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1화
“정주 공, 여긴 조용합니다.”
“너무 조용해도 좋을 거 없소. 장성을 넘어선 이 순간부터 여기는 전쟁터입니다. 병마사가 길을 잘 닦아 놓았다 하더라도… 안심해서는 안 되오.”
곳곳을 살피면서 보는데 웬만한 나무들은 모두 뽑혀 있었다.
산길을 지나가며 시야를 가리는 나무들은 모두 뽑은 것이다.
“산세가 대단합니다.”
“예… 그래도 이 산도 이제 우리 고려의 산이 될 것이 아닌가. 그때 되면 이산을 갈아엎든지 해야지… 안 그런가, 천 장군.”
“하하하, 그거 재미있겠습니다.”
* * *
여진족들에게 노출되지 않고, 무사히 산을 넘어왔다.
산에서 내려와 적당한 위치에 군영을 방진 형태로 진을 치고 목책으로 방어를 강화하였다.
혹시 몰라, 뒤에는 석포와 기름 항아리를 준비시켰고 항아리 위에 짚단을 올리고 염초를 올려두었다.
여진족이 공격을 감행해오면 석포로 저지하기 위함이었다.
그 뒤로는 노포를 준비시켰다.
“정주공, 준비를 모두 마쳤습니다.”
“고생했네. 이제야 적들도 움직이는군.”
“이제 보병들을 전면에 배치하죠. 보병이 얼마나 기병에게 무서운 존재인지 저놈들에게 보여주잔 말입니다.”
“그래. 제대로 보여주자고.”
정균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장 움직였다.
곧 홍중방이 기병을 이끌고 도착하였다.
“정주공.”
“어서 오시오.”
홍중방은 고개를 숙였다.
“어찌 되고 있습니까?”
“어찌 되기는… 오자마자 무식하게 공격하려는 모양입니다. 한방에 승부를 보겠다… 이건가?”
현수는 피식 웃었다.
“홍 대장군.”
“예. 정주공.”
“저놈들 후방을 쳐야겠는데… 저놈들이 쳐놓은 저 군영을 한번 휘저어 보겠소?”
“맡겨만 주시옵소서. 소장이 군영 자체를 불바다로 만들어 버리겠사옵니다.”
“하하하!”
현수가 만족스러운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홍중방은 곧 자리를 떴다.
군사들이 단창과 방패를 들고서는 계속 움직였고, 장수들의 지휘 아래 점차 자리를 잡아갔다.
여진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일제히 공격을 감행할 준비를 마친 듯 보였다.
오십 보 반경에는 궁수들이 준비를 마쳤다.
4열로 이루어진 보병들까지 절대 뚫을 수 없을 것이었다.
충분한 훈련과 정예화를 시켰다.
완전무장한 상태의 군사들이었다.
단창과 방패를 들고 있는 군사는 2열을 이루었고, 3, 4열은 장창을 부여잡고 있는 군사들이 대기하였다.
근접해 온다면 단창으로 적들을 공격하여 저지할 것이고, 그 뒤엔 3열에 있는 장창병들이 견제할 것이었다.
얼마 후, 현수는 말 위에 올랐다.
각 장수들도 제 위치로 가서 지휘할 준비를 하였다.
“대 고려국의 장졸들은 들으라.”
장졸들이 앞을 보는 과정에 현수가 한마디 하였다.
“절대 죽지마라! ”
“추웅!”
장졸들은 답하였다.
* * *
“X친 놈… 기병을 상대로… 보병으로 막아보겠다?”
여진족 추장이 가소롭다는 듯 피식 웃었다.
“새파랗게 젊은 놈이라 하더군.”
“그럼 싸움이나 제대로 하겠는가? 어린 애들처럼 오줌이나 질질 싸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
“하하하하!”
각 여진족들의 추장들은 모여서 고려군을 비웃고 있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애새끼구먼… 쳐들어와 줍쇼 하고 있어. 크히히히.”
여진족들이 보기에는 본진에서 나오지 않고, 기병을 막기 위한 전술을 택한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그 뒤에 있는 공성병기(攻城兵器)들은 보지 못한 채 말이다.
“추진력으로 밀어붙여 버리자고. 그럼 고려군은 전멸이야.”
여진족들의 추장은 각각 의견을 내놓았다.
