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7화
얼마 후, 이의방은 황제의 처소(處所)로 왔다.
“지금 폐하를 봬야겠네. 고하시게.”
이의방의 말에 내관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뭐하느냐. 어서 고하지 않고.”
“저 합하… 지금 폐하께서는…….”
“하하하하!”
대전 안에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황제와 후궁의 웃음소리가 밖에까지 들려오자, 이의방은 한숨을 쉬며 다시 말했다.
“고하라.”
“아… 예…….”
내관은 이의방의 눈치를 보더니, 이내 황제에게 고하였다.
“폐하…….”
“부르지 말라 하지 않았더냐! 황제의 명이 우습더냐!”
안에서 들리는 황제의 목소리에 내관은 아무 말도 못한 채 이의방을 바라보았다.
이의방은 이에 분노하며 소리쳤다.
“폐하! 신 이의방이옵니다!”
안에 있던 황제는 화들짝 놀랐는지 옷을 주섬주섬 입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어서 들어오시오.”
문이 열리자, 이의방은 안으로 들어섰다.
황제가 후궁에게 눈치를 주자, 황제에게 인사를 하고는 곧장 밖으로 나갔다.
“기별도 없이 무슨 일이오?”
“폐하, 지금 서북면과 동북면으로 군사를 보냈습니다. 서북면에서는 거란의 잔당을 치고 있사옵니다. 비록 제가 현재 국정을 맡아 운영을 하고 있지만… 이 나라의 황제는 폐하이시옵니다. 폐하께서 이렇게 계시다가 자칫 소문이라도 잘못 난다면 군사들의 사기가 꺾일까 염려되옵니다.”
황제는 침을 꿀꺽 삼키며 이의방의 시선을 피하였다.
“거란족에게 단 한 번도 패하지 않고서 연전연승(連戰連勝)을 거두고 있는데… 무엇을 그리 걱정하시오.”
황제의 말에 속 터지는 이의방이었다.
아무리 연전연승한다고 해도 허구한 날 이러고 처박혀 있는 황제를 당장이라도 한 대 쥐어박고 싶었다.
“폐하.”
“왜 그러시오, 이 상국?”
“계속 이러고 계시면 주변국에서 무어라 하겠사옵니까…….”
이의방은 좋게 말로 하였다.
“짐은 할 일이 없어요. 이렇게 노는 것밖에는…….”
“예. 알겠습니다. 평생 이렇게 사시옵소서.”
이의방은 끝내 포기하였다.
도저히 말이 안 통하는 황제에게 인사는커녕 말없이 몸을 휙 돌려 대전 밖으로 나가버렸다.
“태후전으로 가자.”
“예. 합하.”
“하아…….”
황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경대승이는 충성한답시고 자기 세력을 만들어 나를 압박하고… 두경승은 속이 뻔히 보이는 걸 보지도 못하고 지지나 하고 있고… 대체 믿을 놈들이 없어. 내 믿을 거라곤 너희들밖에 없구나.”
황제는 환관들을 바라보며 웃었다.
“술을 가지고 오너라.”
“폐하… 약주가…….”
“내 가져오라지 않느냐?”
“예… 폐하.”
환관은 허리를 숙이며 뒤로 조심히 물러 나갔다.
* * *
이의방은 태후전에 들어섰다.
“어서 오시오. 이 상국. 어인 일로 여기까지 발걸음하셨소?”
“예… 다름이 아니오라,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 이리 찾아뵙게 되었사옵니다.”
“그래요? 상국께서 무슨 말을 할지 이야기나 한번 들어봅시다.”
태후의 말에 이의방은 편안하게 자리에 앉아 태후와 이야기를 하였다.
“좋은 생각입니다. 안 그래도 혼처를 찾던 중인데… 정주 공만 한 사람이 어디겠습니까.”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제 의사일 뿐입니다. 두 공주님들의 의견도 물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건 맞는 말이지요. 두 공주가 원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어쩔 수 없겠지요.”
이의방은 미소를 지었다.
태후는 정주 공을 보았을 때 참 늠름한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하여 태비의 조카를 시집 보내볼까라는 생각까지 하였지만, 정작 태비가 원치 않아 무산된 적이 있었다.
그렇기에 이번에도 무산되면 어쩌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리하시오.”
* * *
열흘 정도 흘렀다.
