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7화
사신들이 돌아간 지 일주일이 흘렀다.
현수는 태후 전에서 부름을 받아 태후 전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시오. 정주공. 함경도에 일은 내 들어서 잘 알고 있소이다. 정말 큰 공을 세우셨소.”
“어인말씀 이시옵니까. 태후마마.”
“이보시오, 황태비. 한동안 못 본 사이에 정주공이 지난번보다 더 늠름해진 것 같지 않소?”
태후는 미소를 지으며 태비에게 묻자, 태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태후마마. 지난번에 보았을 때보다 더 늠름해졌사옵니다.”
“황공하옵니다. 태비마마.”
현수는 정중히 허리를 숙이며 말하였다.
“어찌 되었든… 정주공이 황실의 사위가 되어 천만다행히라 생각합니다. 그동안 두 공주들에게 많은 혼담이 오갔지만, 황제가 다 나서서 혼사를 물렸습니다. 다 되먹지 못한 놈들이라…….”
태후 또한 마음에 들지 않는 이들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현수는 태후의 말에 미소를 지으며 말을 아끼었다.
“정주공.”
“예. 태비마마.”
“두 공주들에게 좋은 지아비가 되어주길 바라네.”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태비의 간곡한 말에 현수는 다시 한번 허리를 숙이며 답하였다.
“태후마마, 연희궁 공주인 수안궁 공주께서 드셨사옵니다.”
“오, 그래. 어서 들라고 하라.”
덜컹.
방문이 열리면서 두 공주가 안으로 들어섰다.
“어서들 오너라. 오늘따라 더 예쁘구나. 하하하하.”
태후의 말에 두 공주는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태후마마, 두 공주가 정주공이 좋은가 봅니다.”
“그, 그런 게 아니오라…….”
얼굴만큼 고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되었다, 되었어…….”
태비는 공주의 말에 미소를 지으며 말하였다.
현수가 슬쩍 두 공주를 바라보자마자, 두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세상에 저렇게 예뻐도 되는 건가 싶을 정도였다.
“허허허, 정주공이 두 공주의 미색에 반하였나 봅니다. 눈을 떼지를 않네요. 하하하하!”
태후의 말에 현수는 그제야 얼른 정신 차리고서 고개를 숙이었다.
“하하하, 이 늙은이들이 있어서 젊은 사람들이 눈치를 보는 듯합니다. 나가서 차라도 마시면서 이야기나 나누게.”
“아, 예… 태후마마. 하오면 폐하께…….”
“갈 것도 없네.”
“…예?”
황제의 이야기를 하자마자 어느새 노기가 가득한 모습이었다.
“가야지. 폐하를 알현…….”
“알현은 무슨! 태비, 감쌀 것도 없소이다!”
“태후마마.”
태비가 두 공주와 정주공의 눈치를 보며 태후를 말리려 하였다.
“내 말이 틀렸소이까? 허구한 날 술판을 벌이고, 후궁을 가까이하고 있지를 않나… 이 상국이 오죽하면 나한테만 문안을 올리고 황제처소에는 가지도 않겠습니까. 태비도 알지 않소. 내가 이 상국에게 미안할 정도입니다!”
노기로 인하여 얼굴이 붉어진 태후였다.
“태비마마, 그래도 아드님이 아니시옵니까?”
“아들이라고 해도 참으로 용렬하지 않소. 누구는 나라 걱정에 한숨도 못 자고 일하는 데 황제라는 자가 본받기는커녕 저러니… 이렇게 살 거면 차라리 하루빨리 태자에게 양위를 해주었으면 합니다. 양심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쯧쯧쯧.”
태후는 혀를 찼다.
“태후마마, 소신은 이만 물러가 보겠사옵니다.”
“그렇게 하게. 정주공.”
현수가 인사를 하고는 곧장 밖으로 나가자, 두 공주도 태후와 태비에게 인사를 하며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오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완전 가시방석이었다.
“저…….”
뒤에서 들린 공주의 목소리에 현수는 뒤를 돌아봤다.
