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5화
“더 늠름해졌구나. 참으로 보기가 좋다. 여진족들을 전멸시킨 데 너의 공이 크다 들었다.”
“어찌 저만 공이 있겠습니까. 보좌한 장수들부터 해서 군사를 조련한 장수, 그리고 전투에 임한 장수들 또한 공이 있지요.”
“하하하! 내 너를 함경도로 보낸 게 참으로 잘한 선택이었구나. 그런데… 여진족들을 다 죽일 필요가 있었느냐?”
“예. 죽여야지요. 여진족은 힘이 있을 때는 고개를 치켜세우지만, 힘이 없을 때는 고분고분 말을 잘 듣는 족속이 아니옵니까? 그리하여 다 죽였사옵니다. 그래야지 다시는 고려를 약탈할 생각을 하지 못할 것이옵니다.”
현수의 말에 이의방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말대로다. 네 말대로야. 그렇게 해서라도 다시는 고려를 넘볼 수 없게 해야지.”
“그리고 합하, 함경도는 제가 보기에는 매우 척박한 땅입니다. 그곳에서 세금을 거두기는 많이 어려울 것입니다. 더불어 그곳에 들어갈 금액도 어마어마할 것입니다.”
“그건 각오하고 있다. 조정의 자금으로 함경도를 일으켜 세우는 건 손쉬운 일일 것이다. 그동안, 조정의 자금이 얼마나 많이 모였는지 아느냐? 걱정할 것도 없다.”
“…….”
“더불어 이제 사찰에서도 세금을 내고 있고, 황실에서 그동안 귀족들에게 하사한 토지까지 전부 반환이 되었다. 반환된 그 땅들은 모두 땅 없는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었지. 백성들은 그 땅으로 먹고, 살고… 세금을 낼 것이다. 하하하하.”
이의방은 각 지방과 개경에 있는 사찰에 세금을 매겼다.
지방에서 들어오는 세금에 비례하여 사찰 또한 세금을 내게 한 것이다.
귀법사, 흥왕사는 한 달에 내야 할 세금이 무려 은병으로 환산하면 약 소은병 30개였다.
하지만 소은병 30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황실에서 내리는 재물과 각종 법회 비용 또한 귀족들이 가져다주는 것을 미루어 짐작한다면 소은병 30개면 적은 편이었다.
이의방은 밖으로는 정벌, 안으로는 내정을 안정시키고 있었다.
이에 이의방은 기분 좋게 웃었지만, 현수는 웃지 않았다.
“왜? 안 좋으냐?”
“합하, 합하께서 옳으신 일을 하셨지만… 만약 먼 훗날에 말입니다. 나중에라도 황실의 재산이 없고, 공신들이 많이 나와서 땅을 내려야 하는 데 그 땅이 없다면 어찌하시겠습니까? 다시 몰수한다면 합하께서 이루어진 것들은 그저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것이옵니다.”
“그럼 어쩌자는 게냐?”
“공표(公表)는 하셨습니ᄁᆞ?”
“공표가 왜 필요해. 나라에서 지정한 것인데.”
이의방의 말에 현수는 답답하였다.
“지정만 하면 무엇 합니까. 나중에라도 바꿀 수 있는데. 공표하셔야지요.”
현수의 말에 이의방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말을 듣자하니 맞는 듯싶다. 당장 이부, 호부에 이르러 공표를 하게 하마.”
“예. 합하.”
“하하하, 요즘 들어 지방도 많이 안정적이야. 동경유수로 가 있는 이의민이 잘하고 있는 듯싶다. 더군다나 음서가 아니라 제대로 된 과거를 통해서 관리를 뽑아 수습 기간을 끝내면 비어있는 관으로 보내고 있는데… 관리들이 사소한 것까지 나서며 백성들을 살핀다니 그게 나는 안심이다.”
“관리가 당연히 그리해야지요. 합하에게 맞아 죽지 않으려면 말입니다.”
“뭐? 크하하하하!”
이의방은 크게 웃었다.
“아이고, 현수야. 네 덕에 크게 웃는구나. 그나저나 말이다. 네 혼사 이…….”
“잡아라!”
순간, 밖에서 사병들이 외쳤다.
지붕 위에서 뛰는 소리가 들리자, 이의방은 눈썰미를 찌푸렸다.
“감히 어느 놈이! 내 집을 들어온 것이냐!”
