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0화
“자, 앉으시오.”
“고맙습니다. 합하.”
아전보는 그새 얼굴색이 활짝 펴져 있었다.
어젯밤에 좋았던 모양이었다.
“합하, 어제 저의 침소에 들었던 아이 말입니다. 제가 돌아갈 때 데려가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오. 사신의 뜻대로 하세요. 하하하.”
“고맙습니다.”
사신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감사함을 표하였다.
“저… 사신.”
“예.”
“이걸 한번 보셨으면 좋겠소.”
어제 동북면병마사 박수경이 보내온 장계를 아전보에게 보여주었고, 금 사신 아전보는 장계를 읽자마자 표정이 바뀌었다.
“흠…….”
여진의 일부분은 금의 영향력에 벗어나 있었고, 자기들끼리 알아서 움직이는 족속들이 있었다.
그렇기에 금에서도 그냥 방관만 하고 있었는데 장계에 내용을 보자마자 심각성을 느꼈다.
금에 영역에 벗어난 여진은 함경도에 주로 있었다.
고려가 토벌에 하는 데는 문제가 없지만, 금나라가 이를 가지고 문제 삼을 수 있기에 먼저 사신에게 보여준 것이다.
“돌아가는 대로 폐하께 상주(上奏)하겠습니다.”
“음…….”
이의방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고려에서 토벌하겠소이다. 함경도는 본래 우리 영토가 아닙니까. 특히나 거란족과 손을 잡고 고려의 국경을 넘는다면… 고려는 많은 피해를 받게 될 것이오.”
“여진은 우리의 백성이기도 합니다.”
“금에서 언제 이들을 신경 썼다고 백성이오?”
단지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러 왔는데 갑자기 정치 이야기가 오고 갔다.
금에서 거부한다고 하더라도 토벌을 하는 건 고려 마음이다.
금이 고려와 척을 지낸다면 걷잡을 수 없을 것이다.
현재의 고려는 국력이 강하며 금나라와 싸워도 지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아전보는 알았다.
특히나 남송의 황제가 책을 잡으려 이를 갈고 있는 터라, 고려의 토벌에 관하여 금에서 나선다면 당장 고려는 송과 손을 잡을 수 있었다.
아전보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고민할 게 뭐 있습니까… 나는 지금 사신의 허락을 받으려고 하는 게 아니라, 토벌대를 보내겠다는 말을 하는 것이오.”
“예?”
아전보는 깜짝 놀랐다.
지금 자신의 예측한 바와 정반대의 방안을 낸 것이었다.
고려가 군사를 일으켜 토벌대를 보낸다니.
그럼 금나라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고, 금에서도 군을 일으킬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국경 쪽으로 송나라 대군이 움직일 건 뻔하였다.
‘이자는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아전보는 의문이 들었다.
고려의 집정 대신 이의방의 정체에 대해서 말이다.
금에서는 고작 권신으로 밖에는 보지 않았는데 이렇게 대면하면서 보니 한낮 권신이 아니라는 것을 아전보는 느낄 수 있었다.
“사신께서 돌아가시면 고려 측에서 준비할 것이니, 사신은 돌아가는 대로 황제 폐하께 고하시면 되는 거요.”
“아…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하하!”
이의방은 크게 웃었다.
“인삼차가 있는데 어떠시오?”
“좋습니다.”
아전보는 좋다며 미소를 지었다.
“밖에 인삼차 좀 내오거나.”
“예. 합하…….”
밖에서는 곧장 대답하고 움직였다.
이의방은 아전보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합하, 남송의 움직임이 심상치가 않아 금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금은 북에 몽고족 때문에 국경으로 군사를 파견하였습니다. 게다가 남송의 움직임 때문에 지금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때를 틈타 함경도를 토벌한다면 금에서도 어쩌지 못할 것입니다.”
“가능한 일인가?”
“합하께서 마음만 먹는다면 가능한 일이옵고… 금에서는 오히려 방관만 할 것입니다.”
“어찌하여?”
“남송 때문이지요. 금나라가 우리를 공격하려 든다면 남송은 반드시 움직일 겁니다.”
예부 상서 유응규와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몇 차례나 금에 사신으로 다녀왔던 유응규였다.