“예.”
“폐하께…….”
“물론 가야지요. 가야 하고말고요.”
현수는 활짝 웃으며 대전으로 향하였다.
“정주공.”
“예?”
“저… 그러니까…….”
수줍어하면서 말을 거는 공주의 모습에 현수는 미소를 지으며 말하였다.
“나중에 천천히 이야기하시지요,”
“아, 예…….”
연희궁 공주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수안궁 공주 역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공주님들 저에게 무슨 죄라도 지으셨습니까? 어찌 얼굴을 그리 숙이고 계시옵니까?”
“아, 아니옵니다.”
“아닙니다.”
두 공주는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이에 미모가 확연히 드러나자, 현수는 침을 꿀꺽 삼키며 멍하니 두 공주를 바라보았다.
“어찌 그리 보십니까?”
“예뻐서요.”
“예!?”
“…….”
두 공주의 얼굴이 더욱더 붉어지면서 곧장 돌아섰다.
현수는 머리를 긁적이다 웃으며 대전으로 발길을 옮겼다.
두 공주 역시 현수의 뒤를 따라갔다.
대전 앞에 들어서자, 풍악이 울리고 있었다.
“정주공.”
내관이 급히 계단에서 내려와 고래를 숙이었다.
“공주님들과 폐하를 알현하러 왔는데… 아무래도 돌아가는 게 낫겠구먼.”
“하하하하하!”
희희낙락(喜喜樂樂)거리는 목소리가 밖에까지 들렸다.
“이것들아! 짐은 황제라지 않느냐! 하하하!”
“호호호!”
굳이 들여다보지 않아도 안에서는 수많은 후궁이 들어있는 듯하였다.
대전에서의 소리를 들은 공주들의 표정은 영 좋지 않았다.
아버지라는 작자가 저러고 있으니 창피한 듯싶었다.
“하아…….”
절로 한숨이 나오자, 내관도 정말 죄송하다는 표정이었다.
“언제부터 저리 계시는가?”
“아침부터이옵니다.”
내관의 말에 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께서 술이 깨시면 연통을 넣어주겠나?”
“여부가 있겠습니까.”
“부탁하네.”
현수는 몸을 돌려 공주들에게 다가갔다.
“다음에 오는 게 좋겠습니다. 자, 가시지요.”
현수는 두 공주를 데리고서 다른 곳으로 향하였다.
궁궐 내 연못 근처에 자리를 잡은 두 공주와 현수는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연희궁 공주는 정주와 강화도가 어떠한지 매우 궁금해하였고, 수안궁 공주는 함경도가 어떠한지 궁금해했다.
현수는 공주들이 궁금해하는 것을 모두 이야기 해주며 궁금증을 해소해 주었다.
* * *
“뭐라고!?”
황제는 술을 마시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정말 그게 사실이냐!”
“예. 폐하…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을 고하겠사옵니까.”
황제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찌… 어찌 어머니께서는 그런 말씀을 하셨단 말인가! 왜!”
황제의 노여움에 음악 소리는 멈추었다.
후궁들도 옷가지를 단단히 하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용렬한 황제라… 내가 앉아 있어서 지금까지 유지가 되는 걸 아시는 분이! 용렬한 황제라고? 흐하하하! 예! 양위하지요! 양위해드리겠습니다! 하하하하!”
황제는 크게 웃으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박내관!”
“예! 폐하…….”
“태자에게 지금 즉시 양위를 할 것이니, 대소신료들을 모두 들라 하여라!”
“폐하, 어찌 그러하시옵니까?”
“박내관! 못 들었느냐! 어서 들라 하라지 않느냐!”
황제는 분노하였고, 내관은 두 눈을 감으며 어쩔 수 없이 밖으로 나갔다.
“예! 어머니… 어머니의 뜻대로 해드리지요… 허수아비 황제 노릇도 이제 지겨웠는데 아주 잘 되었습니다!”
* * *
콰앙!
“뭐라고!”