현수는 강화도로 가 공사현장을 살피어 본 후에 다시 정주로 돌아왔다.
다행히 부두에서 데려온 아이는 많이 좋아졌다.
비록 말은 통하지는 않았지만, 밥 잘 먹고 해맑은 모습이 보기 좋아서 옆에 두기로 하였다.
아이는 며칠 전부터인가 자꾸 검에 관심을 두었다.
마침 할 일도 없어 아이에게 검을 가르쳐 보았다.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는 재미있는 아이였고, 무엇보다 호기심이 있어 이것저것 알아보지도 못할 책들을 살피는데 그게 귀여워서 글도 가르쳐 보았다.
놀랍도록 빠르게 글을 읽어 나가더니, 이제는 웬만한 글자 간단한 수식어를 글로 표현하였다.
“엘리시아! 엘리시아!”
현수는 저택 주위를 돌며 아이를 불렀다.
“거기서 뭐 하느냐?”
말은 아직 못 알아들었지만, 아이에 손에는 종이가 들려 있었다.
“엘리시아, 그게 무엇이냐?”
현수는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알아들을 리 없는 아이는 무표정한 얼굴로 다가와서는 종이를 건넸다.
현수는 종이를 받아 들고서는 보다가 자기 눈을 의심하였다.
엘리시아가 그린 건 다름 아닌 지도였다.
“이거 네가 그린 거니?”
여전히 알아들을 리 없는 엘리시아.
현수는 턱에 앉아서 지도를 펼치며 손짓으로 묻자, 엘리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현수는 해도(海圖)의 한곳을 가리켰다.
“로마.”
“…로마?”
현수의 말에 엘리시아가 대답하자, 현수는 다시 다른 곳을 가르켜 보았다.
“잉글랜드.”
“여기는?”
“프랑스.”
신기하였다.
그야말로 천재가 아니면 그릴 수가 없는 것이었다.
거기에 이상한 문자가 있는데 해안선인 듯 보였다.
해안선에 가득 무언가를 적어놓았는데 이게 무엇인지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라 조금 답답하였다.
“이거… 내가 가져도 되겠느냐?”
현수가 미소를 지으며 묻자, 엘리시아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대뜸 현수의 손을 부여잡고서는 자기 방으로 끌고 갔다.
덜컹.
현수는 깜짝 놀랐다.
작은 종이에 그려진 지도 말고도 지금까지 얼마나 그린 것인지 벽에 하나의 세계가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역시나 알 수 없는 기호를 곳곳에 써놓았다.
“이게… 말이 되는지…….”
현재 어느 나라를 가도 이런 지도를 구할 수 없었다.
현수는 침을 꿀꺽 삼키었다.
“너 천재니?”
“아… 어… 으…….”
무슨 말을 하고 싶은 듯한 표정이었지만,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현수는 그런 엘리시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천천히 하자꾸나.”
“여기.”
“응?”
“어으…….”
자꾸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 하는 엘리시아였다.
“네가 거기서 온 거냐?”
한쪽을 계속 가리키며 말하던 엘리시아는 곧장 상 앞으로 가서는 붓을 들고서 글을 써 내리고는 현수에게 내밀었다.
“집…? 아… 여기가 네 집이라고!?”
현수는 이제야 알아들을 수 있었다.
엘리시아는 처음으로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작은 막대기를 집어서 자기 집을 가리켰고, 이번엔 반대편을 따라 고려를 가리켰다.
“그래. 여기 집… 집에서 이렇게 해서 고려에 온 거구나.”
멀뚱멀뚱 현수를 바라보는 엘리시아.
설명은 했지만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는 못한 듯하였다.
“많이도 돌아다녔구나. 어린 녀석이… 그래…….”
현수는 알 수 없는 짠함에 엘리시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자 이번엔 엘리시아가 현수가 허리춤에 차고 있는 검을 가리켰다.
“그래. 알겠다. 가자.”
현수는 엘리시아를 데리고서 앞마당으로 향하였다.
앞마당으로 온 현수는 목검을 엘리시아에게 쥐여주더니, 자신도 목검을 쥐었다.
“자, 들어와 보거라.”
현수는 한 손으로 목검을 움켜쥔 상태로 자세를 취하였다.
엘리시아는 있는 힘껏 강하게 현수에게로 달려들었다.