그렇기에 그는 금의 대신들과 가까이 지냈고, 금의 사정을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이의방은 그런 유응규의 말을 항시 귀담아들었다.
게다가 함경도는 산지가 많다 보니, 보병과 궁병 위주로 훈련을 강화하였고 기병은 항시 훈련 때처럼 하였다.
준비는 이미 되었으니, 이제 명분이라고 할 것 없이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 * *
열흘 후.
서경에서 이의방의 서찰을 받은 이준의였다.
[현수를 정주로 보내고, 개경과 정주에 집을 마련해주시오. 또한 정균을 정주로 보냈으니, 6위 장군 교서를 내려 현수의 부장으로 사용하게 하시오.]
“흐음…….”
이준의는 가는 신음을 내뱉었다.
대체 이의방이 무슨 생각으로 정균을 살려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살려두면 화를 부를 것은 불 보듯 뻔했다.
거기다가 현수를 정주로 보낸다니.
더욱더 이상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아우 이의방의 명을 무시할 수는 없으니, 이준의는 서찰을 덮어서 서랍장에 넣었다.
“최 집사! 밖에 있느냐!”
“예! 우복야!”
문이 열리면서 집사가 안으로 들어왔다.
“최 집사, 개경과 정주로 가서 좋은 집 하나 사놓게.”
“예?”
순간 최집사는 이준의가 첩을 들였나 생각하였다.
“정주 공의 저택이니, 좋은 놈으로다가 준비를 하게.”
“아! 예! 알겠습니다.”
최집사는 고개를 숙이며 곧장 뒤로 물러 나갔다.
“현수가 당장 떠난다면… 누가 조정을 이끈단 말인가.”
이준의는 자신의 수염을 매만지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중방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현수는 계속해서 전령 소식을 받고 있었다.
청주, 충주를 공략하고 군현마저도 수복(收復)하였다는 최원호 장계를 말이다.
하지만 공주를 수복하는 건 시일이 걸릴 것이라고 했다.
이에 현수는 추가로 공주에 군사를 파견하였다.
예산 문제는 또한 장난이 아니었다.
자칭 예산 병마사라고 하는 손청의 거센 저항으로 인하여 관군이 대패(大敗)했다는 소식을 받자, 먼저 공주를 탈환한 다음에 예산 토벌을 진행하라고 명을 내렸다.
우선 상황을 보며 대치를 하는 게 옳을 것 같았다.
덜컹.
문이 열리자, 현수는 시선을 문 쪽으로 두었다.
“아니… 정주 공… 아직 아니 들어가셨습니까?”
“아, 예. 계속해서 장계를 받고 있었습니다. 잠이 안 와서요.”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이는 다름 아닌 형부 상서 최인이었다.
퇴청도 하지 않은 현수를 본 최인은 좀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누구는 반군 때문에 잠도 안 자고 있는데 자신은 퇴청하고 자고 왔으니 말이다.
최인은 조심스럽게 자기 자리에 앉았다.
“어찌 됐습니까?”
“노비 중에 주인을 죽인 노비들도 포함되어 있는데… 이를 어찌 처리하면 좋을지 고민입니다. 그리고 향, 소, 부곡민들은 각 공역장으로 보내었습니다.”
어제 늦도록 심문을 마치고 난 후에 들어간 최인이었다.
“대부분은 관노로 채택을 하였다는 말이군요.”
“그렇습니다. 정주 공.”
“장 100대를 치고 관노로 채택하시오.”
“예. 그리하겠습니다.”
정말이지 관대한 처사였다.
주인을 죽인 노비에게 사형이 아니라, 장 100대라니.
하지만 문제는 맞는 도중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이고, 살아남았다고 한들 맞고 난 후의 후유증으로 죽을 수도 있었다.
“별일 없으면 형부로 가보세요.”
“예, 정주 공.”
최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인 뒤, 밖으로 나갔다.
현수는 책에다가 그동안에 있던 일들은 조목조목 적어놓았다.
항시 일이 끝날 때마다 무슨 일이 있었고, 어떻게 처리를 하였는지 적었다.
이의방이 오면 물을 테고 답 대신에 이걸 전해주면 되니 말이다.