대규모의 사병들이 일시에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지붕에 사다리가 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가 나가보겠사옵니다.”
“오냐. 어느 간 큰놈이 내 집에 들어왔는지 얼굴을 봐야겠다.”
현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이더니, 밖으로 곧장 나갔다.
사병들은 이미 지붕 위에 올라간 상태에서 도망가고 있는 이를 쫓고 있었다.
“죽이지 마라! 합하께서 저놈의 얼굴을 보자 하신다!”
현수가 사병들에게 외쳤다.
양옆으로 지붕으로 올라간 사병들은 크게 에워싸면서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독 안에 든 쥐와 같았다.
사병들은 저택인 뿐만 아니라 밖으로 나가, 넓게 포진(布陣)하였다.
‘내가 왜 도망가야 하지?’
포진된 것을 본 고승윤의 생각이었다.
단지 목숨 걸고 찾아와서 만나려고 한 것인데, 들키자마자 본능적으로 도망을 치고 있었다.
지붕 반대편에서 사병들이 자신을 가로막고 있는 것을 본 고승윤은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그래… 어차피 죽기를 각오하고 온 것이 아닌가.’
고승윤은 미소를 지었다.
사병들이 천천히 다가와서 반항하지 않는 고승윤을 포박하였다.
* * *
얼마 후, 고승윤을 꿇린 사병들이었다.
“이놈 한 놈인가?”
“그러하옵니다. 정주공.”
현수는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네놈은 누구냐. 누구의 사주를 받고 온 것이냐?”
덜컹.
이때 방문이 열리면서 이의방이 검을 들고 나왔다.
“저놈이더냐.”
“예. 지금 막 묻고 있던 차입니다.”
“빌어먹을 놈… 좋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네 놈이 초를 치는구나.”
“나는 황제 폐하의 신하이자, 고려에 사신으로 온 고승윤이오. 내 말을 잠시 들어주시오. 황제 폐하의 전권을 받아 온 사신이란 말이오!”
고승윤이 말을 하자, 이의방은 깜짝 놀랐다.
“지금 이게 어느 나라 말이더냐. 대체 이놈은 누구야!”
“역관을 불러라!”
“예!”
박지영은 속히 움직였고, 이의방과 유현수는 역관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
얼마 후, 박지영이 역관을 데리고 왔다.
“역관이냐?”
“예, 예! 합하!”
“이자가 남송 말을 하는데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구나.”
역관은 포승줄에 묶여있는 이에게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나는 남송의 황제 폐하의 전권을 위임받아 온 사신이오. 이의방 합하를 만나려고 하였으나, 도저히 만날 수 있는 방법이 없어 무례하게도 이렇게 찾아오게 되었소이다.”
고승윤의 말에 역관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의방에게 말하였다.
“뭐라…? 허… 참으로 당돌한 사신이 아닌가. 나를 만나고자 월담을 해?”
“합하, 남송의 사신이니… 그냥 넘어가심이 어떠하옵니까?”
“그래, 그래야겠지. 얼마나 급하면 이렇게라도 나를 찾아왔겠느냐? 이만 풀어주고, 객관으로 돌려보내라.”
“예! 합하!”
박지영은 사신의 오라를 풀어주었다.
“저와 함께 가시지요. 객관까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역관의 말에 고승윤은 고개를 저었다.
“합하, 부디 저희 남송을 도와주시옵소서. 원하시는 건 다 드리겠사옵니다.”
고승윤의 말에 역관은 다시 재차 말하였다.
“합하, 도와 달라고 하옵니다. 원하시는 건 다 드린다… 하옵니다.”
“시간이 많이 늦었으니, 조만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전하라.”
“예. 합하.”
역관은 다시 그렇게 고승윤에게 전하였다.
고승윤은 이렇게 찾아온 것만으로도 무례한 일이라는 걸 알기에 그저 조용히 역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객관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충신이로구나. 목숨을 걸고 내 집까지 온 걸 보면.”
“저런 충심으로 섣불리 흔들리지 마십시오. 이득이 되는 쪽을 선택해야 하옵니다.”
현수의 말에 이의방은 고개를 끄덕였다.
“개경에 오면서 들었나 보구나?”
“예. 합하.”
“그래. 알겠다. 다시 들어가자.”
이의방과 현수는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자리에 앉은 두 사람은 술잔에 술을 채웠다.