타탁!
목검이 경쾌하게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하하하!”
현수는 그런 엘리시아가 재미있었다.
점점 매섭게 목검을 휘두르는 엘리시아의 속도에 말이다.
타타탁!
연타로 들어오는 엘리시아는 평범한 아이가 휘두를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고 있었다.
한동안 묵묵히 목검을 받아 주다가 현수가 이번에는 공격을 하자, 엘리시아는 가볍게 목검을 막아 냈다.
그걸 본 현수는 즐거워하다가 발로 엘리시아의 다리를 살짝 걷어찼다.
툭!
엘리시아가 힘없이 넘어지더니, 이내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목검을 움켜쥐었다.
“하체가 강해야 발길질을 당해도 버틸 수가 있단다. 자, 다시!”
“으…….”
이를 악물고 현수에게 다시 달려드는 엘리시아.
하지만 현수는 손쉽게 목검을 피하면서 엘리시아의 손목을 가볍게 목검으로 쳐냈다.
그러자 엘리시아는 또다시 목검을 떨어트렸다.
“검을 배울 때는 말이다. 보법이 우선이야. 미친 척하고 달려들면 그렇게 손쉽게 당한다.”
알아들을 리 없는 엘리시아였지만, 현수는 목검을 내려놓고서 천천히 엘리시아에게로 다가가 자세를 한번 교정해 주었다.
“이 자세를 기억하거라. 하체가 튼튼해야지 어떤 상황이 오든 버텨낼 수가 있단다.”
현수는 다시 목검을 쥐고서 왼발을 툭 치자, 엘리시아는 앞으로 한발을 내밀었다.
“옳지. 한 발을 내디딜 때 강하게 내리 딛는 것부터 해야지… 그래야 나중에라도 빠르게 치고 나갈 수가 있다.”
현수는 천천히 엘리시아에게 보법을 가르치면서 시간을 보내기 시작하였다.
* * *
그날 저녁.
“절도사, 정주 공께서 전서구(傳書鳩)를 보내셨습니다.”
“어디 줘 보거라.”
이경수는 작은 통을 받아 열고는 내용을 보았다.
[이게 무슨 기호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 부디 살펴주시오.]
짧게 적힌 글씨를 보고 다른 종이를 펼치자마자, 이경수는 얼굴이 굳어졌다.
“절도사, 왜 그러십니까?”
부장이 굳어진 표정의 이경수를 바라보며 물었다.
“모두 물러가라.”
“예.”
부장들이 고개를 숙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자, 이경수는 종이를 내려놓고서는 자세하게 살폈다.
정말 알아볼 수 없는 기호가 수두룩하게 쓰여 있는 종이에 이경수도 정말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이건 해안선인데… 대체 이 기호들은 무엇이란 말인가.”
난생 처음 보는 문자들 때문에 이경수도 이게 대체 무슨 의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건 물결인가?”
~ 물결 모양이 세 줄 있었고, 위로 솟아난 물결 모양도 있었다.
거기에 o 모양들도 중간중간 박혀 있으니, 도통 무얼 의미하는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물론 이경수가 알아볼 수 있는 문자들도 종종 있었다.
“이건 날짜인데… 날짜와 물결이 무슨 상관인가?”
이경수는 곰곰이 생각하였다.
필시 날짜와 물결표가 연관이 있어 보였다.
“7월에… 바다가 높다는 거야… 뭐야?”
자기도 이해가 되지 않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잠깐… 높아?”
이경수는 잠시 다시 생각해보았다.
일렬로 된 물결표와 위로 솟은 물결표 그리고 날짜.
이걸 한번 조합을 해보았다.
“7월 26일의 파도를 의미하는 건가? 그리고… 아! 그래! 하하하!”
이경수는 이제 알았다는 듯 크게 웃었다.
“이날 폭풍우가 온 거구나!”
반신반의했지만 분명 이건 확실히 폭풍우를 의미하는 것 같았다.
7월은 장마철이다.
장마철에 물결표가 올라왔으니, 분명 파도가 높게 쳤을 것이다.
그러니 겹쳐진 원형은 회오리를 의미할 것이다.
이경수는 이러한 방식으로 지도의 뜻풀이를 문제를 풀듯이 해보았다.
물론 맞는지 아닌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