덜컹.
문이 다시 열리면서 이번엔 이준의가 안으로 들어왔다.
“어서 오십시오.”
현수는 밝게 미소를 지으며 이준의를 맞이하였고, 이준의는 자리에 앉았다.
“퇴청하지 않았느냐?”
“아… 예. 장계를 살피느라.”
“현수야… 아우가 너에게 정주로 가라는구나.”
“…예?”
“곧 돌아올 모양이야. 사신단과 함께 말이지.”
“아…….”
“며칠 내로 준비를 하거라. 아우가 정주와 개경에 네 집을 마련하라고 나에게 언질을 줬다. 집사에게 말해놓았으니 그리 알고.”
“집이요?”
“그래. 언제까지고 아우의 저택에만 있을 수 없지 않느냐.”
그건 그러했다.
이의방을 처음 만나고 나서부터 쭉 이의방의 저택에서 계속 있었다.
이제 집을 구해준다니, 뭔가 애석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정주에 가면 정균이 있을 거다.”
“예?!”
순간적으로 현수는 정색을 하였다.
정균, 정중부의 아들이 정주에 있다는 것에 현수는 살짝 긴장하였다.
“네 부관으로 쓰라는구나.”
“정주에서요?”
“그래. 아우의 생각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정균에게 육위 장군 교서를 내리라고 하니…….”
이준의는 미리 현수에게 언질을 줬다.
위험한 인물이니, 주의하라고 말하는 것이었고 이를 모를 리 없는 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더불어 아우가 너에게 몇 가지 지시를 해놓았는데… 직접 읽어 보거라.”
품속에서 서찰을 꺼내어 현수에게 건네자, 현수는 살피었다.
[정주, 강화에서 군사훈련을 시키고 정주와 강화의 민심을 두루 살피도록 해라.]
짧은 서찰 내용이었다.
뭐 당연하기도 하였다.
정주, 강화는 현수의 소유이니 말이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걸 합하께 전해주십시오. 부재중이실 때 그동안 신료들과 처리한 내용을 적어놓은 것입니다.”
“오호! 그래?”
이준의는 책을 건네받고서 한번 쭉 살피어 보았다.
날짜부터 해서 어떤 내용이 있었는지 빼곡하게 적혀있었고, 어찌 처리하였는지도 상세하게도 적혀 있었다.
“대단하구먼… 이러니 아우가 너를 좋아할 수밖에…….”
이준의는 미소를 지었다.
“하하하! 고맙습니다.”
현수 또한 웃으면서 답하였다.
* * *
닷새 후.
사신단과 환궁한 이의방은 객관에 사신을 모셔놓고서 황제에게 인사를 했다.
그런 뒤 중방에 들어 신료들과 잠시나마 조회를 가지고서 저택으로 돌아왔다.
“합하, 현수입니다.”
“들어라.”
덜컹.
방문이 열리면서 현수가 안으로 들어섰다.
“앉거라.”
현수는 자리로 와서는 앉았다.
“정리할 건 많이 남았느냐?”
“아니옵니다. 정리를 마쳤사옵니다.”
이의방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출발할 때쯤 내가 도착하겠거니 생각했더니… 아니게 되었네.”
“예. 합하.”
“서찰은 받았겠지?”
“그러하옵니다. 합하.”
“다시 한번 더 이르지만… 너는 정주와 강화의 주인이다. 따라서 식읍(食邑)도 너에게로 갈 것이고, 조정에서 나오는 녹봉(祿俸)도 너에게로 갈 것이야. 그동안은 내 집으로 네 녹봉이 왔지”
“예. 합하. 제대로 써본 적도 없이 모두 모아만 놓고 있었사옵니다. 개경에 집이 생기면 그곳으로 재물을 옮겨놓을까 하옵니다.”
“그래. 네가 그렇게 하겠다면 내가 너의 집을 관리하여 녹봉도 그리로 보내주마.”
“감사하옵니다. 합하.”
“정주에 가면 귀족들이 많을 것이고, 강화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네가 식읍을 안 받아 귀족 놈들의 배만 채웠지.”
순간적으로 현수는 이의방을 바라보았다.