“기병으로 들이치고, 보병으로 마무리를 짓는 게 어떤가?”
“그것도 나쁘지 않은데… 그럼 본진은 누가 보나?”
“본진에도 군사는 놔둬야 할 거 아닌가.”
“보병 한 2천 정도는 남겨두도록 하지.”
추장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스바이!”
“예. 추장.”
“네가 2천의 보병을 데리고 본진을 지켜라!”
“예! 추장!”
우스바이라는 장수가 고개를 숙이며 뒤로 물러났다.
“자, 그럼 가볼까.”
“추장, 부디 다시 생각하십시오. 이건 무모합니다.”
“뭐라!?”
“고려군을 보십시오. 일렬로 보병을 세웠습니다. 자칫 잘못해서 포위된다면 걷잡을 수 없는 피해를 볼 것입니다. 전멸당할 수도 있습니다!”
“무슨 개소리야… 저 새파랗게 어린놈이 우리를 우습게 보고 있잖아!”
추장은 간언(諫言)하는 여진족 장수에게 호통쳤다.
“악진, 너는 진영을 지키고 있어라!”
“추장!”
“저놈들은 보병이야! 기병을 보병이 이길 수 있을 것 같나!”
“이길 수 있습니다. 고려군이 저렇게 군을 배치한 건 믿을만한 구석이 있으니, 저렇게 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닥쳐라!”
“산을 끼고 기습하는 편이 낫습니다. 이건 무모한 일입니다.”
“악진, 너의 머리는 내가 가상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계속해서 기습만 할 수는 없다. 끝장을 봐야할 것이 아니냐.”
추장은 그렇게 말하고는 시선을 돌리었다.
“자, 가자!”
“추… 추장!”
악진은 달려들어 추장을 막아 세워 보려 하였지만, 우스바이는 인상을 찡그리며 악진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추장의 명은 따라야 한다. 그게 어떤 것이든 말이야.”
“하아…….”
악진은 한숨을 내쉬었다.
분노에 사리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추장이었다.
자신의 계획대로 산에서 기습을 계속했다면 고려군은 절대로 여진의 영토를 넘어오지 못했을 것이다.
고려군이 아무리 나무를 뽑고, 길을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함경도의 산세는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걸 알기에 악진은 계속해서 기습공격을 하자고 의견을 내놓았지만, 추장은 한번 들어줄 뿐 두 번을 들어주지 않았다.
“가자!”
“이럇!”
추장들은 각기 부족 군사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이동하였다.
“가자!”
“공격!”
“이랴앗!”
여진 기병들은 힘껏 고려군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두두두두.
땅이 진동하며 자욱한 먼지를 동반해 왔다.
“장군.”
“조금만… 조금만 더.”
현수는 검을 꽉 부여잡았다.
둥! 둥! 둥!
본진에서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군사들은 일제히 달려오는 기병을 보며 침을 꿀꺽 삼키었고, 1열에 있는 군사들은 창과 방패를 꽉 움켜쥐었다.
촤앙!
때가 되어 검을 뽑아 든 현수는 곧장 명을 내렸다.
“석포를 날려라!”
“석포를 날려라!”
천시호가 현수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명을 반복하였다.
군사들은 미리 석포 위에 올려둔 기름 항아리 짚단에 불을 붙이고는 곧장 날렸다.
수웅!
수십여 개의 기름 항아리가 일제히 여진족 군사에게로 날아갔다.
쨍그랑!
항아리가 깨지면서 순식간에 바닥에 불이 붙었다.
염초까지 더해지니, 화기는 매서웠다.
히이이잉!
불에 의하여 여진족의 말들이 잠시 멈추었다.
하지만 이내 불을 뚫고서 진격해 오기 시작했다.
여진족들의 기세가 대단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그런 여진족들을 향해 수없이 항아리들이 날아와 깨졌고, 몇몇 여진 기병들의 몸에 기름이 쏟아지며 그대로 타 죽어가는 기병들도 생겨났다.
푸푸푹!
기병들이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오자, 장창병들은 기병을 향해 창을 찔렀다.
창에 찔린 여진 기병은 말에서 떨어졌고, 창에 찔린 말은 중심을 잃고 쓰러지며 여진 병사들을 바닥으로 떨구어 내었다.
떨어진 군사들은 가까이 있는 창병들에 먹잇감이 되었다.
