방의 말에 장수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는지 아무도 나서서 입을 열지 않았다.
“왜들 말이 없어. 황제 폐하가 지금 태자 전하를 폐위시키겠다는데 내가 자네들 의견을 한번 들어보려 하네. 기탄없이 이야기해보게.”
“합하… 어찌 이러시옵니까?”
현수가 말하였다.
“넌 나서지 마라.”
이의방의 말에 현수는 그냥 입 다물고 술잔에 술을 부어서 마셨다.
“그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옵니다.”
최숙청이 말하였다.
“그렇지. 말이 안 되는 일이지. 그런데 어찌하여 중신 놈들이든 무신 놈들이든, 단 한 놈도 간언하는 놈들이 없어. 이게 말이 되는가!”
콰앙!
이의방은 상을 내리쳤다.
황제가 태자를 폐위를 시킨다며 난리를 쳤는데도 제대로 황제에게 가서 간언하는 이가 딱 두 사람뿐이었다.
좌복야, 우복야 이 둘만이 황제를 말렸다.
그 둘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