“내 남송과 금에 절대 나서지 않겠다 하였지만, 결국엔 이득이 되는 쪽에 움직여야 하는 건가?”
이득이 있더라도 움직이고 싶어 하지 않은 이의방이었다.
“남송이냐, 금이냐… 참으로 골치 아프구나.”
“정녕 선택하기 어려우십니까?”
“생각해봐라. 군사를 파견하면 우리 군사들이 피를 흘리는 꼴이 아니냐. 나라의 군대가 다른 나라로 인해서 흘린다는 게 나는 그게 정말 싫어.”
“합하, 제가 함경도에 있을 때 동안 남송에 대한 소식은 들은 게 없습니까?”
“있지. 양양성에 집결해서 금나라를 공격한다는 것 말이다.”
“내부 사정은요?”
“…내부 사정? 나는 모르지. 내가 거기까지 알아야 하느냐?”
“그래야 결단하기 쉽지 않겠사옵니까. 남송이 왜 굳이 우리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인지 말입니다.”
이의방은 미처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하였다.
“그래. 그것부터 알아봐야겠구나.”
이의방은 술잔을 들더니, 다시 술을 들이켰다.
“아, 합하. 제 혼사는 언제 합니까?”
“날을 잡아야 하는데 황실에서 답을 아직 안 주는구나.”
“…예?”
“내 지난번에 신붓감 얘기를 한번 태후께 여쭈어보았는데 아주 좋아하시더구나,”
오래전 일이 떠올랐다.
태후와 태비가 있을 때 혼담이 잠깐 농담처럼 흘러갔었다.
그런데 진짜 공주와 혼인을 한다니.
현수는 어안이 벙벙했다.
“진짜입니까?”
“진짜지. 가짜로 하냐?”
“아, 예…….”
“흐하하하!”
옆에 있던 무비가 크게 웃었다.
“정주공이 아직 총각이라 그런지 너무 재미있습니다.”
“하하하하! 부인, 내 아들 같은 놈은 넘보지 마시오!”
이의방은 무비의 말에 크게 웃었다.
“아무튼 네가 돌아왔으니, 태후전에 기별을 넣으마.”
“그럼 누구와 혼례를…….”
“그래… 이야기는 해주어야겠지. 연희궁 공주와 수안궁 공주 두 분이다.”
“예?”
“왜? 싫으냐?”
“자, 잠깐만요. 혼례를 두 분이랑 한다니요?”
“황실에서 그리 결정하였다. 처음엔 나도 좀 그렇긴 하였지만… 어찌 되었든 황실의 공주 두 분과 혼례를 치른다면 네 앞길이 탄탄대로일 것이다.”
“…….”
현수의 입가에 미소가 실룩 실룩 올라왔다.
한 번에 두 여자와 결혼 한다는 게 정상적인지는 않지만 왠지 모르게 좋았다.
“이놈 보게. 그리 좋으냐?”
“예! 하하하!”
“하하하하!”
세 사람은 함께 웃었다.
* * *
다음 날 아침.
이의방은 중방에서 사신 문제를 두고 의논에 들어갔다.
“남송은 태상황제가 정무에 관여하고 있사옵고, 주화파 대신들과 전쟁을 반대하는 입장이지요.”
예부 상서 유응규가 말하였다.
“예. 그렇습니다. 남송이 전쟁 준비를 하고 있지만, 후방은 믿을 수 없는 상황이지요. 주전파로 이루어진 정벌군과 주화파가 남은 후방이 찜찜할 테니 말입니다.”
이의방은 그 말들에 귀를 기울였다.
“잠깐만.”
“예. 합하.”
“그럼 우리가 피를 안 흘릴 방법이 있을까?”
“예. 합하. 금나라 편에 서면 됩니다. 금나라 편에 서게 된다면 남송의 군대는 자연스럽게 해산될 것이니까요.”
좌복야 문극겸이 이야기하였다.
이의방이 오니, 답이 술술 풀려가고 있었다.
“만약 남송이 해산하지 않으면?”
“저희는 조건을 걸어야지요. 저들이 전쟁하든 안 하든 우리는 이 핑계 저 핑계대면서 피해야지요.”
“흐음…….”
이의방은 작은 신음을 토해내었다.
“사신들을 봐야겠다. 준비하게.”
“예. 합하.”
예부 상서 유응규가 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