전사자(戰死者)가 속출하자, 뒤에서 달려오던 기병들은 추진력을 많이 잃은 상태로 고려군에게로 달려 들어왔다.
탕!
방패와 기병이 부딪쳤다.
고려의 보병들은 육중한 군마에 치여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속도가 많이 줄은 덕분이었다.
만약 처음 속도로 부딪혔다면 분명 보병들은 뚫렸을 것이다.
“받쳐!”
2열에 있던 군사들이 일렬에 있던 군사들을 방패로 받치며 밀어주었다.
“이야아아!”
푹!
푸푸푹!
3열에 있던 창병들이 곧장 기병들을 찔러 들어가면서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갔다.
푹! 푸푹!
군사들이 여진 기병들을 무차별적으로 찔러 죽이자, 기병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보병들에게 밀려가고 있었다.
“밀어붙여라! 계속 밀어!”
현수는 소리치면서 명을 내리며 장수들과 함께 전진하였다.
“으아아!”
비명을 지르면서 도망치는 여진 군사들.
기병의 대열이 흐트러지자, 현수는 다시 외쳤다.
“원진! 적들을 포위하라!”
“적들을 포위하라! 원진!”
장수들과 부장들이 소리치며 명을 내리자, 양쪽 끝에서 군사들이 치고 나와 여진군사들을 빙 둘러 싸갔다.
“빈틈을 주지 마라!”
척! 척!
군사들은 원진(圓陣)을 싼 채 둥글게 말아 점차 거리를 좁혀 나아갔다.
이에 여진족 기병들과 보병들은 우왕좌왕하기 시작하였다.
“길이 막혔어!”
“보병! 보병들은 길을 뚫어라!”
“막아라!”
곳곳에서 명령이 내려졌다.
여진족 보병들은 원진을 빠져나가기 위해서 온몸으로 고려군 보병에게 부딪쳤지만, 역부족이었다.
콰콰쾅!
방패와 방패가 맞부딪쳤다.
하지만 고려군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몇 번씩이나 부딪치던 여진족 보병들이 있는 힘껏 밀어내며 공격하려 하자, 뒤에서 고려군의 창병들이 창을 내밀며 찌르기 시작했다.
단창을 들고 있는 보병들 역시 사정거리에 들어온 적병을 공격하였다.
푸푸푹!
고려군의 맹공으로 여진족 군사들은 제대로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무참하게 짓밟혔다.
“밀어붙여라! 적들을 궤멸(潰滅)시켜라!”
군사들은 점점 더 거리를 좁혀가며 무참하게 여진족들을 죽여 갔다.
* * *
몇 시간 후.
두두두두두─
땅이 울렸다.
적 진영 쪽에서 무수한 먼지가 피어올랐다.
홍중방이 기병을 이끌고서 여진족 진영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산을 돌아 뒤에서 공격해오는 듯하였다.
“대 고려국 만세!”
“만세!”
기병들이 진영을 들이치며 적들을 베기 시작했다.
더불어 화로를 발로 차서 군막을 불태웠다.
불타던 군막은 곳곳으로 불이 번져 갔다.
“마, 막아라! 막아!”
여진족 장수가 군사들에게 외쳤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솨악!
홍중방이 말을 타고 여진족 장수의 목을 치며 매섭게 내달렸다.
거의 진영을 쑥대밭으로 만들자, 그대로 진영을 뚫고 나와 고려군이 있는 곳으로 향하였다.
원진 안에서 갇힌 여진족들을 향해 무자비한 살육이 시작되었다.
현수는 비명을 지르는 여진족들을 보며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서 죽어 가는걸 천천히 지켜보았다.
“정주공, 적들은 이미 전의를 상실하였네!”
정균이 말하였다.
“그래서 살려주라는 건가?”
“정주공, 전의를 상실한 여진족은 죽여 봤자입니다.”
“차라리 여기서 다 죽여서… 다시는 고려를 우습게 보지 못하게 하는 편이 낫겠지.”
현수는 씩 입꼬리를 올렸다.
정균은 죽어가고 있는 여진족을 바라보았다.
여기저기 피가 튀며 목이 잘려 가고 있는 여진족 사이에서 추장들과 장수들은 맹렬하게 저항하고 있었다.
말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던 현수는 검을 집어넣더니, 활을 들어 화살을 시위에 걸고 당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