이 소식을 들은 이의방은 대노(大怒)하였다.
“술을 얼마나 드신 것이냐!”
“아침부터 드셔서…….”
이의방은 잔뜩 진노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허허, 큰일입니다. 폐하께서 계속 저렇게 술만 드시니…….”
“그러게 말입니다.”
신료들의 걱정이 컸다.
이의방 역시 이러한 황제가 못마땅하였다.
“폐하를 뵈러 갈 것이다!”
이의방은 참다못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중방 밖으로 나갔다.
이에 좌복야, 우복야 역시 이의방의 뒤를 따라 나갔다.
대전에서 불상사가 일어날 수 있으니 말이다.
* * *
“폐하! 명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나는 이미 뜻을 밝혔으니, 태자는 황위에 오를 준비를 하라!”
“폐하!”
“폐하, 부디 노여움을 거두시옵소서.”
이미 대전에서는 태자와 태자비가 무릎을 꿇고 빌고 있었다.
황제는 그 와중에 술만 마시다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비틀거리는 몸을 겨우 지탱하며 태자에게로 옥새(玉璽)를 던졌다.
툭.
“폐하!”
“가져가거라!”
“폐하, 어찌하여… 어찌하여… 제게 이렇게 매몰차게 구시옵니까.”
태자비가 말하였다.
하지만 황제는 그마저도 듣지 않고 그저 술만 마셔대었다.
“폐하, 언제까지 이렇게 사실 것이옵니까?”
“뭐, 뭐라?”
태자도 드디어 뻗칠 대로 뻗친 것인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예! 제가 황제를 하지요!”
“태자마마… 왜 이러시옵니까?”
“오냐. 네놈이 이제야 본성을 드러내는구나!”
태자비는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아니요! 폐하께서 저를 이리 만드신 것입니다. 폐하께서 양위하신다고 하셨으니, 소자가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말입니다. 평생 후궁들과 술에 빠져 사십시오. 저는 황위를 이어 사직을 지키겠습니다.”
황제는 태자의 말에 노기가 가득한 모습을 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장검을 뽑아 들었다.
곧장 태자를 내리치려 하자 태자비가 앞을 막아섰다.
“비켜라!”
“아니 되옵니다. 폐하… 이러시면 아니 되시옵니다.”
“태자비! 비키라 하였다!”
이 모습에 내관들마저 황제를 말리기 시작하였다.
“폐하, 부디 고정하시옵소서!”
“박 내관도 물러서라!”
“폐하, 아니 되시옵니다. 태자 전하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내관뿐만이 아니라, 모든 이들이 황제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쾅!
방문이 거칠게 열리면서 들어온 건 이의방이었다.
“폐하. 그 검을 내리소서.”
이의방의 말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칼을 꽉 움켜쥐는 황제였다.
“폐하! 정녕 피를 보시겠사옵니까!”
이의방의 외침에야 황제는 검을 버리고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술잔에 술을 가득 붓더니 벌컥 마시었다.
“이 상국, 태자를 폐할 것이오.”
“아니, 제가 떠나겠습니다. 제가 떠나서 다신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태자는 벌떡 일어나 대전을 나가려 하였다.
“태자 전하, 이러시면 아니 됩니다.”
이의방은 태자를 말렸다.
하지만 태자는 이미 이런 상황에 진절머리가 나 있었다.
“장인, 미안합니다. 하지만 도저히 보고 있을 수가 없어요.”
태자가 그렇게 외치며 밖으로 나가버리자, 태자비는 자신의 아버지에게 고개를 숙이고는 태자의 뒤를 따라 나갔다.
“폐하, 어찌 이러시옵니까?”
“이 상국, 태자를 폐위시킬 것이니, 그리 아시오.”
“폐하! 정신 차리시오소서!”
이의방은 소리쳤다.
하지만 황제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듣지 않으려는 황제에게 더 이상 말을 해봤자, 소용이 없다는 걸 아는 이의방은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하하하하하!”
황제는 크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